민족의 구심체로 항일 독립 이끌다

  • 입력 2008년 3월 1일 03시 21분


동아일보는 1920년 7월 12일자 3면에 3·1운동 지도자 48인에 대한 공판을 앞두고 ‘금일(今日)이 대(大)공판’이란 기사와 함께 48인의 얼굴 사진을 빼곡히 실었다. 당시 언론 통제를 아랑곳하지 않고 과감하게 48인의 얼굴을 모두 넣은 시각적 편집은 3·1운동의 정신을 되새기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동아일보는 1920년 7월 12일자 3면에 3·1운동 지도자 48인에 대한 공판을 앞두고 ‘금일(今日)이 대(大)공판’이란 기사와 함께 48인의 얼굴 사진을 빼곡히 실었다. 당시 언론 통제를 아랑곳하지 않고 과감하게 48인의 얼굴을 모두 넣은 시각적 편집은 3·1운동의 정신을 되새기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3·1절에 되새겨보는 東亞정신

3·1절 89주년 - 창간 88주년

3·1운동은 동아일보의 모태(母胎)였다. 무단정치 시기 일제는 한국인들에게는 일간신문의 발행을 철저히 금지하다가 민족적 저항에 봉착하자 통치 방식을 이른바 ‘문화정치’로 바꾸면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발행을 허가했다.

3·1정신은 평화와 비폭력이다. 전국적 조직을 갖춘 체계적인 운동은 아니었지만 서울에서 발화하여 삼천리 방방곡곡 도시와 산촌에 이르기까지 고루 전개되었으며 해외의 교포들과 열강의 침략 아래 있던 아시아 여러 나라의 민족운동을 격발(激發)하였다.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과 3·1운동은 두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항일 독립이라는 목표가 같고, 전국적 조직이 없는 자발적 민족운동이 그것이다. 두 운동은 ‘독립’이라는 목적을 당장에 달성하지는 못하였지만, 영향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도 공통된다. 민족의식,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강렬한 투쟁정신을 불러일으키면서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도록 했다. 3·1운동은 국제적으로 한국의 처지를 널리 알려 그 후의 독립운동을 지원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선전의 자료를 제공하여 독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3·1운동의 결과로 국외에서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지만, 국내에는 민족을 대표하는 조직이 결성될 수 없었다. 식민지 통치 당국이 허가한 민족적 구심체는 신문사였다. 민족자립의 기초가 되는 민족문화의 향상과 민족자본을 확립하려 하였으나, 이를 결집할 기관이 없었다. 정부가 없는 민족이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언론 출판과 집회 결사의 자유인데 식민지 통치 당국이 이를 허용할 리 없었다. 총독부 치하에서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신문을 가질 수 있었기에 교육, 문예, 학술, 종교, 실업 등 모든 분야의 지식인들은 정신적인 구심점에서 소통하고 유대감을 가질 수 있었다.

옛팀瞿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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