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십대 소녀와 여든 노인의 20년 우정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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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앨리 스미스 지음·김재성 옮김/336쪽·1만4000원·민음사

영민하고 예민한 10대 소녀 엘리자베스는 옆집 문을 노크한다. 이웃 사람과 교류하라는 학교 숙제를 위해서다. 이웃집에는 80대 노인 대니얼 글럭이 살고 있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늙은 호모’라 부르며 수군거린다.

한 번으로 끝내려 한 만남은 일생의 인연으로 이어진다. 한창때 당대 예술인들과 어울리던 지식인이었던 글럭은 엘리자베스의 성 ‘디맨드’가 프랑스 어원을 따라 ‘세상의’라는 뜻을 지녔으며, 예기치 않게 여왕이 될 운명이라고 알려준다. “평생의 친구. 우리는 때로 평생을 기다려서 평생의 친구를 만나게 된단다.”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은 친구가 된다.

조숙한 소녀와 진지한 노인이 주고받는 대화는 영화 ‘비포 선라이즈’(1995년) 시리즈 못잖은 재미를 준다. “호텔에 가 놓고 돌볼 책임이 있는 아이에게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던 척해 본 경험 있으세요?” “질문에 도덕적 판단이 내포돼 있는지 알아야겠는데?” 거대담론부터 시시껄렁한 소재까지 죽이 척척 맞는다.

20년 뒤 소녀는 미술사를 전공한 대학 강사가 되고, 100세를 넘긴 대니얼은 요양원에서 잠들어 꿈을 꾸며 지낸다. 지금과 달리 제법 흥미진진하던 대니얼의 시대는 그의 꿈속에서 환상적으로 되살아나고, 엘리자베스가 발 디딘 2016년 영국은 브렉시트와 난민 문제 등으로 뒤숭숭하다 .

“민주주의가 마치 누군가가 깨부숴 무기로 쓰겠다고 위협할 수 있는 유리병쯤 되는 것 같다.” “온 나라에서 돈, 돈, 돈, 돈이 넘쳤다. 온 나라에서 돈, 돈, 돈, 돈이 씨가 말랐다.” 매혹적인 우정 사이로 시대의 아이러니를 무겁지 않게 짚어낸다. “내가 사랑에 빠진 건 사람이 아니었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조금 아는 이들이 우리를 제대로 보았기를 바라야 해”처럼 아껴 읽고 싶은 잠언들도 빼곡하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가을#앨리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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