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뒤 서독식 교육 쓰나미… 교사도 학생도 엄청난 혼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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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코리아 프로젝트 2년차/준비해야 하나 된다]
통일 독일, 통합교육 현장을 가다<上>동독출신 2인의 統獨교육 경험

《 탈북 청소년이 마음의 벽을 넘는 것은 제2의 탈북과 맞먹는다고 한다. 억양을 문제 삼는 남쪽 친구들에게 조선족 출신이라고 할 정도로 정착은 여전히 어렵다. 이대로라면 잠재적 ‘통일 1세대’인 남북 청소년의 통일 나침반이 방향을 잃을 수도 있다. 동아일보는 사회·정치적 배경은 다르지만 통합 교육을 선행해 온 독일, 미국, 이스라엘에서 시사점을 찾기로 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을 맞는 독일의 현주소가 그 첫 회다. 》
미래 열어줬다는 벨로 씨 “비록 외교관 직업 잃고 보험회사 다니지만, 아들에게는 넓은 세상에서 배울 기회 줘”
미래 열어줬다는 벨로 씨 “비록 외교관 직업 잃고 보험회사 다니지만, 아들에게는 넓은 세상에서 배울 기회 줘”
“서독의 교육모델이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왔다고 해야 할까요. 서독식 교육 내용을 그대로 담은 새 교과서는 받았는데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동독 선생님 그대로였어요. 학생들만큼 선생님들도 혼란스러워했죠. 결국 선생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도 생겨나곤 했어요.”

올해 여름 옛 동독 지역인 드레스덴 출신의 요하네스 슈템러 씨(35)를 만난 곳은 통일의 상징,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이 훤히 내다보이는 그의 사무실이었다. 하지만 그의 경험담은 독일 통일 과정을 성공적인 것으로만 보기엔 부족함이 많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 불도저식 통합 교육이 남긴 상처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통일 전 동독 학교에서는 선생님들만의 일종의 획일화된 단속 규율 같은 게 있었어요. 말썽을 부리는 학생이 있으면 ‘젊은 파이어니어 그룹’ 모임(예비 당원을 위한 활동조직으로 동독 공산당이 관할)에서 제외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식이였죠. 그건 곧 ‘왕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통독 후 그런 권한들은 없어졌고 선생님들은 어린 우리들보다 더 혼란스러워했죠.”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1990년 통일이 몰고 온 변화의 바람은 거셌다. 동독 공립학교 소속 교사 전원이 교사 자격을 새로 취득해야 했다. 당시 90%가량은 다시 교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산주의 이념 교육을 담당했던 교사들은 교단을 떠나야 했다.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설명하던 역사 수업도 종적을 감추었다.

그러나 객관적인 동독 현대사 또한 금기시됐다. 선생님들은 더이상 가르쳐주지 않았다. 모든 것은 어느새 서독식 커리큘럼 중심으로 재편됐다.

“내가 한때 속했던 국가에 대해 객관적으로 배우고 토론하는 기회조차 없었던 거죠. 하지만 한동안 서독의 모든 것이 곧 정답이라는 정서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동독 출신인 베를린자유대 올리버 바리슈 박사는 이를 두고 “당시 동독 교육의 장점을 함께 흡수해 통합 교육 시스템을 만드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통일 전 수학과 화학 등 이공계의 경우 동독 초등학생의 수준이 서독 중고교생과 맞먹을 만큼 상당히 높았고 관련 교육도 더 정교했다”며 “상호 장점을 보완해 정비하는 과정이 없었다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

○ 통일이 열어준 아들의 미래

충격 너무 컸다는 슈템러 씨 “서독 교과서에 동독 선생님… 너무 이질적… 서로의 장점 살리는 교육시스템 부족했죠”
충격 너무 컸다는 슈템러 씨 “서독 교과서에 동독 선생님… 너무 이질적… 서로의 장점 살리는 교육시스템 부족했죠”
스페인어와 프랑스어 등 3개 언어에 능통한 우베 벨로 씨(59)는 모스크바 국제관계대를 졸업한 뒤 1982년 외교부에 입부한 동독 시절 엘리트 외교관이었다.

1986년 주쿠바 동독대사관 근무 시절 쿠바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는 사석에서 “소련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그에게 말하곤 했다. 전혀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베를린 장벽 붕괴 소식을 전문으로 본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카스트로의 언급이 영향을 미쳤을까. 벨로 씨가 내린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독일 통일에 대한 분석만큼은 냉철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추진한 개혁개방 정책으로 동독은 민주화를 추진할 수 있었고 서독이 막강한 경제력을 앞세워 소련에 경제협력을 약속하면서 통일의 분위기도 무르익을 수 있었다는 게 벨로 씨의 평가였다.

“한반도 통일 역시 중국 등 주변국의 협력이나 교감 없이는 불가능할 겁니다. 25년 전 11월 그날 밤 베를린 장벽 붕괴가 옛 소련군의 진압과 유혈사태로 이어졌다면 과연 독일 통일이 가능했을까요?”

베를린 장벽 붕괴 후 2등서기관 승진을 마지막으로 그는 외교부를 떠났다. 다른 동독 외교관들처럼 서독 외교부에 흡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간단한 직업훈련만이 제공됐고 지금 그는 베를린에서 보험 중개인으로 일한다.

벨로 씨는 자신의 자녀에게는 통일이 보다 넓은 교육의 기회를 선물했다고 말했다. 미국 워싱턴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한 뒤 국제무대에서 일하는 그의 아들 알렉시스 씨에게 통일은 무한한 가능성을, 보다 넓은 세상에서의 교육 기회를 안겨 주었다.

성공적인 통일 교육에 대한 조언을 구하자 벨로 씨는 “북한 주민에게는 시장경제로의 유입이 얼마나 다르고 어려운 것인지 사전에 알릴 필요가 있고, 한국인에게는 통일에 대한 환상을 심기보다는 정확한 통일 비용부터 알리고 준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옆에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알렉시스 씨는 “동독 교육을 무조건 쓸모없는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 독일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알렉시스 씨는 “동독 시절 교사의 가정 방문 및 교습, 전국적인 국영 탁아소 운영 등이 최근 재조명받고 있다”며 “동독의 존재나 역사를 무조건 묻어버리기보다는 취할 것은 취하려는 노력이 뒤늦게 이뤄지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베를린=김정안 기자 jkim@donga.com
#서독#동독#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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