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클라시커 50 재판'…역사적 심판서 얻은 깨달음

  • 입력 2003년 6월 20일 17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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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은 반유대주의가 빚은 조작극으로 지식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렌 군사법정에서 독일 스파이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드레퓌스 대위(가운데 선 사람).사진제공 해냄
1894년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은 반유대주의가 빚은 조작극으로 지식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렌 군사법정에서 독일 스파이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드레퓌스 대위(가운데 선 사람).사진제공 해냄
◇클라시커 50 재판/마리 자겐슈나이더 지음 이온화 옮김/219쪽 1만5000원 해냄

최근 들어 이렇듯 다부지고 옹골찬 교양서적을 만난 것은 처음이다. 명쾌하고 예리한 문장, 인간의 존재와 그 삶에 대한 깊은 연민과 힘 있는 통찰을 보여주는 서술, 격조 있는 유머가 읽는 눈과 마음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인다.

거대한 산이 그 안에 갖가지 보석을 품고 있듯, 인류의 긴 역사 또한 그 안에 갖가지 형태의 옹이들을 지니고 있다. 그 옹이들의 모습과 본질을 분별하고 해석하는 작업이 곧 인간의 삶을 파악하는 방식이 되거니와, 법정 취재기자 경력을 지닌 독일의 언론인 마리 자겐슈나이더는 폭 넓고 치밀한 취재를 통해서 인류 역사 이래 지상에서 벌어졌던 ‘재판’이란 형태의 옹이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인간’을 말하고 ‘인류’에 대해 성찰한다.

이집트 왕들 무덤의 도굴꾼 재판, 잉카제국의 마지막 황제 아타우알파에 대한 스페인인들의 재판, 세일럼의 마녀재판, 독일의 빌헬름 황태자 길들이기 용이었던 카테 소위 재판, 사기꾼에게 무력하게 쾨페니크 시청을 점령당함으로써 독일을 움직이던 막강한 ‘군복의 힘’을 역설적으로 보여준 포크트 가짜 대위 사건, 동성애로 몰락한 오스카 와일드의 재판, 아우슈비츠 재판 등등.

저자는 핵심을 찌르는 명쾌한 서술로 유사 이래 지금껏 지상에서 벌어졌던 재판들 중에서 50가지를 골라내어 서술한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것은, ‘재판’ 그 자체라기보다는 ‘인간’이며 재판을 통해 구현된 ‘정의’라기보다는 그걸 통해서 인류가 얻은 ‘깨달음’이다. 그래서 그 시원시원하고도 깊이 있는 서술은 봄날의 연둣빛 나뭇잎처럼 생생한 윤기와 인간미로 넘친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과의 권력싸움에서 져서 재판을 받고 1587년에 처형된 메리 스튜어트 스코틀랜드 여왕의 경우 정치적으로 무능했던 그녀가 당당하고 장엄하게 참수형을 받아들였던 모습을 묘사한 뒤 저자는 이렇게 기록한다. “이 장면은 훗날 이런 말로 남았다. ‘스튜어트가의 사람들은 통치하는 법은 몰랐지만 죽는 법은 알고 있었다’라고….” 읽어가노라면 한 시대의 모습과 고통과 애환과 ‘성감대’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하고 절실하게 느껴지는 명문장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따지고 보면 이 책에 들어간 50가지 재판 사례는 저자가 골랐다기보다는 우리 인류가 고른 것이다. 사건들마다 그에 관해 이미 쓰인 저서나 제작된 영화들의 목록을 붙여 놓은 것이 보여주듯 각 사건은 이미 인류의 마음에 남아 널리 회자되고 있는 것들이었다. 저자는 현대판 음유시인처럼 그것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뛰어난 구도의 모자이크화로 엮어 놓음으로써 우리가 영위해 온 삶과 역사의 본질을 통렬하게 드러낸다.

저자는 서문에서 “법은 혼자 걷지 못한다”고 토로했다. 역사상 유명한 재판의 실체들을 넓고 깊게 섭렵하면서, 올바른 재판은 정의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성립되지 않음을 새삼 확인하고 나온 탄식이다. 큰 산이 큰 골짜기를 만든다더니 굴곡 많은 현대사를 겪은 독일의 지성계가 낳고 길러낸 열매로서의 장한 무게와 질량을 담고 있는 뛰어난 책이고 저자이다.

송우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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