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뛰는 '도청기' 위에 나는 '방청기'

  • 입력 2002년 4월 25일 15시 06분


“기필코 훔쳐서 들어라.” “절대 못 듣게 막아라.”

국가 기밀, 기업 비밀이 오가는 세계에서는 끊임없이 도청(盜聽)과, 이를 막는 방청(防聽)의 기운이 충돌한다. 창과 방패의 싸움이다. 이들 창과 방패는 서로 부닥치며 발전해 왔다.

●도청〓지난해 말 이승필 전 금속노조위원장은 경남 창원시 사파동 자택 냉장고 밑에서 담뱃갑 반만한 크기의 도청기를 발견했다. 70㎝가량의 줄 안테나가 달려 있는 것이었다. 국내의 무선 도청은 대개 이 수준의 ‘고전적 도청기’를 통해 이뤄진다. 이들은 탐지기를 갖다댈 경우 주파수가 발각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최근 도청 기술은 탐지기를 피하는 과정을 통해 업그레이드 되고 있다. 도청 전문 탐지업체인 한국스파이존(spy-zone.co.kr)의 이원업 부장은 “‘버스트 버그’라 불리는 도청기는 3, 4시간 도청한 목소리를 조용히 압축 저장한 후 1, 2초 사이에 내용을 전송한다”며 “평상시에는 주파수가 나타나지 않아 고난도 탐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도청기로부터 나온 송신 전파의 주파수를 끊임없이 바꾸는 ‘전파 현혹 기술’, 도청기로부터 나온 송신 전파의 주파수를 라디오 주파수와 바싹 붙여 얼핏 도청 주파수가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는 ‘전파 은닉 기술’도 있다. 아예 먼 거리에서 레이저 광선을 창문에 쏘아 창문의 진동을 분석해 방안의 대화를 도청하는 레이저 감청기도 있다.

유선 도청기 가운데는 전기선을 이용해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있다. 삼성 에스원의 이기우 주임은 “비밀 마이크가 콘센트 내에 숨겨져 있으며 벽 속의 일반 전기선을 통해 음성정보를 전달하는 원리”라며 “전원 공급이 계속되는 한 반영구적”이라고 설명했다.

컴퓨터에 입력되는 내용들을 읽어들이는 기술도 있다. 얼핏 보아 키보드와 컴퓨터 본체를 연결한 잭처럼 생겼지만 사실은 타이핑 중인 내용을 읽어들이는 장비, 모니터의 전자파를 분석해 화면 위에 뜬 내용을 파악하는 초단파 안테나 장비도 나왔다.

몰래카메라 역시 무선, 유선이 있다. 몰래카메라는 포르노필름을 만들기 위해 호텔 등 객실에 비밀리에 설치하는 데 가장 많이 이용된다. 이 경우 객실 침대 위 15도 각도에서 촬영한 것이 제일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따라서 이 각도를 유지할 만한 위치의 가구나 가전기기에 몰래카메라를 숨긴다. 펜촉 끝만한 크기의 렌즈를 객실 텔레비전 스피커 상단부에 내장하거나 화장용 거울 뒷면 중간 부분의 은분을 쌀알 만큼 벗겨내고 붙이는 사례가 많다.

도청기 구입 경로는 다양하다. 서울 세운상가의 일부 전자부품상 등에서도 구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인터넷으로도 주문할 수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본사를 둔 한 업체의 경우 홈페이지에 한국어판도 있다. 한국인이 만든 것으로 보인다. 탁상시계형 몰래카메라, 재떨이형 도청기부터 레이저 감청기까지 판매 중이다. 주문만 하면 배달료 15달러에 한국 어느 곳에든 전해준다고 밝히고 있다. 이 회사는 도청기 뿐만 아니라 도청 탐지기까지 팔고 있다. 창과 방패를 함께 팔겠다는 것이다.

한국 스파이존의 이 부장은 “도청 기기를 잘게 분해하면 세관을 통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e메일로 접수해 한국 내 제조업체에서 고객에게 보내주고 있을 가능성도 높다”고 말했다.

●방청〓국내에서 가장 강력한 방청 수준을 갖춘 곳으로 꼽히는 것은 역시 청와대다. 정부과천청사에 출입하는 한 기자는 “3, 4개월마다 한번씩 휴대전화 송수신이 일절 불가능한 것을 경험했다. 알고 보니 대통령이 각료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방문한 날이었다”고 말했다. 모종의 기술을 사용해 허용된 전파 외에는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방법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외교가의 방청 기술도 대단하다. 외교통상부는 수십억∼수백억원을 들여 만든 암호체계를 국외 공관에 보낸다. 새 암호체계를 ‘신서사’라 불리는 직원이 공관에 전달한다. “신서사들은 암호체계가 든 특수가방의 분실을 막기 위해 가방과 손목을 수갑으로 연결한 채 비행기에 탄다”고 한 외교관은 말했다.

주요 국가의 주한 대사관들은 ‘챈서리(chancery)’라 불리는 방에서 암호 전문을 발신한다. 한국인 직원들의 출입이 금지된 일종의 ‘철갑’방이다. 일체의 전파가 근접할 수 없게 돼 있다.

최근 서울 정동에 새 건물을 세운 주한 러시아대사관은 건물을 지을 당시 챈서리를 만든 것은 물론 공사에 쓰이는 벽돌 한 장, 시멘트 한움큼까지 점검했다. 도청기가 들어 있는지 확인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각국의 국가기관이 국경을 넘어 도청 및 방청, 탐지 기기를 운반할 때는 보안검색을 당하지 않는 ‘외교 행낭’을 사용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들의 집무실, 회의실, 연구소 등은 외부로부터의 무선 도청 등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 벽지 형태로 전파 차단막을 치는 ‘실딩(shielding)’ 시공을 한 경우가 많다.

이 밖의 방청 장비로는 전화기를 통해 전달되는 음성을 암호화하는 비화기, 사람이 들을 수 없는 ‘백색 잡음’을 발생시켜 레이저 감청을 막는 노이즈 방출기 등이 있다. 국내에서도 보안업체들을 통해 구할 수 있다. 한편 미 국방부는 컴퓨터 모니터를 읽는 초단파를 방해하기 위해 템페스트(TEMPEST)라는 비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방청장비

●노이즈 방출기와 노이즈 스피커

노이즈 방출기(왼쪽)와 노이즈 스피커(가운데)는 창문 혹은 벽에 붙여서 사람 귀에 들리지 않는 잡음을 만들어내는 데 쓰인다. 오른쪽은 이들 기기를 통제하는 본체.

●비화기

전화 통화 내용을 암호로 변환시켜 전달하는 기기. 팩스 전용 비화기도 있다. 미국 제품인 프라이비텔의 경우 통화 때마다 암호 코드를 바꾸게 돼있어 해킹이 대단히 어렵다.

●실딩(shielding)

중요 사무실, 회의실, 연구실 등을 외부 도청 세력들로부터 원천적으로 막고자 할 때 쓴다. 벽지처럼 시공돼 이상 전파의 침입은 물론 유출까지 막는다. 입자 형태의 니켈 등이 주성분이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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