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균

박제균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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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박제균 고문입니다.

phark@donga.com

취재분야

2024-03-28~2024-04-27
칼럼97%
선거3%
  • [박제균 칼럼]이게 정말 나라인가

    조국 사태는 좌우의 문제가 아니다. 높이, 즉 수준의 문제다. 사람이면 마땅히 갖춰야 할 격(格)의 수준 말이다. 인격이나 인품, 인간성이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한데 이걸 자꾸 좌우의 문제로 끌고 가려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 수준의 문제를 좌파·우파의 진영논리로 호도하려는 사특한 기도다. 그런데 그게 먹힌다. 대한민국의 기막힌 현실이다. 좌우 진영논리는 어느새 이 나라에서 만능열쇠가 돼버렸다. 자신이 쏟아놓은 말·글과 살아온 행적이 들어맞는 구석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운 인물. 그래서 연극성 인격장애가 아닌가 의심스러운 사람도 진영의 틀에 넣어 돌리면 면죄부를 받는다. 심지어 실정법을 어겨도 진영의 틀 안에서 정신적 무죄를 받는다. 그래서 누구보다 떳떳하다. 정상적인 나라의 모습이 아니다. 한때는 지역감정이 우리 사회의 망국병(亡國病)으로 불렸다. 지역감정이란 게 어느 시대나 상존했고, 지금도 맹위를 떨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호남 출신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을 꼭짓점으로 지역색에 덜 민감한 유권자 세대가 속속 유입되면서 정치적 영향력은 조금씩 줄어드는 추세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 이후 지역감정보다 더 위험한 감정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좌·우파가 내 편, 네 편을 나누고 상대를 향해 분노와 적개심을 표출하는 진영감정이다. 과거 지역감정을 보수우파 정권이 키운 측면이 있다면 진영감정은 진보좌파 정권이 조장한 면이 크다. 그 결과 문재인 정권 들어서는 대한민국이 두 동강으로 갈라진 느낌마저 준다. 대통령 자신부터 국민통합보다는 주류세력을 내 편으로 교체하는 데 앞장서 온 탓이다. 진영감정이 지역감정보다 치명적인 이유는 영호남이라는 특정 지역에 편중되지 않고 온 나라가 휩쓸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람이나 사건을 진영의 틀로 재단하는 순간 도덕적인, 심지어 법적인 판단마저 마비된다. 조국 정국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지금 이 나라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수많은 조국들이 넘쳐난다. 진실을 덮으려 사실상 회유·협박 전화를 해놓고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갖다 대도, ‘살아 있는 권력에 엄정하라’고 해놓고는 정작 산 권력에 검찰이 손을 대자 불과 한 달여 만에 ‘미쳐 날뛰는 늑대’라고 말을 뒤집어도 수치를 모르는 사람들. 언론의 본령인 비판, 특히 산 권력 비판은커녕 결사옹위에 나서는, 언론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운 의사(擬似) 언론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뒤에 숨어서 실검을 조작하고, 조국에게 따끔한 말을 했다고 문자 폭탄을 배설하는 익명의 무리들…. 모두가 진영논리라는 철갑 속에서 안전하고 떳떳하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단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독재정권의 폭압 속에서도 4·19혁명과 6월항쟁을 일구며 자유로운 나라를 꿈꿨던 국민들은 익명의 갑옷 뒤에 숨은 군중의 독재를 두려워하는 처지가 됐다. 이게 바로 문 대통령이 말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인가. 문 대통령은 나라가 갈기갈기 찢기고 도덕적 법적 기준마저 좌우 진영논리에 함몰된 작금의 혼돈에 책임을 져야 한다. 본인이 갈등의 직접 원인제공자는 아닐지언정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원수로서 국민통합 의무를 방기하고 분열을 방조, 또는 조장한 책임이다. 책임지는 첫걸음은 당연히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의 지명 철회다. 청와대와 여당, 정권 지지 세력들은 조 후보를 지명 철회하면 마치 정권이 결딴날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하지만 어떤 나라도, 정권도, 대통령도 사람 하나 자른다고 무너지지 않는다. 조국은 대체 가능한 인물의 하나일 뿐이다. 대통령이 임명을 강행한다면 기어코 민심을 이겨보겠다는 것이다. 북한과 중국에는 설설 기고, 미국과 일본에는 외교전에서 번번이 깨지면서 내부의 비판여론만 눌러버리겠다면 승복할 사람이 없다. 문 대통령은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도 이 나라 국민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 떠들어라, 난 내 갈 길 간다’ 식이어선 국정이 제대로 굴러갈 수 없음을 지난 2년 4개월이 증명한다. 그해 겨울 촛불을 든 많은 사람들의 비원(悲願)은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나라답지 않은 나라’를 만들어놓고 ‘이게 나라다’라고 한다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런 의문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이게 정말 나라인가.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 2019-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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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제균 칼럼]문재인과 조국의 나라

    ‘조국 사태’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 취임사의 명구(名句)가 만신창이 되고 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란 대목이다. 아름다운 문장이지만 ‘힘 있는 자에게만 그렇다’는 단서가 빠졌다는 것이다. 주술(主述)을 바꿔 ‘평등은 기회 있는 사람만, 공정은 과정일 뿐이고, 정의는 결과에 따라 다를 것’이란 패러디도 나올 법하다. 대통령 취임사라는 게 대체로 미사여구(美辭麗句)의 나열이고, 당선의 격정에 좀 오버하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너무 나갔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는 지상(地上)에 구현하기 어려운 이상향에 가깝다.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건 좋지만, 문재인 정부에서 그렇게 될 거라고 단언하는 건 곤란하다. 과연 지금 그런 나라가 도래(到來)했다고 여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태 당사자인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야말로 자신이 쏟아낸 너무나 많은 ‘아름다운’ 말과 글의 무게에 치여 허덕이고 있다. 나도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글로써 업(業)을 쌓고 있음을 잘 안다. 그래서 더욱 궁금해지는 것이다. 조국은 본인이 늘어놓은 그 숱한 말과 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메시지와 자신의 실제 삶과의 괴리가 마음에 걸리지 않았을까. 장관 될 생각을 하고,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걸 보면 마음에 거리낌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또 궁금해지는 것이다. 조국은 그가 잘 쓰는 표현대로 ‘지식인’ 또는 ‘학인(學人)’이 마땅히 갖춰야 할 덕목인 객관화(客觀化) 능력을 상실한 것은 아닌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부정하고 ‘공정하고 평등하며 정의로운 가상현실의 나라’를 꿈꾸다 보니, 본인의 실제 삶이 내뿜는 단내를 부인하고 ‘나는 그래도 괜찮다’는 가상현실에 빠진 것은 아닐까. 이것이야말로 강남좌파 지식인들이 흔히 빠지는 내로남불의 함정이다. 더욱 안타까운 사람은 문 대통령이다. 외교안보와 경제에서 막다른 골목에 몰렸지만 단 한 사람, 김정은만 돌아서면 모든 게 한꺼번에 풀릴 것이란 환상을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김정은에게 ‘평화경제’ 같은 큐피드의 화살을 날리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미사일이다. 미사일만 쏴도 괜찮은데 “중재자 행세 그만하라” “정말 보기 드물게 뻔뻔한 사람” “아랫사람이 써준 것을 그대로 졸졸 내리읽는다”고 조롱까지 한다. 그래도 김정은의 선의를 믿는 대통령이 답답하고 안타깝다. 대한민국 안보의 목줄을 쥔 미국을 자극하고, 우리 경제의 급소를 쥘 수 있는 일본을 무시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파기를 통보한 결기의 10분의 1이라도 김정은에게 보여야 한다. 그래야 그를 대통령으로 둔 이 땅의 국민도 자존심을 되찾을 수 있다. 문 대통령과 조국 후보자는 같은 우물에 빠져 있다. ‘친일파와 보수세력이 득세해온 대한민국은 진정한 나라가 아니다. 북한과 화합해 이 땅의 주류세력을 청산하고 새 나라를 열어야 한다’는 가상현실의 우물이다. 그 우물에 빠져 대통령은 김정은과 북한의 실체를, 조국은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그 우물에서 빠져 나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나이 든 사람일수록, 더구나 성공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가치관을 바꾸기는 어렵다. 그걸 바꾸는 순간, 자신이 평생 쌓아온 세계관이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통령과 조국이 장삼이사(張三李四)가 아니라는 점이다. 권력자와 실세가 가상현실의 나라를 향해 치달을수록 진짜현실의 민초들은 고단해지기 십상이다. 특히 나라의 지도자가 외교와 안보의 냉엄한 현실을 제대로 못 보면 국민은 위험해질 수밖에 없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전성기를 연 7대 술탄 메흐메드 2세. 이후에도 서방 기독교세계 정복사업을 펼친 그는 잔인했다.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약속하곤 정복지의 지배층을 모조리 살해하기도 했다. 이를 전해들은 다른 곳에서 성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전을 펼치자 ‘항복하면 알라께 맹세코 목을 베지 않겠다’고 약속해 문을 열게 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그는 신에 대한 맹세를 지켰다. 목이 아닌 몸통을 베어 수비군 전원을 살해했다. 역사는 잔인했던 메흐메드 2세를 정복자로, 공포심에 눌려 그의 약속을 믿고 무장해제를 결정한 사람은 무능한 지도자로 기억한다.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 2019-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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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제균 칼럼]아베가 아니라 김정은이다

    ‘세상일이란 게 만들기는 어려워도 부수기는 금방이다.’ 이 말이 요즘처럼 실감나게 다가온 적은 없다. 단지 집권 2년이 조금 더 지났을 뿐이다. 그런데 국가 안보에선 동맹인 미국이 손을 떼려 하고, 점점 더 김정은의 놀잇감으로 전락하면서 중국과 러시아까지 숟가락을 들이미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가 펼쳐지고 있다. 한일관계는 어떤가. 집안으로 치면 살림에는 관심 없는 무능한 가장(家長)이 아랫집과 약속을 뒤집어서 사이가 틀어진 뒤 송사(訟事)까지 터져 결국 싸움이 났다. 하지만 동네 인심 다 잃어서 편 들어주는 이 하나 없다. 그래도 가장이란 사람은 윗집이 도와주면 단번에 이길 거라고 호언하는데, 윗집에선 ‘공연히 맞을 짓 말라’고 한다. 만만한 가족들만 다그치며 싸움에 뛰어들지 않으면 ‘패륜아’란다. 그 말을 듣는 가족들의 심경은 어떻겠나. 물론 한일관계는 이렇게만 비유할 수 없는 특수성이 있다. 외교를 경제로 보복하려는 아베 신조 정권의 작태는 문명국에서 해선 안 될 일이다. 굳이 애국심을 들먹이지 않아도 기왕 벌어진 싸움이라면, 특히 그 상대가 일본이라면 이기고 싶은 심정이 우리의 DNA에 박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공언한 대로 일본에 다시 지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국민의 힘을 모아야 한다. 그러려면 한일관계를 이 지경이 되도록 방기(放棄), 아니 사실상 조장해온 외교 실정(失政)에 대해 국민들에게 사과 혹은 유감표명이라도 한마디 하는 게 순서가 아니었을까. 그런 다음에 기왕에 벌어진 싸움이니 힘을 모아달라고 호소하는 것이 리더다운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외려 ‘친일파’니 ‘매국노’니, 심지어 ‘토착왜구’ 같은 낙인을 찍으며 적전분열(敵前分裂)을 일으키고 있다. 하기야 그 낙인찍기에 앞장섰던 사람을 보란 듯이 다시 중용해 언감생심(焉敢生心) ‘대망론’까지 나오는 마당이니, 애초부터 국론을 모을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정권이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 초기에 지금의 반의 반만이라도 움직였다면 갑작스러운 ‘애국심 소환’에 덜 뜨악했을 것이다. 작금의 한일관계를 보면서 문재인-아베 정권이 외교를 정치 제물로 삼아 ‘적대적 공생’을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결국 믿을 건 정권이 아니다. 한국과 일본의 양식 있는 국민이 정권이 막 나가지 않도록 감시·견제하고, 여론이 냉정을 되찾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훨씬 더 깊이 걱정하는 건 한일관계나 아베 신조 총리가 아니다. 북쪽의 젊은이다. 문 대통령은 올해 66세, 김정은은 35세다. 하지만 노회(老獪·경험 많고 교활함)하다는 표현은 왠지 문 대통령보다 31년 아래인 김정은에게 잘 들어맞는다. 김정은은 집권 7년여 만에 북한을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만들었다. 그 핵을 미국까지 날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도 가졌다. 군사력이야 게임이 안 되지만, 미국으로 하여금 ‘한 방’을 걱정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미국과 협상을 벌였다. 그런데 그 협상의 흐름이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최근 들어 김정은은 콕 집어 ‘남조선’이 표적이라며 갖은 고도와 사거리의 미사일을 쏴대고 있다. 그것도 남쪽의 가상표적을 상정해 우리의 요격 시스템을 무력화하는 방식으로 쏜다. 한데 미국이 이상하다. 북한을 악마로 보는 매파 중의 매파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마저 ‘넌 오브 아워 비즈니스(None of our business)’라는 태도다. 어느덧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과 ‘아름다운 친서’를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북-미 협상 결과는 미국이 점점 한국 안보에 손을 떼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기야 내가 미국의 정책결정권자라고 해도 동맹을 동맹이라고 부르기를 꺼리는 ‘홍길동 동맹’을 선뜻 지켜줄 생각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럴 바에야 돈이라도 많이 받아내려는 건 장사꾼 트럼프만의 속내는 아닐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 더 김정은의 손아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김정은은 안다. 한국만 완벽하게 인질로 잡으면 정권이 생존하고, 잘하면 경제도 살릴 수 있다는 걸. 그런데도 우리의 지도자는 김정은의 선의라는 걸 믿는다. 김정은이 미사일 놀이로 남쪽을 유린해도 9·19 남북군사합의를 깨지 않았다며 우리 스스로의 손발을 묶고 있다. 애국을 말하려거든, 애국은 나라 지키는 일부터 시작된다는 걸 깨달았으면 한다.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 2019-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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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제균 칼럼]‘對北 올인’… 되레 남북관계 망치는 주범이다

    이쯤 되면 짝사랑을 넘어 ‘중독’이라고 해야 하나. 북한이 25일 발사한 미사일 두 발은 우리에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보다 훨씬 가공할 위협이다. 사거리가 딱 한국만을 겨냥했을뿐더러 김정은은 아예 남측에 대한 ‘경고’라는 딱지까지 붙여 날려 보냈다. 무엇보다 우리 군 당국이 탐지-추적-탄착점 예측에 모두 실패했을 만큼 최신형 무기다. 핵탄두 탑재 가능한 탄도미사일이어서 유사시 동쪽이 아니라 남쪽을 겨냥한다면…. 긴 말이 필요 없다. 그래도 문재인 정부는 숨죽이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행위는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완화 노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버릴 하나 마나 한 논평을 냈을 뿐이다. 김정은이 ‘남조선 당국자’ 운운하며 문 대통령을 향해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음에도 말이다. 청와대에선 이번 미사일 발사로 유엔 안보리 제재가 들어가지 않을까, 외려 김정은을 걱정하는 분위기마저 감지된다. 이웃 폭력배가 나를 때렸는데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항의할까봐 우려하는 모양새다. 속으로는 문 대통령도 진심을 몰라주는 김정은이 섭섭할 것이다. 눈을 청와대 밖으로도 돌려 무수한 국민이 대북(對北) 굴욕감에 상처받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직전 북한은 국내산 쌀 5만 t 수령마저 거부했다. 직접 지원보다 북한 자존심이 덜 상하도록 세계식량계획(WFP) 포대에 넣어 ‘포대갈이’까지 했건만, 야멸차게 걷어찼다. “남북 대화 하나만 성공시키면 나머지는 ‘깽판’을 쳐도 괜찮다”고 공언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보다도 더 남북관계에 올인(다걸기)해온 문 대통령. 북한과 김정은을 향한 집착이 안쓰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짝사랑이 성공하는 사례는 드물다. 그래서 대표적 성공 사례부터 볼 필요가 있다. 평화적으로 결혼(통일)에 골인한 나라 독일이다. 1971년 동서독 교통협정 이후 서독 정부는 1990년 통일 때까지 19년간 20억 달러가량을 동독에 지원했다. 그러면서 일관성 있게 지킨 제1의 원칙은 상호주의였다. 지원 건수마다 동독의 제도나 동독인의 인권 개선, 동서독 인적교류 확대와 동독 정치범의 서독행, 동독인의 서독방송 청취 허용 같은 조건을 달았다. 서독은 통일을 서두르지 않았다. 동독인 삶의 향상을 목표로 한 정책을 꾸준히 추진해 동독의 내부 변화를 유도했다. 그 결과 동독의 체제가 더 이상 내부 변화를 담을 수 없는 임계점에 이르자 통일이 터진 것이다. 이를 위해 서독은 말 그대로 가성비 높게 돈을 썼다. 우리는 어떤가. 현금으로 환산하면 김대중 정부 5년 동안 서독이 19년간 동독에 지원한 '액수의 절반가량을 북한에 줬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그 두 배가까이를 북한에 퍼줬다. 그 돈은 다 어디로 갔나. 북한의 핵·미사일 무기고만 불려준 것 아닌가. 무엇보다 서독은 동독과 관계 개선을 추구하면서 동독 지도부보다는 미국과 당시 소련 같은 강대국 외교에 훨씬 공들였다는 얘기를 독일 정부 관계자로부터 직접 들은 적이 있다. 우리 정부도 남측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북한 당국과 김정은에게만 굴욕적인 애정 공세를 퍼부을 것이 아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 지형부터 남북 화해에 유리하도록 조성해 가야 한다. 그러려면 미국 중국 일본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하고, 그중에서도 대북 영향력이 압도적인 미국에 대해 강한 지렛대를 가져야 한다. 그런데 이 정부는 북쪽만 바라보다 한미 한일 한중 관계를 말아먹고 있다. 이젠 가만히 있던 러시아마저 대담하게도 우리 영공을 침범하며 한반도 밥상에 숟가락을 들이밀고 있다. 북한도 무턱대고 자신들에게만 들이대는 남측이 우습게 보이지 않겠나. 북한에 올인하다 되레 남북관계가 망가지는 형국이다. 현 정권은 집권 2년이 넘도록 똑같은 방식으로 북한의 문을 두드렸다. 그래도 북한이 계속 불청객 취급을 한다면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처음부터 대북·외교 정책의 설계가 잘못된 건지, 정책을 수행하는 당국자들이 무능한 건지, 정책이 어그러졌음에도 잘못을 인정 않으려는 확증편향에 빠진 건지, 아니면 이들 모두에 해당하는지…. 하기야 이 정부가 쏘는 정책의 화살이 터무니없이 빗나가 엉뚱한 파장을 일으키는 경우가 어디 외교안보뿐인가. 이제 그만하면 충분하다. 멈추고 돌아볼 때도 됐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 2019-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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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제균 칼럼]韓美동맹 흔드는 日 경제보복

    최근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친구로부터 들은 얘기다. “얼마 전 거래처 중 하나인 일본 기업으로부터 주문이 갑자기 끊겼다. 별다른 이유를 대지 않았지만, 뭔가 느낌으로 와닿는 게 있었다. 일본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그게 아베 정권 차원의 경제 보복보다 훨씬 두렵다.” 그렇다. 한국말로 사회 분위기를 뜻하는 일본의 ‘공기(空氣)’가 달라졌다. 일본의 보복이 일회성이 아니며 경제 말고도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로 확대될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호들갑 떨 일은 아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 특히 언제든 친구에서 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이웃 국가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일본은 과거 잘못이 많기 때문에 좀 함부로 해도 된다고 보고, 노골적으로 반일(反日)을 통치의 한 도구로 삼아온 문재인 정권이 외교적 각성을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물론 이 정권 탓만도 아니다. 외교를 모르거나, 외교를 내치 수단으로 말아먹은 전임, 전전임 대통령 책임도 크다. 한일관계가 틀어지는 결정적 원인 제공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다. 2012년 8월 임기 말 레임덕과 내곡동 사저 문제로 궁지에 몰린 MB는 어처구니없게도 독도 방문과 ‘일왕(천황) 사죄’ 카드를 빼들었다. 특히 ‘일왕도 진심으로 사과할 게 아니라면 한국을 방문할 필요가 없다’는 발언은 일본 사회 저류(底流)의 금기를 헤집은, 최악의 외교 패착이었다. 후임 박근혜 대통령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널뛰기 외교를 했다. 임기 전반 친중(親中) 외교로 미국 조야(朝野)에 한미동맹 회의론을 일으키더니, 급기야 2015년 9월 중국 국가주석, 러시아 대통령과 나란히 톈안먼(天安門) 성루에 섰다. 미국의 대(對)아시아 동맹 중심축이 한미동맹에서 미일동맹으로 이동하도록 만든 건 박근혜 외교의 가장 큰 실패다. 그러더니 3개월 뒤에는 일본과 관계 복원을 한다며 졸속으로 위안부 합의를 체결했다. 그래도 국가 간 합의는 존중돼야 했다. 문제가 있다면 물밑에서 외교적 해결을 모색했어야 옳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이 합의를 사실상 깔아뭉갰다. 국가 간 합의마저 무시하는 한국은 ‘경기 중에 골대를 옮기는 나라’라는 인식이 일본 사회에 기름을 뿌렸고, 결국 강제징용 판결이 불을 지른 것이다. 일본 ‘공기’가 이처럼 변한 데는 한국에 과거와 같은 경제적 우월감을 느끼지 못하는 탓도 크다. 삶이 팍팍해진 일본인들 사이에서 ‘도대체 언제까지 사과하란 말이냐’는 불만이 턱까지 차오른 듯하다. 문제는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베 정권은 내부적으로 명분을 응축하면서 결정적 시기를 골라 터뜨렸다. 당분간 회군(回軍)할 생각이 없다. 관건은 미국이다. 미국은 작심하면 일본 조치를 되돌릴 힘이 있다. 그게 미일(美日)관계다. 한데, 미국도 현재로선 그럴 뜻이 없어 보인다. 일각에선 세계 1위 한국 반도체산업이 타격을 입으면 미국 반도체산업이 반사이익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란 분석도 나온다. 그렇지만 미국이 장삿속으로만 움직이는 나라는 아니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차장을 비롯한 정부 당국자들이 부랴부랴 워싱턴을 찾아가 SOS를 쳐도 ‘한일 양국이 해결할 문제’라며 미적거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한미, 미일동맹에 기반한 한미일 삼각 안보협력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대(對)중국 견제 전략의 핵심이었다. 그동안 미국이 한미일 협력을 저해하는 한일 갈등에 알레르기를 보이고, 물밑 중재 역할을 해온 이유다. 그랬던 미국이 이번에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한미일 삼각 협력을 이루는 두 축인 한미, 미일동맹에서 확실하게 후자를 선택했다는 신호는 아닐까. 아니면 필요할 때만 한미동맹을 내세우는 한국 정부에 대한 경고일 수도 있다. 미국의 진의야 시간이 지나면 밝혀질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일방적으로 시혜를 베풀고, 받는 동맹이란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랜 세월 미국이 제공하는 든든한 안보라는 동맹의 권리는 누리면서 동맹의 의무는 망각했던 것은 아닌가. 미중(美中) 사이의 줄타기 외교는 사실상 동맹에 대한 배신행위다. 일본의 경제 보복이 한미동맹 무력화의 서곡(序曲)이 되지 않으려면 동맹의 의무란 무엇인가, 곱씹어봐야 할 때다. 호르무즈 해협 파병이 됐든, 뭐가 됐든 피로 맺은 한미동맹의 가치를 다시 한 번 미국에 확신시켜야 할 때가 왔다.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 2019-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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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제균 칼럼]“잘 들었습니다, 내 맘대로 할게요”

    얘기를 듣는 사람의 표정은 진지하다. 1시간 넘게 말해도 싫은 내색조차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추임새를 넣어준다. 응시하는 눈은 ‘당신 말을 다 이해한다’는 진정성이 넘치는 듯하다. 그런데 얘기를 다 들어준 사람이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하면 어떨까.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내 맘대로 할게요.” ‘숨이 턱 막힌다’는 이런 때 쓰는 표현일 것이다. 문재인 집권 2년의 고개를 넘으며 전임 박근혜와는 또 다른 불통(不通)이 국정(國政)의 동맥경화를 부르고 있다. ‘박근혜식(式) 불통’이 소통 채널 자체를 봉쇄한 것이었다면 ‘문재인식 불통’은 소통 채널은 열어뒀지만, 소통 효과가 안 나온다는 것. 쉽게 말해 백날 얘기를 들어도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윤석열 검찰총장 지명에 김상조 대통령정책실장 임명, 이어 조국 법무장관 카드까지 나오자 많은 국민은 ‘이제 체념해야 할 때’라고 느꼈을 것이다. 더 위험한 건 문 대통령의 특유의 장점이던 경청(傾聽)마저 실종될 조짐이 보인다는 점. 기자들에게 외교 문제만 질문 받겠다고 빗장을 치거나, 사회 원로들을 불러놓고 ‘적폐청산에는 타협 없다’고 입을 막아버리는 식 말이다. 심지어 ‘혼밥’ 논란까지 나온다. 권위적으로 변한 역대 대통령을 실패로 몰고 간 그 길이다. 늘 문 대통령과 비교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견(異見) 있는 사람에게 자기 생각을 관철시키려 치열하게 토론했다. 자기 생각이 너무 강한 게 문제였지만, 남 얘기를 듣고 생각을 바꿀 줄도 알았다. 그런데 문 대통령에게는 그런 피드백이 좀처럼 나타나질 않는다. ‘문재인의 그림자’ 프레임도 그를 잘못 봤기에 나온 듯하다. 정치를 원치 않는 문재인을 친노(親盧)가 ‘대표상품’으로 내세워 대통령까지 만들었기에 과연 뒤에서 대통령을 움직이는 사람은 누굴까, 하는 뒷말이 많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문 대통령을 움직이는 사람은 남이 무슨 말을 하든 꿈쩍하지 않는 문재인 자신이다. 박근혜식이든, 문재인식이든 최고권력자의 불통이 낳는 결정적 폐해는 내 편과 네 편 사이에 넘기 힘든 장벽을 쌓고, 건널 수 없는 계곡을 파는 것이다. 이는 현 정부의 적폐청산이 그렇듯, 정권이 교체되면 또 다른 ‘복수혈전’을 예고한다. 한데, 복수라는 게 그렇다. 2대 맞으면 3대는 때려야 직성이 풀리는 게 보통 인간의 심사(心思)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복수의 강도가 증폭되는 이유다. 단적으로, 문재인 정부 들어 지상파 방송에서 벌어진 복수전이 그랬다. 이러니 정권을 뺏기면 닥쳐올 복수에 대한 공포도 커질 수밖에 없다. 결국 정권을 놓지 않기 위해 무리수를 두고, 그 무리수가 또 다른 복수심을 낳는다. 대한민국이 점점 황폐해져 갈 수밖에 없다. 권력자의 불통이 부르는 독단(獨斷)이 나라 안에만 영향을 미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외교에까지 끼치면 국민의 안전을 위협한다. 어제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이벤트가 있었지만, 그만큼 한국은 안전해졌을까. 말끝마다 자신이 대통령이 되기 전과 후를 비교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그의 관심은 온통 재선이다. 그런 트럼프를 구슬려 핵보유국 지위와 안전보장을 얻어내려는 김정은. 나이답지 않게 노회하다. 이 둘의 흥정 대상인 핵문제가 가장 안보와 직결된 나라는 미국도 중국도 일본도 아닌 한국이다. 한국 대통령이라면 트럼프-김정은 협상 과정에서 우리의 안보가 길을 잃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 최우선 책무다. 그런데도 군통수권자인 대통령부터 ‘평화를 지키는 건 대화’라는 위험한 믿음을 고수하고 있다. 이러니 무더기 대북 지원을 하면서도 ‘제발 좀 받아가라’고 도리어 애걸하는 전도(顚倒) 현상이 벌어지는 게 당연하다. 국민적 자존심까지 상처 주는 ‘굴북(屈北)외교’가 아닐 수 없다. 이 모든 게 한번 길을 정하면 벗어나지 못하는 ‘문재인식 불통’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생전의 노 전 대통령은 문 대통령에 대해 “정치가 전혀 안 맞는 사람”이란 인물평을 했다고 한다. 과거에는 ‘정치가 안 맞는 순수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새겼다. 그런데 요즘 와서는 다른 생각이 든다. ‘타협의 예술’인 정치와는 거리가 먼 문재인 스타일을 너무 잘 알았기에 그랬던 건 아니었을까.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 2019-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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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제균 칼럼]흔들면 흔들리는 나라

    한 놈만 팬다. 영화 ‘주유소습격사건’으로 유명해진 말이지만, 그 ‘한 놈’은 누가 될까. 굳이 병법을 들먹이지 않아도 적진(敵陣)의 가장 약한 고리를 깨부숴 전열(戰列)을 무너뜨리는 건 전술의 기본이다. 조짐을 드러낸 미중(美中)의 패권전쟁. 그 거대한 전쟁에서 자칫 한국이 ‘약한 고리’로 전락해 두 강대국으로부터 집중타를 맞지 않을까, 심히 걱정되는 요즘이다. 일본을 보자. 아베 신조 총리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대하는 방식은 ‘아부 외교’를 넘어 ‘아양 외교’ 수준이다. 그럼에도 중국과의 관계는 역대 최상급이다. 한국은 어떤가. 화웨이 사태에서 보듯, 미국과 중국이 번갈아 가며 ‘저쪽 편에 서지 말라’고 경고장을 날리는 형편이다. 지금은 구두 경고 수준이나, 두 강대국의 겁박이 현실화되는 순간 나라 자체가 갈지자로 휘청거릴 것은 안 봐도 훤하다. 중국은 일본에 대해선 헛된 기대가 없다. 당연히 미국 편으로 여긴다. 적진에 속해 있지만, 양자(兩者) 관계에서 성의를 보이고 국력도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한국은 어떻게 볼까. 흔들면 흔들리는 나라로 보일 수밖에 없다. 2000년 마늘 분쟁 때 그랬고, 가까이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 때도 그랬다. 국력이 일본만 못해서? 그보다는 위정자들의 원칙 없는 대응이 대한민국을 ‘약한 고리’로 만들어버렸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란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미중 패권전쟁은 앞으로 우리가 국가의 명운(命運)을 걸고 헤쳐 나가야 할 외교적 도전이다. 그 미증유(未曾有)의 전쟁에서 어느 편에 설지는 자명(自明)하다. 하지만 그 자명한 이유들을 잊은 사람이 너무 많다. 그래서 요약해보면…. 첫째, 미국은 한국의 동맹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3조를 보자. “각 당사국은… 타 당사국에 대한 태평양 지역에서의 무력공격을 자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공통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각자의 헌법상 절차에 따라 행동할 것을 선언한다.” 이렇게 한국과 미국은 같은 편이라고 명기돼 있다. 미국과 한편이 됐기에 한국이 민주 국가로 살아남았고, 오늘날 이 정도의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둘째, 반대로 중국은 북한의 동맹이다. 아무리 동족이지만 북한은 현재로선 우리의 안보를 가장 위협하는 주적(主敵)이다. 북-중 동맹조약 2조는 “체약 일방이… 전쟁 상태에 처하면 체약 상대국은 모든 힘을 다하여 지체 없이 군사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고 돼 있다. 쉽게 말해 중국은 우리의 적과 같은 편으로, 적진에 속해 있다는 뜻이다. 중국에 북한은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순망치한(脣亡齒寒) 관계다. 자신들의 생존과 직결된 나라로 본다. 한국은 자국 국익에 따라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이익 관계국이다. 이러니 한국이 죽었다 깨나도 중국은 북한 편일 수밖에 없다. 셋째, 중국은 패권국가의 조건인 소프트 파워 측면에서 자격 미달이다. 그러기에 주변국은 중국 세력권에 편입되는 순간부터 굴종의 길을 각오해야 한다. 우리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중국이 한국을 이만큼이나마 대접하는 것도 미국과 동맹이란 점 때문이란 걸 간과해선 안 된다. 넷째, 가장 즉각적이고 현실적인 이유. 미국 편에서 떨려 나는 순간 한국엔 걷잡을 수 없는 안보적 경제적 재앙이 닥칠 것이다. 주한미군 철수를 상정해 보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미국 편에 서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그런데도 외교를 모르는 우리의 위정자들은 때로 낭만적 환상에 사로잡혀, 때로 80년대 운동권적 반미관(反美觀)에서 헤어나지 못해 미국과 중국이 마치 두 개의 선택지라도 되는 듯 착각해 왔다. 그러면서 중간자(中間者)라도 된 듯, 미중 사이를 넘나들다 동맹인 미국의 신뢰마저 잃어 이제는 미국도 중국도 모두 잃을지 모를 암울한 처지로 빠져든 것이다. 물론 미중이 화웨이 사태로 민감해진 터에 미국 편임을 떠들어 일부러 중국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제부터라도 한미동맹은 중국이 도저히 흔들 수 없는 국가적 원칙임을 확실하게 인식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서 중국의 거친 보복도 있을 수 있다. 그래도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감내해야만 한다. 우리가 달라지지 않는 한, 중국은 앞으로도 계속 흔들어댈 것이다. 남이 흔든다고 흔들리는 나라는 결국 치욕의 길을 걷게 돼 있다.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 2019-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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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제균 칼럼] 쇼윈도 외교장관 강경화

    위 제목을 달기까지 고민을 많이 했다. 먼저 대통령 같은 권력자도 아니고 장관 한 사람을 콕 집어 제목으로 비판하는 것이 지나치지 않은가, 하는 인간적 고민이 앞섰다. 다음으로는 최근 문무일 검찰총장이 양복 상의를 흔드는 퍼포먼스에서 강조했듯, 흔들리는 장관보다 흔드는 청와대를 비판해야 온당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이 제목 그대로 가기로 했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외교를 다루는 주무 장관은 일개 장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진국에서 외교장관(Foreign minister)에 국가수반에 버금가는 위상을 부여하고 그에 합당한 외교적 예우를 해주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 정도 크기에, 세계 4강에 둘러싸인 나라에서 외교장관의 역할과 중요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공로명 전 외무부 장관은 올 초 한 인터뷰에서 “이(문재인) 정부의 모든 거버넌스(governance·통치 방식)는 청와대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스마트한 사람인데 지금은 인형같이 존재감이 없다”고 했다. 청와대의 ‘외교부 패싱’ 문제를 지적한 외교 원로의 고언(苦言)이지만, 이 말에 누구보다 아파해야 할 사람은 강 장관 자신이다. 이제 곧 장관 취임 2주년이다. 취임 초에는 업무가 손에 익지 않아서 그렇다 치더라도 2년이 다 되도록 ‘외교부 패싱’ ‘강경화 패싱’ 얘기가 나오는 건 정상이 아니다. 과거에는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외교부의 상왕(上王)이라는 소리가 나오더니, 이제는 김현종 안보실 차장이 좌지우지한다는 말까지 들린다. 물론 장관이 대통령의 직속기관인 청와대의 뜻을 거스르기가 쉽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더구나 ‘청와대 정부’로 불리는 이 정부에서 말이다. 그래도 과거에 어떤 장관들은, 특히 외교장관 가운데 몇몇은 청와대와 맞섰고, 필요하면 대통령에게도 직언을 했다. 최근에 간행된 공로명 전 장관의 구술 기록 ‘한국 외교와 외교관’에서 공 전 장관은 “장관으로 있는 동안에 대통령과 수시로 전화 연락을 하고, 대통령 주변에서도 제가 하는 전화는 항상 장벽 없이 대해줬다”고 술회했다. 강 장관은 문 대통령과 ‘장벽 없이’ 수시로 전화 통화하는가. 오죽하면 강 장관이 롱런하는 건 조명균 전 통일부 장관과 달리 청와대에서 만만하기 때문이란 관측까지 나올까. 강 장관이 임명됐을 때 많은 사람이 기대를 걸었다. 나도 그중 하나다. 특유의 선민의식에 빠져 외국과의 교섭보다 ‘부내(部內) 정치’에 치중했던 외교부. 그래서 한국의 외교 경쟁력을 떨어뜨린 외교부의 체질을 확 바꿔주길 바랐다. 그런데 2년이 지난 지금 어떤가. 장관부터 청와대에 휘둘리니까 외교관들이 선민의식은커녕 청와대 눈치나 보며 복지부동하고 정치권에 어디 줄 댈 데 없나 두리번거리는 지경이다. 그렇게 나온 한국 외교의 성적은 그 어느 때보다 참담하다. 지금처럼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 4강 중 어느 한 나라와도 가깝지 않은 적이 우리 역사에 또 있었을까. 무엇보다 한국 안보의 주축인 한미동맹이 흔들린다. 미일(美日), 중일(中日) 관계는 이보다 좋을 순 없는 요즘이라 더욱 대비된다. 한국 외교의 참혹한 성적표는 ‘청와대 외교’의 실패다. 외교를 남북관계의 종속변수처럼 다룬 데 따른 자업자득이다. 특히 외교는 정권에 따라 널을 뛰어선 안 된다. 최악으로 치달은 한일 관계가 이를 반증(反證)한다. 청와대가, 통치권자가 그러려고 하면 이를 막아서야 하는 쪽이 외교부요, 외교장관이다. 일본에선 우리의 대법원 격인 최고재판소 판사 가운데 1명은 반드시 외교관 출신으로 충원한다. 외교가 내치(內治)에 따라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한 방편이다. 강 장관은 틀이 좋다. 특유의 흰머리 카리스마에 여성 팬도 많다. 일각에선 내년 총선 카드로도 거론될 정도다. 정치에 뛰어드는 건 무방하지만 외교장관으로선 지족원운지(知足願云止·만족함을 알고 멈추기를 바람)했으면 한다. 계속 자리에 연연하다간 한국 최초 여성 외교장관의 영예가 여성 외교수장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바뀔까 두렵다.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 2019-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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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제균 칼럼]한 지붕 두 나라

    안타깝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2주년의 고개를 넘으면서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문 대통령은 바뀔 생각이 시쳇말로 ‘1도 없다’는 것. 아니, 처음부터 없었는데 우리가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통령이 ‘통합’이나 ‘성장’, ‘안보’나 ‘기업’을 말할 때 그걸 어떤 변화의 전조(前兆)로 읽곤 했다. 정확히 말하면 읽고 싶어 했다. 문 대통령도 실제 국정 운영을 해보니까 달라지는구나, 하는 설익은 추측을 하면서. 하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2주년을 맞아 대통령이 쏟아낸 언어들은 그런 일말의 기대를 여지없이 쓸어버렸다. 한마디로 누가 뭐래도 내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내 길을 갈 테니, 따라오려면 따라오고, 아니면 말라’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불안감이 피어오른다. 따라가지 않으면 불이익 받지는 않을까…. 대통령이 이즈음 여러 자리에서 많은 얘기를 했지만, 압축하면 이렇다. ‘한국 사회는 특권과 반칙이 지배해왔다→지금의 어려움은 그런 불평등 사회를 벗어나기 위한 진통이다→이 시기를 견뎌내면 곧 성과가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야말로 특권의 총체적 집합체다. 그런 대통령이 집권 2년이 지나도록 피해자연(然)하며 ‘특권과 반칙’ 운운하는 게 피로감을 준다. 이쯤 됐으면 뭔가 성과를 보이고 입증해야 할 때가 아닌가. 특권을 한 몸에 누리는 대통령이 ‘특권’ 운운하는 것 자체가 분열의 언어다. 대통령부터 편 가르기에 앞장서니 대한민국이 점점 두 동강 나고 있다. 같은 땅 위에 살지만, 바라보는 하늘이 정반대인 국민이 점점 늘어난다. 흡사 ‘한 지붕, 두 나라’다. 이 두 나라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뉴스를 접하는 방식부터 다르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뉴스를 생산하고 소비한다. 그러니 똑같은 사물이나 사건, 심지어 사고를 해석하는 방식부터 판이하다. 같은 나라에서 살지만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쪽 세상에선 “우리 이니, 하고 싶은 대로 해”라며 ‘文비어천가’가 쏟아진다. 그쪽 세상에선 문 대통령을 비판하는 다른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도 힘든 대통령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딴죽만 거는 족속들이다. 그럴수록 ‘우리 이니’가 측은하고 애틋한 마음까지 든다. 하물며 ‘독재자’라고 부르는 자들이 있다니…. 단연코 문 대통령의 통치를 ‘독재’라고 부를 순 없다. 진짜 독재는 ‘독재’란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는 상황이다. 우리는 과거 그런 시절을 생생히 겪었다. 그런데 누가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불렀다고, 아니 누가 그렇게 불렀다고 전했다는 이유로, 떼로 몰려들어 정신적 린치를 가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독재 심리에 빠져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란 단어는 원래 근대 일본에서 영어의 프레지던트(president)를 번역한 말이다. 고대 로마나 프랑스 제1공화국의 집정관(consul)을 통령(統領)으로 번역하다가 프레지던트에는 대(大) 자를 붙였다. 우리에게는 상하이 임시정부 수반을 ‘대통령’으로 명하면서 굳어졌다. 그런데 영어의 프레지던트는 회의나 의식을 주재한다는 뜻인 ‘preside’에서 나왔다. 프레지던트는 회의에서 나온 이견(異見)을 조정하고 통합하는 리더다. 대통령이란 단어의 원뜻에 통합의 지도자란 함의(含意)가 있는 셈. 그런 사람이 한쪽 편만 들고 회의를 편파적으로 주재한다면 그 회의가 어떻게 되겠는가.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가 내 편 네 편으로 갈려서 이전투구를 벌인다는 사실, 그것도 우리의 미래를 여는 데 10원도 보탬 안 될 과거 문제로 피 터지게 싸우는 것만으로도 대통령으로선 중대한 실정(失政)이다. 문 대통령이 중재자, 조정자로 나설 곳은 미국과 북한 사이가 아니다. 이 나라 안에 펼쳐진 두 개의 세상 사이다. 그런데 도리어 ‘독재자의 후예’ 운운하며 한쪽 진영의 깃발을 든다면 나라가 어디로 가겠는가. 대통령까지 여야의 극한투쟁에 가세하는 것이 내년 총선을 겨냥한 지지층 결집 전략이란 관측이 있다. 믿고 싶지 않고 가능하지도 않은 얄팍한 계산이라고 본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역사의 주요 고비마다 치러진 선거 결과가 이를 웅변한다. 선거는 국정(國政)의 결과지, 수단이 아니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 2019-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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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제균 칼럼]희망이 희망고문 된 2년

    20대인 아들딸과 영화 ‘어벤져스: 엔드 게임’을 봤다. 내 나이에 걸맞지 않게 마블 영화 팬이다. 그런 내게도 이 영화를 대하는 아이들의 태도는 유별나 보였다. 속칭 ‘스포’를 당하지 않기 위해 영화를 보기 전에는 평소 끼고 살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끊다시피 했다. 영화를 보고 나오다 궁금한 점이 있어 물어보려 했더니 ‘쉿!’ 하며 주의하라는 소리만 들었다. 영화관 입장객들에게 자칫 스포가 될 수 있다나. 뭐, 이렇게까지 하나 싶었지만 그 또래들에게 이 영화를 보는 건 일종의 의식인 듯했다. 2008년 ‘아이언맨’을 시작으로 어벤져스 시리즈와 함께했던 소년기의 순수와 성장통의 그 어떤 매듭을 짓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우주 최강의 ‘빌런’(악당) 타노스는 전편에서 우주 생명체의 절반을 절멸(絶滅)시킨다. 정말 스포가 될까 조심스럽지만 그 나름의 선의(善意)에서다. 그런데 그 선의가 먹혀들지 않자 이번에는 더 나쁜 선택을 하려 한다…. 영화의 흔한 소재가 될 정도로 선한 의도에서 시작된 일이 나쁜 결과를 낳는 일은 다반사다. 현실을 모르고 일을 벌였거나, 지지고 볶는 세상의 복잡다기한 변수와 충돌하며 일머리가 바뀌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가 문재인 정부의 최저임금과 주 52시간을 비롯한 소득주도성장 정책일 것이다. 그랬을 때, 다시 말해 선의가 나쁜 결과를 초래할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민간이든 공공이든 조직이나 개인의 역량이다. 건강한 조직이라면 잘못을 인정하고 방향 전환을 한다. 그런데 일의 결과보다는 의도에 매몰돼 ‘선의는 결국 선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확증편향에 빠지면 어그러지는 줄 알면서도 밀고 나간다. “구덩이에 빠지면 아래를 더 깊이 파지 말라”는 미국 속담이 있다. 일이 잘못됐을 때 엉뚱하게 대처하지 말라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가 옳다’는 집단 사고에 빠지면 이런 경구(警句)는 들리지 않는다. 오죽하면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는 말이 있을까. 지옥이란 무엇인가.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헬조선’이란 단어의 프리즘에 비춰 보면 희망이 없는 곳이다. 마블은커녕 마징가제트에도 감지덕지했던 우리네 소년기에도 지옥이란 말은 나오지 않았다. 오늘보다 내일, 부모세대보다 자식세대에 더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군 이래 가장 풍요롭게 자라난 우리의 아이들은 역사상 최초로 부모세대보다 더 못살 것이란 불안에 휩싸여 지옥을 말한다. 이들에게 현재보다 미래에, 부모보다 자신들이 더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을 다시 불러오는 것이 어른들의 할 일이요, 우리 정치가 해내야 할 몫이다. 2년 전 우리에겐 그런 희망이 있었다. 국정을 왕조시대처럼 운영했던 권력자를 국민의 힘으로 교체한 뒤 새로운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란 희망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는 그런 희망과 선의의 장전(章典)처럼 여겨졌다. 문 대통령은 “지금 제 가슴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뜨겁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났다. 그런데 정말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가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다. 지금까지 이런 한국 외교는 없었다. 우리와 사활적 이해관계를 가진 미국 중국 일본 3국과 한꺼번에 이토록 멀어진 적은 없다. 그렇다고 북한과 가까워진 것도 아니다. 하대(下待)를 당연시 여기는 처지가 됐다. 경제적으로도 주변국들은 성장의 과실을 따먹는데, 우리는 성장률 전망치 하향 기록을 갈아 치우기 바쁘다. 사회적으로는 ‘한 나라, 두 국민’이 될 정도로 반목과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지만 사상 유례없이 정치권력이 사법권력까지 좌지우지하며 그들만의 견고한 성벽을 쌓고 있다. 전에는 통합하는 시늉이라도 냈지만 이제는 대놓고 ‘적폐’를 말한다. 대체 그 적폐청산이라는 건 언제까지 끌고 가야 직성이 풀릴 텐가. 적지 않은 국민이 2년밖에 안 된 이 정부에 지쳐가고 있다. 그래도 국정을 운영해 보면 달라지겠지, 하며 걸었던 희망은 외려 더욱 선명하게 운동권식 국정 운영을 하겠다는 어깃장을 접할 때마다 희망고문이 된다. 2일 청와대 간담회에서 한 원로는 ‘대통령은 한 계파의 대통령이 아니라 모두의 대통령’이라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은 정녕 ‘한 계파의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싶은 건가.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 2019-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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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제균 칼럼]비주류 편향 인사로 ‘3류 천국’ 만들 건가

    바늘방석이 따로 없을 것이다. 이미선 헌법재판관 말이다. 이 재판관은 한 달여 전인 지난달 20일, 문재인 대통령이 재판관 후보로 지명했을 때 꿈에라도 생각했을까. 자신이 여야 극한 대치로 인한 정국 경색의 핵(核)이 될 줄은. 그래서 묻고 싶다. 이 재판관은 스스로 헌법재판관이나 대법관이 될 거라고 생각해 봤는지를. 이 재판관은 그런 꿈을 꿀 만한 스토리가 있다. 40대 여성에 지방대, 문재인 정권에서 선호하는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이다. 그럼에도 판사로서는 누가 봐도 입이 딱 벌어질 만큼 주식을 과다 보유·거래했다. 남편이 다 했다지만 말이 안 된다. 부인의 부동산 투기 때문에 애초에 청문회 자리에 앉기를 포기하는 고위공직자도 많다. 그런 하자를 안고도 헌법재판관이 될 생각을 했다면 판단력, 요즘 많이 쓰는 말로 공감능력이 부족한 것이다. 국민이 고위공직자에게 요구하는 도덕성의 허들은 그 직(職)에 따라 높이가 다르다. 지방의원보다 국회의원이 높고, 국회의원보다 장관이 높다. 아마 헌법재판관과 대법관이 가장 높은 축일 것이다. 이 재판관이 그 자리를 염두에 두었다면 자기관리를 했어야 했다. 법조계에서도 그가 헌법재판관까지 꿈꾸지는 않았을 거란 분석이 많다. 소위 에이스 판사가 아니었다는 것. 그간 잘나가고, 못 나가고를 떠나 실력이 못 미친다는 뜻이다. 이 재판관의 실력은 청문회 답변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이 재판관뿐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치러진 숱한 청문회를 보면서 본인이 과연 그 자리에 오를 거라고 생각이나 해봤을까 하는 인사들이 적지 않다. 큰 꿈을 꾸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관리를 한다. 과다 보유한 부동산을 처분해 은행 예금으로 바꾸는 사람들도 봤다. 그런데 이 정부 들어 자기관리는커녕 고위 공직이 마치 ‘길 가다 얻어 걸린’ 것처럼 청문회 자리에 떡하니 앉아 있는 사람들을 유난히 많이 본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결국 대통령의 인사 강행으로 자리를 꿰찬다는 사실이다. 이는 ‘주류세력 교체’를 지상목표로 밀어붙이는 이 정권이 인재의 풀을 비주류 편향으로 좁게 쓰는 탓이 크다. 물론 이 사회의 주류라는 사람들이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 끼리끼리 해먹어온 측면도 없지 않다. 그렇게 주류 세상에서 소외됐던 비주류 가운데 실력 있는 인물을 중용한다면 토를 달 사람은 별로 없다. 이미선 파동으로 함께 인사청문보고서 채택이 거부된 문형배 헌법재판관은 성향의 좌우를 떠나 실력에 대해선 이론(異論)이 거의 없다. 하지만 비주류 중에는 실력이 모자라 주류에 끼고 싶어도 못 낀 사람들이 훨씬 많다. 누가 실력이 있고 없는지 동종업계 사람들이 가장 잘 안다. 나도 언론계에서는 보수 진보 성향을 떠나 누가 실력이 있는지 안다고 말할 수 있다. 동업자들로부터 3류가 득세한 대표적인 분야로 지목되는 곳이 외교다. 한국이 동맹인 미국으로부터 멀어지고, 공 들인 중국에는 무시당하며, 일본과는 원수 되기 일보 직전이고, 심지어 짝사랑하는 북한으로부터도 뺨을 맞는 지경에 이른 것은 3류 외교당국자의 실력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는 외교 의전 실수들은 거기서 흩뿌려진 부스러기일 뿐이다. 이제 성향을 떠나 실력에는 의구심이 없던 조명균 전 장관마저 떠났으니 통일부도 휘청거릴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김연철 현 장관에게 걱정스러운 것은 성향보다는 실력이다. 외교안보와 남북관계에선 인사권자에게 시쳇말로 무조건 ‘시시까까(시키면 시키는 대로, 까라면 까고)’해선 안 된다. 외교안보뿐일까. 경제와 교육 복지 분야는 물론이고 검경 등 사정기관에서 실력 없는 3류들이 중용된다. 도무지 깜이 안 되는 인물들이 ‘닥치고 코드’ ‘닥치고 비주류’ 인사로 나라의 정책과 예산을 주무르고 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잘나갔던 주류만 쓰라는 뜻은 물론 아니다. 비주류도 중용하되 실력과 도덕성도 함께 갖춘 인사를 발굴해야 한다. 그런 ‘흙 속의 진주’를 캐내는 것이 인사의 예술이다. 그래도 사람 구하기가 정 어렵다면 인재의 풀을 더 넓게 써야 한다. 비주류 중에 코드도 맞는 인물을 찾다 보니 ‘사람이 없다’는 소리가 나오고, 드물게 그런 사람을 찾으면 실력이나 도덕성 검증은 뒷전이기 십상이다. 자고로 정권을 망치는 자들은 외부의 비판세력이 아니라 내부에서 코드에 맞춰 충성하는 3류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 2019-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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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제균 칼럼]바꿀 수 있어야 대통령이다

    누구나 내 판단이, 내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틀리게 살아오지 않았다는, 자기보호 심리가 작동한 결과다. 인간의 뇌가 결정을 후회하는 데 따른 다양한 경우의 수, 즉 ‘그때 이런 결정을 내렸더라면’ ‘아니, 제3의 결정은 어땠을까’ ‘다음에는 이런 결정을…’ 등등 복잡한 걸 싫어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문재인 정부의 실정(失政)이 쏟아져도 문 대통령에게 투표한 사람은 ‘그래도 문재인 말고 찍을 사람이 누가 있었어’라고, 문 대통령에게 투표하지 않은 사람은 ‘거 봐, 내 그럴 줄 알았지’라며 자기 결정을 합리화하기 쉽다. 일반인도 이럴진대 권력자는 어떨까. 특히 자신의 결정으로 성공을 거둔 권력자가 판단을 후회하고 번복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정책이나 인사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부당한 공격’으로 치부하는 자기 합리화의 늪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래도 문민정부 이후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은 비판 여론에 비교적 민감하게 반응했다. 특히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인사에 관한 한 비판을 즉각 수용하는 편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기주장이 유난히 강했지만, 지지세력 내부의 반발에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이라크 파병, 평택 주한미군 기지와 제주 해군 기지 건설을 밀고 나갈 정도로 유연함을 보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불통이었던 연유는 정권 말에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문 대통령은 그런 불통 이미지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한 번 결정한 정책이나 인사에 집착한다. 한미 동맹의 균열을 불러오고 북한의 핵 보유를 고착화시켜 우리 안보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대북정책에 대해선 더 말하면 입이 아프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경제학 이론에서 ‘듣보잡’이란 비판이 나오자 ‘세계적 족보가 있다’고 반박하는 대목에선 그 집요함에 감탄할 정도다. 인사청문보고서 채택 없이 강행한 장관급 인사는 집권 2년도 안 돼 박근혜 정부 4년 2개월의 10명에 맞먹을 태세다. 막장에 다다라 폭발 직전인 한일 관계도 어디로 끌고 가려는지 모르겠다. 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펴낸 대담집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서 “우리 쪽, 우리 내부의 비판을 받는 건 뼈아프다”면서도 “저하고 생각이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일방적인 공격에 대해서는 정말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우리 편은 ‘비판’, 다른 편은 ‘공격’이었다. 같은 책에서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의 가장 큰 잘못 중 하나가 국민 편 가르기였다”고 해놓고 국민을 ‘우리 편’과 ‘다른 편’으로 갈라 다른 편 주장에는 귀를 닫겠다고 한 것이다. 그래도 당선 이후 ‘대통합 대통령이 되겠다’고 한 그가 이렇게 외길로 달려갈 줄은 몰랐다. 문 대통령은 조국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을 교체하라는 요구에도 ‘정말 눈 하나 깜짝’ 안 한다. 터지고 또 터지는 숱한 인사 참사에 여권 인사나 친여 매체에서도 경질론이 나오는 데도 그렇다. 이렇듯 과도하게 조 수석을 감싸는 것이 과연 그를 보호하는 걸까. 이명박(MB) 정부 2년 차인 2009년 2월 국가정보원장에 임명된 원세훈. ‘국정원의 정보 기능을 무너뜨렸다’는 등의 이유로 취임 3년 차인 2011년부터 경질론이 비등했다. 그런데도 귀를 닫은 MB는 자신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그를 원장 자리에 놔뒀다. 박근혜 정부의 우병우 민정수석에 대해서도 교체 요구가 쏟아졌지만 박 전 대통령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두 대통령의 과도한 비호를 받은 실세들은 지금 어떤가. 물론 이명박의 원세훈, 박근혜의 우병우와 문재인의 조국을 수평 비교하는 것이 현 시점에서 무리일 수 있다는 점을 잘 안다. 다만 조 수석도 민심을 거스르면서까지 자리를 보전하는 것이 대통령에게 부담을 지울 뿐 아니라 결국 자신에게까지 화가 미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대통령이 ‘우리 편’에 철갑 우산을 쳐줄수록 그 아래 숨은 인사들은 기고만장하게 마련이다. 진보좌파 특유의 ‘깨끗한 척’까지 겹쳐 국민이 느끼는 ‘내로남불’의 괴리는 한강보다 넓어지고 있다. 문 대통령은 5년 동안 대한민국 정부의 경영을 위임받은 최고경영자(CEO)다. 주요 정책이나 인사 결정은 CEO인 대통령만 바꿀 수 있다. CEO가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대주주인 국민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 2019-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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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제균 칼럼]균형자 → 운전자 → 중재자 → 촉진자, 그 위험한 집착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만 바라보지만, 김정은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만 쳐다본다. 이 지긋지긋한 짝사랑의 사슬이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꼬이게 만드는 주요 원인 중 하나다. 이 3자 중엔 누가 제일 약자일까.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란 말이 있듯이, 당연히 문 대통령이다. 사랑을 주기만 하고 받지는 못하니까. 급기야 김정은은 트럼프와의 실연의 화풀이를 문 대통령에게 하고 있다. 문 대통령이 제안한 남북 정상회담 제의는 뭉개고,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철수를 일방 통보했다. 지난해 4·27 판문점 합의로 만들어진 연락사무소의 개·보수와 유지 등에 100억 원 이상이 들어갔다. 시쳇말로 ‘돈 주고 뺨 맞은’ 경우다. 북한은 ‘하노이 노딜’ 이후 만만한 남쪽에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다. 최선희 외무성 부상은 15일 기자회견을 열어 “남조선은 미국의 동맹이기 때문에 ‘플레이어’이지, 중재자가 아니다”라고 했다. 줄곧 핵문제는 북-미의 문제라며 한국을 왕따시켰던 북한이 한국의 당사자 자격을 인정한 걸까. 천만의 말씀. 북이 말하는 당사국의 정의는 “미국에 대고 요구할 것은 요구하고, 할 말은 하는 당사자 역할”(22일 대외선전매체)이다. 쉽게 말해 아예 발가벗고 북쪽 편에 서라는 것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제재의 틀을 깨고 금강산관광이든, 개성공단이든 자기들 주머니에 돈이 들어오도록 하라는 요구다. 문 대통령으로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주도의 제재 틀을 깼다간 자칫 우리 경제에 치명타를 맞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통해 북한에 무상 공적개발원조(ODA)를 해주는 우회 방안까지 나오는 걸 보면 오로지 북한, 북한으로 향하는 그 집념은 놀라울 정도다. 문재인 정부가 그 집념의 10분의 1이라도 경제 살리기에 썼으면 한다. 하노이에서 트럼프에게 뺨 맞은 김정은의 표정은 막 실연당한 사람 이상으로 반쯤은 넋이 나가 보였다. 그런 김정은에게 애꿎은 분풀이를 당하는 문 대통령도 국정의 활력을 잃은 듯하다. “남북대화 하나만 성공시키면 나머지는 다 깽판 쳐도 괜찮다”고 했다가 정말로 깽판을 쳤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전철을 밟으려는 것인가. 그런데 남북 관계가 동력을 잃으니, 이번에는 친일 논란에 일본 ‘전범 기업’ 딱지, 인천 상륙작전 피해자 보상, 여순 반란사건 재심, 심지어 100년도 훨씬 넘은 동학농민운동 참가자 명예회복까지 과거사 타령이 춤을 춘다. 들여다보면 문재인 정권의 북한 짝사랑과 역사 뒤집기는 샴쌍둥이 같은 것이다. ‘부정한 세력이 지배해온 대한민국’의 역사와 정통성을 부정하다가 대안을 북한에서 찾은 80년대 운동권 논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남쪽에 대한 증오를 워낙 키우다 보니, 북쪽에서 자행된 사상 최악의 독재와 공포정치, 인권탄압, 왕조계승 같은 악행에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고는 남쪽의 ‘불의(不義)한 역사’는 고쳐 쓰고, 북과 손잡아 ‘세상 바꾸기’를 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기도가 성공할 수 없을뿐더러 세계 10위권 대한민국을 세계로 미래로 나아가게 하기보다 자꾸만 안으로, 옛날로 파고들게 만든다는 점이다. 외교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균형을 잡는 예술이다.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균형자’에 이어 문재인 정부의 ‘남북 운전자’, 뒤이은 ‘북-미 중재자’에 이어 ‘촉진자’론까지 모두 실패로 끝나는 이유는 바로 이 균형을 잃었기 때문이다. 거창한 동북아 균형자부터 북-미 촉진자까지 그 스케일이 졸아들면서도 어떻게든 북한과의 연계 고리를 유지하려는 그 집착이 안쓰러울 뿐이다. 하지만 그 집착은 허망할뿐더러 위험하다. 북한에 꽂힌 나머지 미국이란 한반도 질서의 상수(常數)를 너무 가벼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워싱턴 조야(朝野)에선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며 자유무역 질서를 지키다가 최대 수혜자가 된 중국이 미국 패권에 도전하는 빌미를 줬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트럼프가 스스로 자유무역 질서를 깨고 ‘세계의 경찰 포기’ 선언을 한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미 국방부가 주한미군 예산 8000만 달러가량을 비롯해 전 세계 국방사업 예산을 멕시코 장벽 건설용 전용예산에 포함시킨 것도 심상치 않다. 이런 마당에 70년 혈맹인 미국보다 북한을 중시하는 대북정책을 버리지 않는다면 미국이 한국을 버리는 날만 앞당길 뿐이다.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 2019-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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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제균 칼럼]교조주의 늪에 더 깊이 빠져드는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은 5일 해군사관학교 생도 임관식에서 “(해군은) 일본군 출신이 아닌, 온전히 우리 힘으로 3군 중 최초로 창군했다. 해군의 역사가 대한민국 국군의 역사”라고 말했다. 해사 임관식에서 해군을 띄워주려는 의도에서 한 말이었다고 해도 부적절했다고 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우리 군, 특히 육군과 공군 창설 과정에서 신생국의 군인 자원 부족 등의 이유로 일본군 만주군 광복군 중국군 등 다양한 출신이 참여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돌아보면 친일 청산이 깔끔하지 못했다는 시각도 있을 수 있으나 바로 이 군이 6·25전쟁에서 피를 흘렸고 베트남전 참전으로 근대화에 기여했으며 이후에도 우리 안보의 든든한 보루였다. 70년이 지난 지금 ‘태생의 비밀’을 따지는 것이 국익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더구나 문 대통령은 군통수권자다. 해군에 우리 국군의 정통성이 있다는 식의 발언은 군의 단합은 물론 전군(全軍)의 지휘통솔에도 도움이 되질 않는다. 대통령은 이번 3·1절 기념사에서 ‘이제 와서 과거의 상처를 헤집어 분열을 일으키자는 것이 아니다. 친일 잔재 청산도 미래지향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광복된 지 74년이 지나 소위 친일 논란 인사의 생존 가능성이 희박한 터에 잔재 청산 운운할 때부터 미래는 달아나고 과거를 헤집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베트남에 근무했던 외교관의 회고. “베트남을 방문하는 한국 대통령이 베트남전 참전에 대해 사과하려고 하면 정작 베트남 외교부에선 뜨악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가 미국과 싸워 승리한 전쟁인데, 왜 미국의 용병이었던 한국이 사과하느냐’는 식이다. 당사국은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데, 제발 사과 좀 받아달라고 교섭하느라 난감했다. 과거보다 미래를 중시하는 베트남식 실용주의가 때론 무서울 정도였다.” 하지만 베트남보다 잘사는 한국에선 친일 교가 논란에 이어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의 친일 논란마저 불거질 기세다. 그럼 이제 애국가도 바꿔야 하나. 사물과 사건에는 대체로 양면이 있다. 그 양면을 함께 보는 것이 균형감이고, 그 균형감은 난마처럼 얽힌 국정(國政)을 풀어나가는 데 필수적인 자질이다. 한 면만 보거나 보려 해선 국정은 더욱 꼬일 뿐이다. 국정 경험이 쌓일수록 균형감이 느는 게 상례인데, 웬걸 문재인 청와대는 역주행하는 느낌마저 준다. 친일 논란과 한일관계만 해도 이젠 국민 통합과 양국의 미래를 균형 있게 볼 때도 됐는데, 더욱 외곬으로 치닫고 있다. 대북정책은 어떤가. 미국과 북한의 중재자를 자임하며 비핵화를 이끌어 내려고 노력하는 듯하더니, 아예 이젠 노골적으로 북한 편에 선다. 한쪽 편만 들어선 중재가 성립될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코리아 패싱’이 횡행하는 북-미 협상에서 한국이 중재자 역할마저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자칫 북핵 문제가 재앙적 상황으로 번지는 경우에도 손놓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미세먼지 문제도 마찬가지다. 탈원전이라는 금기를 건드리지 못하니까 에너지 정책이 미세먼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제대로 된 분석이 나올 수 없다. 원인에 대한 정밀 분석 없이 스마트한 대책이 나올 수 있겠나. 북한과 탈원전은 무조건 선(善)이고, 털끝만 한 친일도 악(惡)이라는 식으로 한 면만 보려는 게 바로 교조주의요, 원리주의다. 우리 역사에서 조선은 해양과 대륙에서 일본과 청이라는 신흥 강국이 굴기하는데도, 망해 가는 명나라만 바라보다 임병양란(壬丙兩亂)을 당하고 패망의 길로 저물어갔다. 심지어 명이 멸망한 뒤에도 친명반청(親明反淸)의 교조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대부들은 명 황제를 모시는 만동묘(萬東廟)까지 지어 제사를 지냈다. 만동은 ‘천자를 향한 제후의 충성’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나왔다.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은 주중 대사 시절 시진핑 중국 주석을 만나 신임장을 제정한 뒤 방명록에 ‘만절필동’이란 문구를 적어 논란을 불렀다. 노 실장이 비서실을 ‘접수’한 이후 청와대가 전보다도 경직돼 가는 느낌을 받는 건 우연일까. 일이 안 풀릴수록 적확한 진단을 내놓고 유연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런데 작금의 청와대는 북핵과 외교, 경제와 국민 통합 문제가 꼬일수록 어깃장을 놓고, 그러면서 점점 더 교조주의의 늪에 깊이 빠져드는 듯하다. 곧 문재인 정부 출범 2년이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한가.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 2019-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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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제균 칼럼]박근혜, 보수 분열의 아이콘 될 건가

    이런 글을 쓰려니 서두부터 마음이 복잡해진다. ‘박근혜의 절대고독.’ 2016년 1월 22일자 동아일보에 내가 쓴 칼럼의 제목이다.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기 한참 전이었지만, 당시 박 대통령이 청와대에 칩거하며 외부와의 소통을 비정상적으로 차단했음을 우려하는 내용이었다. 칼럼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맺었다. “대통령이 정책 결정 과정에서 균형감을 잃지 않았는지, 수시로 전문의 상담을 받는 미국의 예를 참고할 필요도 있을 것 같다.” 바로 이 문장 때문이었다. 청와대 관계자의 항의를 받은 것은. “대통령이 정신과 상담이라도 받으라는 것이냐?” 명색이 기자로서 칼럼을 쓸 당시에도 이미 박 전 대통령이 최순실과 은밀한 커넥션을 맺고 국정 개입을 방치했다는 점을 몰랐다는 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 박 전 대통령은 본인 주장대로 ‘임기 중에 자나 깨나 나라 걱정’을 하며 지냈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그 노심초사는 국정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어쩌면 박근혜의 가장 큰 잘못은 대통령이란 직(職)을 수행하기에 부적합한 성격이었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박 전 대통령 탄핵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그 이유로 “박근혜 호주머니로 한 푼이라도 들어간 게 입증됐느냐”는 논리를 댄다. 법무부 장관 출신으로 탄핵 당시 대통령권한대행을 지낸 황교안 전 국무총리도 이틀 앞으로 다가온 자유한국당 전당대회의 대표 경선과정에서 비슷한 얘기를 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돈 받아서 탄핵당한 것이 아니다. 국민이 위임한 헌법상 대통령의 권력을 사유화해 최순실이란 사인(私人)에게 넘겨 국민의 신임을 배신했기 때문에 파면당한 것이다. 탄핵을 결정한 헌법재판소도 이 점을 중시하며 박 전 대통령이 최순실의 국정 개입 사실을 철저히 은폐해 헌법 수호 의지가 없다고 판시했다. 이는 국가의 명운이 걸린 대통령의 책무를 사실상 팽개친 것이어서 돈을 받은 것보다 더 나쁘다고 나는 본다. 그런데 헌법과 법률상 명명백백한 박근혜의 탄핵 사유로 한국당 전대가 늪처럼 질척거리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벌써 탄핵이 2년이 다 돼 가지만 탄핵에 찬성하느냐, 마느냐가 무슨 사상검증의 잣대처럼 여겨지고 있다. 시대착오도 이런 시대착오가 따로 없다. 문재인 정부의 내로남불 실정(失政)에 숨이 막히는 보수 유권자가 한국당에 관심을 가지려다가도 눈길을 돌리는 이유다. 박근혜 본인은 원치 않았을지 몰라도 이미 그 자신이 한국당 분열의 아이콘처럼 돼버렸다. 이런 한국당의 약점을 잘 아는 여권에서 ‘박근혜 사면 총선 필승론’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박 전 대통령을 사면하면 보수 세력이 둘로 쪼개져 선거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란 얘기다. 과거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 반대로 돌아가는 형국이다. 박 전 대통령은 때가 되면 사면돼야 한다고 본다. 전직 대통령 두 명에 대법원장 출신까지 감옥에 있는 나라가 지구상에 비교적 멀쩡한 국가 가운데 또 있을까. 국격(國格)과 국민통합을 위해서도 사면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사면이 또 다른 분열의 불씨가 돼서는 안 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박 전 대통령이 자제해야 한다. ‘감옥의 박심(朴心)’이나 흘려 현실정치에 개입하려는 식이어선 곤란하다. 박 전 대통령이 실패한 까닭은 부모의 비극적 최후에 따른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해 국정을 수행할 심리적 준비가 안 돼 있던 탓이 크다. 그런데 이번에는 본인이 보수 정치의 트라우마로 남으려는 것인가. 박 전 대통령도 보수 세력을 둘로 쪼개 스스로 정권교체의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27일 누가 한국당 대표가 되든,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박근혜를 넘어야 한국당이 산다. 지나간 물은 역사의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고, 돌려서도 안 된다. 박 전 대통령도 현실정치에 미련을 버리고 한국 보수의 미래를 위해 기도하는 심정으로 지켜보는 것이 전직 대통령으로서 얼마 남지 않은 품위를 지키는 길이다. 보수가 살아야 박근혜 대통령의 시대도 재평가 받을 마지막 기회라도 잡을 것이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 2019-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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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제균 칼럼]문재인 정부는 태생부터 깨끗하다는 착각의 덫

    김경수 경남지사가 법정 구속된 1심 판결을 보면서 안철수를 떠올렸다. 지난 대통령 선거 당시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선거일을 한 달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바짝 따라붙었다. 2017년 4월 첫째와 둘째 주 한국갤럽 조사에서 문 후보를 오차범위 내인 3%포인트 차까지 추격했다. 문 후보에게 거부감을 가진 보수 표심의 막판 쏠림 현상 덕이 컸다. 그러다 4월 둘째 주인 13일에 시작된 TV 토론을 계기로 상승세가 꺾여 셋째 주부터 지지율이 곤두박질쳤다. 4월 23일 열린 3차 TV 토론에서 안 후보가 “내가 MB(이명박 전 대통령) 아바타냐”고 문 후보에게 따질 때, 이미 승부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뒤였다. TV를 본 많은 사람들은 안 후보가 왜 뜬금없이 그걸 물고 늘어져 자충수를 뒀느냐며 혀를 끌끌 찼다. MB 아바타가 아니라고 목청을 높이면 외려 MB 아바타로 각인되는, 정치 선전술의 기본도 모른다면서. 하지만 이번 김 지사 판결을 보면서 안 후보 입장에선 뜬금없는 문제 제기가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안 후보는 자신의 지지율 급락 원인이 인터넷에 창궐한 ‘MB 아바타’ 등 부정 여론 탓이란 생각에 꽂혀 헤어나지 못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안철수의 지지율 하락이 댓글 조작 때문이었다고 보지 않는다. 안 후보가 TV 토론 등에서 보여준 깜냥은 나라를 맡기기엔 부족했다. 또 댓글 조작이 지난 대선의 판도를 갈랐다고는 더더욱 보지 않는다. 문재인은 대선이 본격화된 2016년 하반기 이후부터 출마 후보 가운데 부동의 1위였다. 그럼에도 1심 판결에서 드러난 댓글 조작 혐의는 심각한 수준이다. 2016년 12월∼2018년 3월 네이버 등 포털 사이트의 기사 약 8만 개에 댓글 8840만여 건을 조작한 것으로 나타났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대선 개입 확정 판결에서는 국정원 직원들이 391개의 트위터 계정으로 29만5636차례에 걸쳐 글을 올리거나 리트윗하고, 인터넷 게시판에 2124회 댓글을 단 것으로 나왔다. 국가기관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국정원 사건의 죄질이 더 나쁘다고 볼 수 있지만, 수법으로 치면 정부 아마추어들의 수공업 생산과 민간 프로들의 기계공업 대량생산에 비교될 정도다. 아직 댓글 조작 문제는 최종 판결이 나온 것은 아니다. 다만 이번 판결을 계기로 문재인 정권은 태생부터 순수하다느니, 촛불혁명으로 탄생했다느니 하는 착각에서 벗어났으면 한다. 국민 대다수가 그렇게 보지 않음에도 여권 핵심부가 그런 착각을 고수하고, 심지어 강요하기 때문이다. 현 정부 들어 유난히 ‘내로남불’ 얘기가 많이 들리는 것도 고고한 척은 다 해놓고 뒤로는 이전 정권의 구태(舊態)를 답습하거나 한술 더 뜨기 때문일 것이다. 집권 1년 9개월 동안 국회 인사청문 보고서 채택 없이 임명을 강행한 장관급이 벌써 8명이다. 박근혜 정부 4년 2개월 임기 동안 10명이었던 것에 비해도 과속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앙선관위의 선거관리 실무를 총괄하는 상임위원의 임명을 강행한 것은 대통령이 무엇보다 지켜야 할 선거 중립과 관련해 두고두고 불씨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정치적 중립을 우습게 아는 여권 내 분위기가 김경수 판결이 마음에 안 든다고 사법부를 협박하며 헌법상 권력분립을 흔드는 위험한 질주로 이어지는 것이다. 착각은 자유일 수 있다. 하지만 자신들만 깨끗하다, 아니 DNA 자체가 다르다는 착각을 이전 정권 관여자나 현 정부 비판 세력을 ‘적폐’로 몰아 가혹하게 다루는 잣대로 사용하고 있으니 문제가 크다. 착각 속에서 자신과 남에게 다른 잣대를 적용하는 것이 내로남불 아니고 뭔가. 국민은 깨끗한 정부를 원한다. 그러나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시달리는 이 엄혹한 시기에 국민이 더욱 필요로 하는 건 일 잘하는 정부다. 시장경제를 흔들고 안보 불안을 부추겨 민생을 고단하게 하면서도 ‘우리는 태생부터 다르니 괜찮다’는 선민의식에 빠진 정부가 아니다. 집권세력의 그런 착각과 선민의식이야말로 국민을 내 편 네 편으로 나누고, 대한민국을 전직 대통령 2명에 대법원장 출신까지 감옥에 가두는 강퍅한 나라로 몰아간다. 집권 2년이 다 돼 가는 이제는 현실을 인정하고 착각의 덫에서 빠져나올 때가 됐다.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 2019-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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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제균 칼럼]한국號가 맞닥뜨린 ‘北=핵보유국’ 암초

    “아무도 안 가본 그곳까지 가는 일은 시간이 걸리고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가보지 못한 항로(航路)여서 불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가야 할 곳이다.” 선장의 어조는 비장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번 목적지로 정한 ‘그곳’으로 항해하겠다는 것. 하지만 그곳이 해도(海圖)상에 존재하지 않는 지점이라고 말해주는 항해사는 없었다. 선장이 바뀌면서 항해사들을 모두 초짜들로 갈아 치웠기 때문. 벼락감투에 감읍(感泣)한 초보 항해사들은 오히려 선장에게 “조금만 기다리면 반드시 그곳으로 가는 항로가 나타날 것”이라고 귀엣말을 해왔다. 선원들도 항로가 이상하다고 눈치 챘다. 그렇지만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전임 선장에게 충성했다는 이유로 무참히 도태되는 동료들을 봤기 때문. 한두 명의 선원이 항로에 이의를 제기하며 휘슬을 불기도 했다. 하지만 선장과 항해사들은 “좁은 선실에 처박힌 하급 선원이 뭘 알겠느냐”며 묵살했다. 선원들은 안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선장은 바뀐다. 그때까지 국으로 죽어지내면 된다. 너무 열심히 하다간 다음 선장에게 찍힌다. 그러나 승객들은 불안하다. 항로가 이상하다고 느끼지만, 항해사와 선원 중 누구도 ‘아니요’라고 말하는 이가 없는 현실이 더 두렵다. 그렇게 항해해 온 지 벌써 20개월. 그런데 저 멀리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선장이 잘못된 방향을 가리켜도 초보 정책 책임자들은 “맞는 방향”이라고 맞장구를 치고, 정책 실무자들은 숨죽이며 항해해 온 대한민국호(號). 이 거대한 배가 맞닥뜨릴 첫 번째 ‘진실의 순간(Moment of Truth)’이 다가왔다. 모두가 내심 인정하면서도 공인하기는 싫은 그 진실. 북한이 핵보유국이라는 불편한 진실 말이다. 문재인 정부는 김정은이 결국 핵을 포기할 것이란 ‘편의적 낙관론(wishful thinking)’에 빠져 이 진실을 외면해왔다. 미국이 북한 체제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한국이 주도적으로 나서 북한을 경제적으로 먹고살 만하게 해주면 김정은이 핵을 포기할 것이란 순진한 믿음에 빠져 대북정책을 엉뚱한 방향으로 끌어왔다. 역사상 자국의 힘으로 핵 개발에 성공한 나라의 지도자, 특히 자신의 집권 시 핵을 거머쥔 권력자가 스스로 포기한 일은 없다. 당신이 김정은이라면 할아버지부터 3대에 걸쳐 국제사회의 무수한 핍박을 감내하며 자기 대에 이르러 비로소 갖게 된 ‘절대 무기’를 포기하겠는가.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는 경우는 다음 두 가지밖에 없다. 목숨 아니면 권좌가 위태로울 때다. 군사행동은 전자를, 대북 압박은 후자를 노린 것이다. 하지만 군사행동은 이미 물 건너 갔고, 대북 압박도 흐물흐물해지고 있다. 북핵 당사자인 한국과 국제사회를 움직이는 미국이 똘똘 뭉쳐 물샐틈없이 제재와 압박을 가해도 될까 말까인데, 한국은 북한에 뒷문을 열어 주지 못해 안달이다. 그러니 압박정책에 가스가 샐 수밖에 없고, 미국도 동력(動力)이 붙지 않는 압박 대신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기실 북한의 핵은 미국에 직접적 위협은 아니다. 그 핵을 미국 본토까지 실어올 운반수단, 즉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위협이다. 북한으로 하여금 핵을 포기하도록 할 정책수단이 힘을 잃으면 미국으로선 ICBM 제거가 급선무다. 그러려면 북의 핵 보유를 사실상 묵인할 수밖에 없다. 2월 말로 예상되는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이런 불편한 진실의 암초가 윤곽을 드러내는 듯하다.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도 국제사회가 핵보유국으로 공인해 준 일은 없다. 공인받은 나라는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등 5개국뿐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등 3개국은 핵보유국으로 간주된다. 북한이 이런 반열에 오르는 진실의 순간이 닥친다면 대통령을 비롯한 현 정부 외교안보 핵심 당국자들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애초부터 남북 화해와 경협으로 북에 훈풍을 불어넣으면서 동시에 핵 포기를 유도한다는 정책의 목표점은 갈 수 없는 곳이었다. 따뜻하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런 이상향은 없다. 이상향을 뜻하는 유토피아(Utopia)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Ou(없다)+Topos(장소)다. 이상향은 세상에 없는 곳이다. 한 번만 방향을 잘못 잡아도 나라의 명운이 뒤바뀌는 외교안보의 세계에는 더더욱.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 2019-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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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제균 칼럼]횃불이 된 촛불, 이제 버리고 가라

    촛불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애착은 집착으로 느껴지리만치 지나치다. 촛불이 타오르기 시작한 지 2년여가 지났으면 한풀 수그러들 만도 하건만, 이번에는 경제 문제에 촛불을 내세웠다. 2일 신년사에서 “촛불은 더 많이 함께할 때까지 인내하고 성숙한 문화로 세상을 바꿨다. 같은 방법으로 경제를 바꿔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요컨대, 소득주도성장(소주성) 정책을 올해도 밀고 나갈 테니, 성공할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것이다. 이 메시지를 접한 첫 느낌은 대통령께 불경(不敬)스럽게도 ‘안쓰럽다’였다. 경제가 오죽 안 풀리면 촛불까지 들고나왔을까.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을 필두로 한 소주성은 이미 실패한 정책으로 낙인찍혔다. 그 부작용을 세금으로 땜질하려고 해도 수습이 되지 않는 지경이다. 그럼에도 정책 전환이 아니라 ‘반드시 성공’을 기약하는 데선 오기를 넘어 아큐정전(阿Q正傳) 식 ‘정신 승리’가 연상될 정도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대통령이든 정부든 실패를 자인하기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러면서 문 대통령이 성공을 상징하는 메타포로 차용한 것이 촛불이다. 촛불에 힘입어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른 문재인에게 촛불은 지상 최고의 성공 경험, 그 자체일 것이다. 하지만 촛불도 2년이 지났고, 집권 중반에 접어든 이때야말로 자신의 성공 공식을 결연히 깨고 나와야 한다. 자신이 성공한 방식대로 실패한다는 것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휴브리스(오만)의 경고다. 성공한 기업이나 최고경영자(CEO)는 물론이고 고금의 권력자, 우리의 역대 대통령들도 그렇게 실패의 길로 갔다. 무엇보다 문 대통령에게 지금 촛불은 성공의 모멘텀이 아니라 실패의 나락으로 찍어 누르는 짐 덩어리가 됐다.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막는 세력 1호가 이른바 ‘촛불 청구서’를 들이미는 노동계와 시민단체 등이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같은 날 신년사를 발표한 민노총은 “2016년 촛불항쟁으로 박근혜 적폐세력을 물러나게 한 주체는 다름 아닌 우리 민주노총”이라며 올해는 경제 노사 문제를 뛰어넘어 국가보안법 폐지와 주한미군 철수 같은 정치 이슈에도 적극 나서겠다고 했다. 가당찮은 얘기다. 촛불은 민노총의 것도, 노동계나 시민단체의 것도, 문재인 정권의 것도 아니다.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을 몰락하는 왕조의 환관정치처럼 운영한 박근혜 정권에 절망했던 국민들, 나라다운 나라를 열망했던 우리 모두의 것이다. 그래서 누적 연인원 15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촛불을 들었고, 헌법에 따라 질서 있게 정권을 교체했다.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말없는 절대 다수의 국민은 그것으로 좋았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촛불을 앞세우는 이들은 뭔가. 촛불을 아무렇게나 해도 좋다는 면죄부로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촛불이 정신적 물리적 폭력을 자행하고, 용인하는 횃불로 변질된 것은 아닌가. 촛불을 ‘우리는 DNA가 다르다’는 선민의식의 갑옷처럼 두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촛불의 철옹성 속에서 원칙을 요구한 내부고발자는 인격자살을 강요당하고, ‘적폐’로 찍힌 사람들은 희생되며, 상식을 말하는 목소리는 ‘가짜뉴스’로 묻히기 십상이다. 변질된 촛불을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사람은 대통령이다. 따지고 보면 문 대통령이 촛불에 부채의식을 느낄 이유는 없다. 촛불의 외침은 ‘박근혜 하야’였지, ‘문재인 집권’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문 대통령이 집권한 데 대해 제 밥그릇만 챙기려 숟가락을 얹는 세력들에 놀아날 필요가 없다. 설혹 이들 세력이 촛불을 조직화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가 있었다고 해도 대통령의 지상명제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이쯤에서 고리를 끊을 때가 됐다. 촛불은 위대한 시민의 축제였다. 그 불빛은 닫힌 공간이 아니라 열린 광장이어서 더욱 찬연히 빛났다. 그렇기에 촛불을 자신들의 전유물로 삼거나, 선민의식의 울타리로 삼는 이들은 촛불 정신에 반하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진정 촛불 정신을 살리고 싶다면 성공의 기억에만 빠져 있을 것이 아니라 문호를 활짝 열어젖힌 개방적인 인사와 정책으로 응답해야 한다. 그해 겨울 촛불을 든 사람들의 소망은 한국사회의 전복(顚覆)이 아니라 전진(前進)임을 기억하면서.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

    • 2019-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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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제균 칼럼]靑, 무능해서 오만하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의 청와대는 황량하다. 물러가는 대통령은 아직 임기가 남았지만 ‘학업’에 뜻이 없다. 미리 청와대를 탈출 못한 ‘늘공’들도 새 정권의 눈치만 살피며 돌아갈 자리 물색에 여념이 없다. 대선에서 승리하고 청와대를 ‘접수’하러 갔던 이의 회고에 따르면 흡사 ‘도둑맞은 집’ 같다고 했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정권의 인수인계 절차가 엄정히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새로 청와대에 입성한 이들은 업무 프로세스가 어떻게 되는지, 하다못해 무슨 문서가 어디 있는지 몰라 당황스럽다. 이럴 때 반짝 빛을 발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 정권으로부터 넘어온 청와대 실무자들이다. 청와대 업무에 서툰 상급자들은 이들의 전 정권 이력을 알고도 업무 편의상 그대로 쓰는 경우가 있다. 이번에 문제 된 김태우 검찰 수사관도 이명박 정부부터 3대에 걸친 ‘청와대 말뚝’이다. 특히 정권이 바뀐 직후엔 인사정보가 중요하다. 김 수사관은 그 점에서 쓰임새가 컸을 것이란 게 주변의 관측이다. 세 정권을 넘나들며 청와대에 근무한 김 수사관도 정치의 풍향에 민감한 인물이란 게 중평이다. 굳이 노무현 정부 청와대 민정비서관을 지낸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정보 수집을 하다 보면 공적 영역과 민간 영역을 칼로 두부 자르듯이 구분할 수 없다는 점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공직 비리가 민간인과 엮이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 청와대는 그렇게 수집된 민간인 동향이나 첩보를 ‘불순물’이라고 표현했다. ‘문재인 정부엔 민간인 사찰 DNA가 없다’는 우생학(優生學)적 선민의식마저 드러낸 청와대가 자신들의 순수함을 강조하려다 보니 나온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그 불순물이 너무 많은 것으로 드러나는 게 문제다. 지금 나오는 것만 봐도 문재인 정부의 민정수석실은 전 정권들과 별반 다르게 운영되지 않았다. 민정수석실 내 감찰조직은 그대로 유지됐고, 이렇게 시끄러운데도 없애겠다는 소리는 안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르다’는, 되지도 않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건건이 주워 담기 식 대응을 하다 보니 ‘불순물’이니 ‘DNA’니, 심지어 ‘공기업으로 착각했다’는 헛발질이 나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다르다’는 평가는 국정의 결과물을 보고 국민들이 해야 할 몫이다. 그게 아니라 자기들끼리 ‘다르다’는 프레임을 정해 놓고 일하는 방식은 구태를 답습하니까 곳곳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현 청와대가 오만하게 비치는 주범인 선민의식도 따지고 보면 일은 제대로 못하고 말만 앞세우는 무능에서 비롯된 것이다. 민간 조직도 그렇거니와 거대한 정권을 운영하다 보면 당연히 티도 묻고 재도 묻힐 수밖에 없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역할을 해야 한다. 김태우 수사관 같은 사람일 것이다. 김태우의 비리 의혹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규명해서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본다. 다만 그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일을 시키거나 묵인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자신들만 깨끗한 척하느냐는 반발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김태우 문건 파동은 정권 출범 후 1년 7개월 만에 터졌다. 박근혜 정부의 정윤회 문건 파동은 1년 9개월 만에 터졌다. 정권 출범 1년 반 고개를 넘어 중반전으로 접어드는 이 시기가 위험한 때다. 지지율이 하강 곡선을 그리면서 집권 핵심세력이 내부의 그립을 강하게 쥐려고 하면 반발이나 저항이 튀어나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레임덕은 내부 균열이 그 시작이다. 진실은 시간이 지나면 드러나게 돼 있다. 문건 유출에 초점이 맞춰졌던 정윤회 문건 사건은 국정농단 사건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었음에도 묻혀졌다. 박관천 리스트에서 권력서열 1위로 꼽혔던 최순실의 실체도 나중에야 드러났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다스 실소유주 논란도 시간이 지나면서 실체가 잡혔다. 이번 사건은 어떤 진실의 그림자를 드리울 것인가. 분명한 것은 누가 대통령이 되건 한국 청와대는 참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거기만 들어가면 멀쩡하던 사람도 돌변하니까, 이제는 사람보다 ‘제왕적 청와대’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박제균 논설실장 phark@donga.com}

    • 2018-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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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제균 칼럼]대통령이 권위적으로 변할 때

    당연한 얘기지만 한국의 대통령은 다들 처음 해보는 자리다. 그것도 세상을 다 얻은 듯한 지지율 고공행진 속에. 그 시기의 대통령은 뭘 해도 진솔하고 소탈해 보인다. 실제로도 소탈하다. 아직 민간인 물이 덜 빠졌고 권위적인 청와대 의전에도 익숙지 않기 때문이다. 대통령으로서 국정 수행도 처음이라 겸허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개 취임 1년 반 전후가 되면 대통령이 변하기 시작한다. 기업의 성공을 위해 가장 고민 많은 사람이 오너이듯이, 한 정권의 오너 격인 대통령만큼 정권의 성공을 위해 고민하는 사람도 없다. 여기에 최고급 정보까지 쌓이면 안 보이던 국정의 디테일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럴수록 밑에서 하는 일처리가 못마땅해지고,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국정이 굴러가지 않는 데 짜증이 늘어가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다. 대통령이 권위적으로 변하는 시기가. 자신의 말 한마디에 세상이 달라지는 권력의 경험은 그런 변화에 기름을 붓는다. 한국 대통령들은 이렇게 비슷한 길을 걸었다. 대통령이 되기 전 소탈과 겸손으로 어필했던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그런 징후들이 드러나고 있다. 최근 문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손바닥처럼 뒤집힌 정책이 적지 않다. 탄력근로제 확대 적용의 입법 문제가 그렇고 편의점 과밀 규제,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 등도 있다. 정책이든 공약이든 바뀔 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정책도 일종의 국민과의 약속인데, 약속을 바꾸려면 바꾸는 사람이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줘야 한다. 그 설명이 불편하고 때론 귀찮을지라도. 충분한 설명 없이 하루아침에 바꿔버리면 권위적이라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더구나 탄력근로제 확대 적용 입법은 지난달 5일 대통령 자신도 참석한 여야정 상설협의체 회의에서 합의문까지 발표한 사안이다. 그런데 문 대통령이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판단이 있을 때까지 논의를 미뤄 달라’고 하자 단번에 제동이 걸렸다. 대통령의 입장 번복은 노동계의 반발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설혹 설명하기가 껄끄럽더라도 국민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절차를 거쳤어야 했다. 조국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 책임 문제도 마찬가지다. 민정수석실 특별감찰반 비위와 일련의 부적절한 처신과 무능으로 경질론이 그토록 비등했으면 왜 현 시점에서 조 수석을 바꿀 수 없는지 설명하려는 노력이라도 했어야 한다. 도리어 문 대통령은 조 수석을 경질하면서 해야 할 ‘청와대 공직기강 확립’이란 말을 그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하는 어깃장을 놓았다. 기자들의 말문을 막은 기내 간담회는 발언록을 들여다보기가 민망할 정도다. 질의응답을 시작할 때부터 “사전에 무슨 약속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국내 문제는 질문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빗장을 건 뒤 이어진 국내 문제 질문에는 “더 말씀 안 하셔도 될 것 같고요” “짧게라도 질문 받지 않고 답하지 않겠습니다” “외교로 돌아가시죠”라며 셔터 문까지 내렸다. 과거의 취재 경험으로 볼 때 다른 사람도 아닌 대통령이 그랬으니 그 자리가 얼마나 어색하고 불편했을지 ‘안 봐도 비디오’다. 문제는 대통령이 권위적으로 변할 때가 지지율 하락과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문 대통령의 지지율은 7일 한국갤럽 발표에서 49%를 기록했다. 9월 7일 발표에서 취임 이후 최저치인 49%였던 데 이어 다시 40%대로 떨어졌다. 지지율이 떨어지면 대통령은 초조해진다. 밤낮을 국가만 생각하는데, 이렇게 몰라주나 하는 서운한 마음도 든다. 그럴수록 더 권위적으로 변한다. 지지율이 더 떨어진 대통령은 급기야 사정의 칼을 빼기도 한다. 사정 정국이 조성되면 대통령은 더욱 두려운 존재가 되고, 그러면서 더 고립된다. 대통령이 권위적이란 소리가 나오기 시작할 때야말로 직언이 필요한 시기다. 하지만 권위적으로 변한 대통령이 쓴소리를 불편해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직언할 수 있는 과감한 입과 참고 들어주는 귀가 어느 때보다 긴요하다. 대통령이 비판에 귀를 닫으려 하면 주변에 “잘 하고 계십니다”만 입에 달고 통계를 분식(粉飾)하는 사람만 늘어난다. 우리 역대 대통령은 그렇게 실패의 길로 갔다. 문 대통령이 지금 그 기로에 섰다. 박제균 논설실장 phark@donga.com}

    • 2018-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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