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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복을 빕니다]조계종 前종정 월하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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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복을 빕니다]조계종 前종정 월하스님

입력 2003-12-04 18:55수정 2009-10-10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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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5월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에서 열린 종정 취임법회에 참석해 오른손에 불자(拂子·번뇌와 어리석음을 떨어내는 지팡이)를 들고 앉아 있는 월하 스님. 스님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나눔의 집’을 지을 때 1억5000만원을 몰래 기부하는 등 인연에 얽매이지 않는 자비를 베풀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4일 입적한 월하 스님은 한국 근대불교의 고승인 경봉, 구하 스님의 법통을 이어받은 선사이자 불보(佛寶) 사찰인 영축총림 통도사를 60여년 가까이 지켜온 큰 어른이었다. 선교(禪敎)를 겸비하고 원칙에 철저했던 스님 덕분에 통도사가 6·25전쟁 때 파괴의 위기를 모면하고 1984년 총림으로 지정되는 등 현재의 위상을 지킬 수 있었다.

스님은 평소 소탈하면서 자애로운 시골 할아버지 같은 모습을 보였다. 80세가 넘어서도 방청소와 빨래를 직접 했으며 자가용 없이 버스를 타고 다녔다. 평생 반말을 하지 않았고 손님을 꼭 문밖까지 배웅했다. 지난해 몸져눕기 전까지 대중들과 함께 공양했고, 경내 청소 등 울력(공동 일)에도 빠지지 않았다.

스님은 한번 원칙을 세우면 절대 꺾지 않았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이라는 청규(淸規)를 엄격히 지켰다. 인간의 다섯 가지 욕망인 재색식명수(財色食名壽) 중 식욕이 가장 억제하기 힘들다며 소식(小食)을 강조했다.

1970년대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이후락씨가 전국신도회장을 맡으면서 신도들도 종회(조계종의 입법기관)에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며 간섭하자 “그러려면 머리를 깎고 들어오라”고 단호히 거절한 일화가 유명하다.

스님은 대중 교화에 관심이 많았다. 음력 11월 한 달 동안 고승들의 법문을 듣는 ‘화엄산림’의 전통을 지키고 통도사 인근에 10여개의 유치원을 지은 것도 그 같은 관심의 반영이었다. 스님은 중생에게 구하지 않고 중생을 이익 되게 원력을 세우고 실천하라고 가르쳤다. ‘도둑을 제도하려면 함께 도둑질하면서 도둑질이 나쁘다는 것을 깨우쳐 주라’는 부처님의 말씀처럼 중생의 생활 속에 들어가 자비심을 깨닫게 하라는 것. 그는 상좌가 60명, 손(孫)상좌가 200여명이 될 정도로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는 종단에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사태 해결에 적극 나섰다. 1950년대 효봉 청담 인곡 경산 스님과 함께 사찰정화 수습대책위원회에 참가했고, 79년 조계사와 개운사 양쪽에 총무원이 생기는 사태가 발생하자 총무원장으로서 분규 종식에 기여했다. 94년 서의현 총무원장의 3선을 반대하는 개혁회의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98년 종단 분규 때 종정이었던 스님은 송월주 총무원장의 입후보를 반대하는 성명을 내고 ‘정화개혁회의’가 총무원 청사를 점거하도록 교시하는 등 분규에 관여해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로 인해 전국승려대회에서 ‘종정 불신임’ 결의를 당했으며 통도사가 총림 자격을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2001년 중앙종회에서 통도사가 총림으로, 스님은 총림의 방장으로 복권됐다.

한 불교계 인사는 “스님은 종단 분규 때 개인적 욕심이나 저의 없이 원칙에 따라 움직였다”며 “하지만 외부에는 독선과 고집으로 비쳤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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