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Life]‘죽어라’ 솟구쳐 오른 잉어만 용이 된다 하니…

  • Array
  • 입력 2011년 11월 5일 03시 00분


코멘트

수능 D-5일… 시험 합격 염원한 옛그림 ‘약리도’의 메시지

중국의 민간연화 ‘이어도용문(왼쪽)’, 조선시대의 민화 ‘약리도(가운데)’, 프랑스 파리 기메동양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어변성룡도(오른쪽)’. 정병모 교수 제공
중국의 민간연화 ‘이어도용문(왼쪽)’, 조선시대의 민화 ‘약리도(가운데)’, 프랑스 파리 기메동양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어변성룡도(오른쪽)’. 정병모 교수 제공
360마리의 잉어가 중국 황허(黃河)를 거슬러 오르며 용문(龍門)으로 향한다. 용문은 황허 중류인 산시(山西) 성 허진(河津)에 있다. 이곳에 이를 즈음엔 그동안 알을 낳은 잉어들이 무리를 3600마리까지 늘려놓은 상태. 그러나 잉어들은 엄청난 급류 때문에 더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

이때 잉어 무리 가운데 가장 용감하고 신령스러운 한 마리가 거센 물살을 뚫고 약진하기 시작한다. 거센 꼬리짓을 거듭하던 잉어는 드디어 용문을 뚫고 지나간다. 그 순간, 몸 아래쪽에서 36장의 비늘이 거꾸로 돋고 잉어는 온몸을 흔들며 용으로 변한다. 어떠한 물건이라도 역린(逆鱗·거꾸로 선 비늘)에 한 번 닿기만 하면 산산이 부서져 버린다. 안타깝게 용문에 오르지 못한 잉어의 이마 위에는 흑점이 찍힌다. 이 점이 없어질 때까지는 다시 도전할 수도 없다. ‘재수(再修)’의 표식인 셈이다.

이것이 유명한 ‘등용문(登龍門)’의 고사다. 용문과 같은 좁은 문을 거쳐야만 출세할 수 있다는 우리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등용문 고사는 그림으로도 이어져 또 하나의 상징이 됐다. 잉어가 급류를 뚫고 도약해 용문을 지나 용으로 변신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약리도(躍鯉圖)’라 부른다. ‘어변성룡(魚變成龍)’ ‘어도용문(魚跳龍門)’ ‘등용문도(登龍門圖)’라고도 일컫는다. 힘차게 뛰어오르는 잉어, 용으로 변해가는 잉어의 이미지를 통해 선조들은 합격과 출세를 소망했다. 이 그림은 주로 사랑방의 장식용 그림으로 붙이거나, 과거를 앞둔 이에게 합격을 기원하며 선물로 주었다.

중국 약리도 vs 한국 약리도

중국의 약리도에는 등용문의 고사가 충실하게 표현돼 있다. 청대에 그려진 ‘이어도용문(鯉魚跳龍門·그림)’을 보면 용이 용문을 향해 솟구치는 모습이 나온다. 용문은 중국의 건물이나 마을의 입구에 세우는 패방(牌坊·위에 망대가 있고 문짝이 없는 대문 모양의 중국 특유의 건축물)의 모습이다. 패방은 지금도 차이나타운에 가면 입구에 일주문처럼 서 있다. 실제 이 설화의 본거지인 용문에는 강물만 넘실댈 뿐인데, 그림에서는 패방을 등장시켜 용문의 이미지를 실감나게 표현해 냈다.

한국의 ‘약리도(그림)’는 중국의 그것과 다르다. 우선 중국의 패방 같은 좁은 문이 없다. 그 대신 바다 위에서 붉게 타오르는 태양을 그려놓았다. 잉어가 붉은 태양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 용이 되는 모습으로 그린 것이다. 웅혼할 뿐만 아니라 옷깃을 여미게 할 만큼 경건하다. 우리에겐 패방이란 건물 자체가 낯설기도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좁은 문으로 ‘가능성’을 옥죄는 것 자체도 마땅치 않게 여겼던 듯싶다.

붉게 달아오른 태양은 겹겹이 물결 진 바다 위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 아래에는 햇살에 붉게 물든 잉어가 U자형으로 몸을 꺾으며 파도 위로 뛰어오르고 있다. 잉어가 태양의 기운을 한껏 받아들여 용으로 변신하기 직전의 장엄한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붉은 햇빛을 몸에 물들인 채 태양을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해 솟아오르는 잉어의 몸부림을 보면 태양을 가슴에 품고 출세의 의지를 드높이던 우리 조상들의 모습이 엿보인다.

19세기에 만들어진 청화진사백자 잉어형 연적. 정병모 교수 제공
19세기에 만들어진 청화진사백자 잉어형 연적. 정병모 교수 제공
어변성룡, 합격과 출세의 상징

1888년 프랑스의 인류학자 샤를 바라(1842∼1893)는 50일간 조선을 여행했다. 그는 당시 구입한 민화 및 민속품을 1891년 파리 기메동양박물관에 기증했다. 서울 광통교 아래 그림 파는 가게에서 구입한 것으로 보이는 민화들 중에는 ‘어변성룡도(그림)’도 포함돼 있다.

그런데 이 그림 속 잉어의 모습은 또 다르다. 물 위로 치솟는 잉어의 혀끝은 태양보다 여의주를 향해 있다. 태양을 품어 용이 된다는 어변성룡보다 여의주를 물면 용이 된다는 현실적인 인식이 앞선 작품이다. 여의주 위에는 태양이 떠 있지만, 앞의 작품 같은 위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태양은 멀리 있어 그 기운을 받기 힘드니 잉어는 가까운 여의주를 탐낸다. 여의주를 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힘들어 헉헉대면서도 출세를 포기하지 못하는 우리의 자화상을 떠올리게 한다.

한편 어변성룡의 이미지는 그림뿐만 아니라 도자기로도 만들어졌다. 일본 도쿄 일본민예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청화진사백자 잉어형 연적’에서도 잉어는 U자형으로 몸을 휘어 용문을 향해 도약한다. 배에는 물결무늬가 새겨져 있어 물 위로 튀어 올라오는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이 연적은 어변성룡이 지니는 상징성 때문에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학동이나 선비에게 적격이었다.

그러나 연적 속 잉어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새색시같이 수줍다. 형태도 투박하고 눈 아래 붉은색 홍조를 띤 모습이 수줍음을 더한다. 20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용이 되기 위해 애쓰는 서민들을 닮은 순박함이 연적의 곳곳에 서려 있다.

이제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며칠 남지 않았다. 수능뿐만 아니라 고된 삶 속에서는 늘 크고 작은 등용문이 우리를 기다린다. 지금 수험생들에겐 당장 눈앞의 여의주가 간절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이 아무리 절박해도 여의주 위에 붉은 기운을 내뿜는 태양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각박한 현실이 아니라 꿈과 이상 속에 있기 때문이다.

정병모 경주대 교수(문화재학) chongpm@gju.ac.kr  
▼급제를 꿈꿨던 옛 선비들의 징크스
게-낙지는 금기음식… 과거 전날 밤 합격주 마시기도

쌀알들이 모두 작은 용이 되어 나무 그릇에 가득 차 올랐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손수 방아를 찧어 밥을 지었다. 남편이 과거장에 갈 때 먹고 갈 새벽밥이었다. 곤궁한 살림에 이웃집에서 꾸어온 한 되가 못 되는 쌀이었다.

밥이 익어갈 때쯤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의 8촌 형님이었다. 남편은 밥상을 바깥채로 차려 보내라고 말했다. 그녀가 답했다.

“이 밥은 절대로 나눠 드시면 아니 되옵니다.”

남편이 그 까닭을 묻자 그녀는 지난밤 꿈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자 남편이 그녀를 책망했다.

“어떻게 밥을 나 혼자 먹고 형님을 굶기겠소? 만약 형님을 굶기고 나만 급제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천지신명도 필시 도와주지 않을 것이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상을 차려 내보냈다. 창틈으로 들여다보니 8촌 형님이 차려온 밥을 먹고 그 반 정도를 남편이 먹는 것이었다. 그러고 두 사람은 함께 과거 시험장에 들어갔다. 방이 나붙었는데, 두 사람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합격을 하려면 길몽(吉夢)을 꿔라?

기문총화(記聞叢話·조선시대 명사들의 일화 등을 모은 수필집)에 나오는 조선 영조 때의 문신 이덕중(李德重)의 이야기이다. 이 외에도 기문총화에는 길몽을 꾸고 과거 급제를 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대개 사람들이 과거에 급제할 때는 반드시 꿈에 조짐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는 이덕중 이야기의 서두처럼, 길몽은 지금처럼 과거 급제의 ‘상징’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유학자 황윤석(黃胤錫)은 ‘꿈에 도홍금포(桃紅錦袍·비단으로 만든 붉은색 도포나 두루마기)를 차려 입고 귀향하여 어머닐 뵈니 성악(聲樂)이 난만하고, 모친도 또한 성복을 입고 자리하셨다. 혹시 과거의 길조가 아닐까?’라는 구절을 자신의 일기에 남기기도 했다.

길조와 반대인 금기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지금의 미역국처럼 수험생들이 기피하던 음식이 있었다. 게와 낙지이다. 규장각 검서관을 지냈던 이덕무(李德懋)는 자신의 시문집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시험을 앞둔 유생들이 게와 낙지를 먹지 않는다고 적었다.

한자로 게는 ‘蟹(해)’로, ‘벌레 충()’ 위에 ‘풀어질 해(解)’가 놓여 있다. 그런데 이 ‘解(해)’자의 또 다른 뜻이 ‘떨어지다’이다. 또 시험에 떨어져 각자의 고향으로 뿔뿔이 흩어져 돌아가는 ‘해산(解散)’이라는 말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게를 먹지 않았다.

낙지는 시험에 떨어진다는 뜻의 ‘낙제(落第)’와 음이 같아 먹지 않았다. 당시에는 낙지를 흔히 ‘낙제(絡蹄)’라고 불렀다.

한편 엿은 조선시대에도 수험생들의 필수 지참물이었다. 선비들은 누구의 아내가 엿을 더 잘 만들었나를 가리기 위해 주막에서 엿치기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과거 보기 전날 밤에 마셨다는 술도 있다. 앵두잎 배잎 인진쑥이 들어간 잎새곡주다. 이 술을 마시면 머리가 맑아졌다고 한다.(허시명 ‘비주, 숨겨진 우리 술을 찾아서’)

현대의 ‘합격비방(秘方)’

20세기 들어서도 수험생들의 불안함은 다양한 합격비방으로 이어졌다. 자신이 태어난 연도에 발행된 10원짜리 동전을 지니는 것이 유행하기도 하고, 거울(시험을 잘 보라)이나 포크(잘 찍어라), 휴지(술술 잘 풀어라) 등이 수험생 선물 목록에 올라가기도 했다. 시험 볼 때까지 영화를 짝수 번 보면 안 된다는 ‘금기 사항’도 있었다. 여학생이 쓰던 방석을 깔고 앉아 시험을 보면 점수가 잘 나온다는 미신에 남학생들이 여학생 방석을 훔치기도 했다. 1990년대 후반에는 한 자동차의 엠블럼 중 ‘S’자를 갖고 있으면 서울대에 합격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입시철만 되면 전국적으로 손상된 엠블럼을 새로 붙이려는 차들이 줄을 서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2012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둔 요즘은 분위기가 예전보다 잠잠한 편이다. 학교에서 떡을 준비해 수험생들에게 나눠주고, 선물도 핫팩 무릎담요 전자시계 등 시험 볼 때 필요한 것들이 주를 이룬다고 한다.

(도움말=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