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를 전시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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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미술관 40주년 기념전

“다시 34년 전처럼 하라면 어쩌겠습니까?” “못 해. 불행한 성장의 시작이었는데. 하하.” 당국에 의해 취소된 사회 비판적 전시에 대한 기억을 같은 공간에서 회고한 영상작품 ‘두 세계 사이’. 왼쪽부터 윤범모 가천대 교수, 김정헌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화가 민정기 씨. 아르코미술관 제공
“다시 34년 전처럼 하라면 어쩌겠습니까?” “못 해. 불행한 성장의 시작이었는데. 하하.” 당국에 의해 취소된 사회 비판적 전시에 대한 기억을 같은 공간에서 회고한 영상작품 ‘두 세계 사이’. 왼쪽부터 윤범모 가천대 교수, 김정헌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화가 민정기 씨. 아르코미술관 제공
개막 4시간 전. 전시가 취소되고 미술관의 모든 전기가 끊어졌다. 그림 태반은 벽에 걸리지 못한 채 바닥에 쌓여 있었다. 잠시 후 마음을 다잡은 작가들이 모여든 손님들에게 초를 하나씩 나눠줬다. 촛불을 밝혀 든 관람객들은 어둠 속을 더듬으며 작품을 관람하기 시작했다. 한 주를 예정했던 전시가 그렇게 하루 저녁 만에, 조명 없이 끝났다.

1980년 10월 17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미술관(당시 미술회관)에서 벌어진 일이다. 젊은 작가와 평론가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미술그룹 ‘현실과 발언’ 창립전이 개막 당일 미술관 운영위원회의 갑작스러운 취소로 무산됐다. 다음 달 30일까지 이곳에서 열리는 ‘미술을 위한 캐비닛, 아카이브(archive·기록보관소)로 읽는 아르코미술관 40년’전은 전시실 한쪽에서 상영하는 영상물을 통해 이 쓰린 기억을 되짚는다.

전소정 작가가 제작한 15분 53초 길이의 영상물 ‘두 세계 사이’에서 김정헌 서울문화재단 이사장(68), 화가 민정기 씨(65), 윤범모 가천대 교수(63)는 불 꺼진 전시실에 촛불을 켜고 둘러앉아 당시를 회고한다.

‘아카이브로 읽는 아르코미술관 40년’전 1층에 전시된 1980년대 기획전 전단. 아르코미술관 제공
‘아카이브로 읽는 아르코미술관 40년’전 1층에 전시된 1980년대 기획전 전단. 아르코미술관 제공
“4·19 20주년 기념전으로 계획한 것이었죠. 당시 미술은 현실 사회를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시대는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대중과 사회를 외면하는 작품을 만들었어요. 이에 대한 반성으로 만들어진 것이 ‘현실과 발언’이었습니다.”(윤범모)

“그림을 통해 ‘시각적으로 발언을 한다’…. 평론가 성완경 씨가 획기적인 발상을 내놓았죠. 운영위원회 측은 ‘젊은 작가들을 다치게 할 수 없다’고 설명했죠. 그때 그린 그림은 이제, 다시 그릴 수 없어요.”(민정기)

아르코미술관은 1974년 관훈동 덕수병원 건물을 빌려 운영을 시작했다. 건축가 고 김수근 씨가 설계한 지금의 건물을 지어 옮긴 것은 1979년. 국가가 주도해 설립한 미술관의 40주년 특별전인 만큼 보다 그럴듯한 초대전을 기획할 수도 있었지만 ‘볼품없는’ 자료 기획전을 선택했다.

이영주 아르코미술관 큐레이터는 “전시된 자료는 1, 2층의 450여 점이지만 1월부터 시작한 과거 자료 분류 작업을 계속 하고 있다. 화려한 한국 현대 미술이 나타나기까지 이 땅의 미술 판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되짚는 작업에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1층 전시실에는 1971∼1990년 미술관 주요 연혁과 국내 민간 갤러리 주요 전시 기록을 나란히 이어 붙였다. 주요 전시 전단은 유리장 안에 배치했는데, 전단의 열람을 원하는 관람객을 위해 일부 내용은 아이패드로 볼 수 있도록 했다.

2층은 1990년 이후의 기록이다. ‘커미셔너’나 ‘큐레이터’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하고 평론가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시기의 전시 양상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아르코에서 기획한 ‘신세대 흐름’ 정기기획전에 참여한 양혜규 이불 함경아 공성훈 작가는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2000년대 기획전의 오프닝과 피날레 퍼포먼스 영상물은 별도 섹션을 만들어 상영한다.

유명 작가의 신작만큼 눈을 즐겁게 할 만한 구경거리는 많지 않다. 하지만 이 땅의 미술 전시가 어떤 세월을 지나 지금에 이르렀는지는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슬라이드 작품 자료를 환등기나 열람 설비 없이 비치한 것 등 보완해야 할 안이한 부분도 눈에 띈다. 02-760-4850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아르코미술관#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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