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공유하기
이문영 소설가는 오늘의 상황과 오버랩되는 역사 속 하루를 발굴해 시사점을 제시합니다.
기사 30
구독 56




![1624년 1월 22일 이괄의 난… 맹목적 변호의 끝은 몰락[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5/01/22/130915330.6.jpg)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인조반정의 핵심 인사였던 평안 병사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괄은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조정에서 그가 반역할 것이라는 의심을 하자 이에 반발해 진짜 반란을 일으켰다. 이보다 며칠 전 조정에는 이괄이 반…
![1135년 1월 4일 묘청의 난… 시기를 놓치면 일이 커진다[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5/01/01/130770013.4.jpg)
묘청은 고려시대 서경(西京·현 평양)의 승려였다. 승려로 풍수지리에 밝았는데, 자신의 희한한 술법을 선보이며 어린 왕 인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같은 서경 출신인 정지상도 묘청을 굳게 믿어 그의 오른팔로 활약했다. 전라도 출신의 문공인도 묘청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묘청은 서경이 큰 꽃…
![935년 12월 12일 통일신라 마지막 왕, 백성 살리려 내린 결단[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4/12/12/130625245.1.jpg)
신라의 멸망은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첫 위기는 자연 현상으로부터 왔다. 헌덕왕 때 여름에 눈이 올 정도로 기온이 떨어졌었고 이로부터 천연두라는 역병이 유행하며 사회를 피폐화시켰다. 이와 같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신라는 백성은 안중에도 없이 권력 다툼에만 골몰했다. 역병으로 지방이…
![1010년 11월 24일 정보 오판한 고려 강조, 거란군에 무너지다[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4/11/20/130468000.10.jpg)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가 고려의 킹메이커가 된 사연은 이러하다. 천추태후가 병약한 아들 목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는 정부(情夫)인 김치양과 고려를 말아먹는 중이었다. 목종은 궁여지책으로 절에 피신해 있던 왕순을 불러 왕위를 물려주기로 하고 강조를 불러 자신의 호위로 삼고자 했다. 그런데 …
![1443년 11월 1일 明과 日 사이 대의-실리 다 잡은 외교관 이예[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4/10/30/130324580.1.jpg)
세종 때 일이다. 쓰시마에 파견되었던 체찰사 이예(李藝)가 명나라 사람인 서성을 구출하여 데려왔다. 그는 중국 절강성의 군인으로 순찰을 나갔다가 왜구의 배를 만나 붙잡혔는데 1년 5개월을 잡혀 있었고 나이는 60세였다.이예가 쓰시마에 갔던 것은 1443년 6월에 제주를 침입한 왜구 때…
![1592년 10월 10일 끊어내야 할 때 과감히 끊어낸 진주대첩 리더십[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4/10/09/130184664.7.jpg)
임진왜란은 예상할 수 없었던 재앙 같은 전쟁이었다. 일본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나라 간에 원한이 쌓인 것도 없는데 15만 대군의 침입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일본은 참혹한 학살을 자행하며 조선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불어넣었다. 경상도 지방의 백성들은 산속으로 …
![668년 9월 21일 고구려, 형제의 분열로 멸망하다[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4/09/18/130054243.7.jpg)
수나라의 백만 대군을 무찌르고 당 태종의 거센 공격도 물리쳤던 고구려는 668년 9월 21일에 멸망했다. 평양성이 당나라에 함락되었다. 이적은 평양성을 한 달이나 포위 공격했다. 이때 신라 역시 군대를 동원해 공격에 나섰다. 신라군은 7월 16일 한성에서 출발했고, 평양 인근의 사천에…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 아닌 ‘한국강제병합’[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4/08/29/126737821.1.jpg)
1910년 8월 29일, 이미 나라로서 기능은 마비되고 숨만 쉬고 있던 대한제국은 일본에 강제 병합되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한국이 강제 병합된 조약 명칭을 ‘한일합방조약’이라는 이름으로 알지만, 이 조약에는 원래 이름이 없이 그냥 ‘조약’이라고만 되어 있었다. 합방이라는 말은 동등…
![기원전 6년 8월 백제와의 국경 정해진 마한… 온조왕 때 멸망했다는 건 낭설[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4/08/07/126398363.15.jpg)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기원전 6년) 8월에 이런 기록이 있다. “사신을 마한에 보내 천도를 고했다. 이로써 국경을 그어 정하니 북쪽은 패하에 이르고 남쪽은 웅천까지 하고 서쪽은 큰 바다에 닿으며 동쪽은 주양까지로 했다.” 백제 지배집단은 고구려에서 분리되어 남으로 내려왔…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의 경복궁 침탈, 언론 봉쇄로 진상 은폐[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4/07/17/125988361.1.jpg)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은 기습적으로 조선의 왕궁인 경복궁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이들은 동학농민군에 밀리던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자 이에 맞서 자국 공관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파병한 병력이었다. 명목은 그러했지만 청군의 파병 병력을 파악한 뒤에 그보다 많은 병력을…
![645년 6월 20일 당군 막아낸 안시성 전투, 성주는 ‘양만춘’이 아니다 [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4/06/27/125644374.1.jpg)
645년 3월 9일, 당 태종이 고구려에 선전포고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네 번 공격했으나 그 땅을 얻지 못했다. 이제 그 전사자의 원수를 갚고 고구려왕의 치욕을 갚아주고자 한다.” 고구려왕의 치욕이란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운 정변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당나라 군대는…
![1882년 6월 9일 임오군란, 호미로 막을 일 가래로도 못 막다[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4/06/05/125295802.14.jpg)
1882년 6월 9일, 임오군란이 발발했다. 보통 문제가 아닌 사건이었다. 군인들의 거사였다. 군인들에게 급료가 미지급된 것이 근본 원인이었다. 급료가 무려 13개월이나 지급되지 않고 있었다. 멀쩡한 나라라면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군란 발생 나흘 전, 한 달 치 급료를 쌀로 지급…
![1392년 5월 4일 정몽주 피살, 선죽교 ‘팩트 왜곡’의 전말[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4/05/16/124950632.1.jpg)
정몽주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라 불린다. 공민왕 9년(1360년)에 스물네 살의 나이로 장원급제해 정계에 등장했다. 공민왕 13년에 이성계의 여진족 정벌에 따라갔다. 이후 이성계와 동지가 됐다. 성리학에 해박하여 남들을 압도했다. 고려 말 대학자인 이색은 정몽주를 가리켜 ‘우리나라 성…
![1592년 4월 28일 탄금대 패전, 귀 막은 독선의 결과[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4/04/24/124637484.8.jpg)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불과 보름도 지나지 않아 일본군이 경상도를 장악했다. 북방에서 여진족을 상대로 명성을 날리던 장군 신립은 일본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남쪽으로 급파되었다. 신립은 조령이라는 천혜의 관문을 지키지 않고 적들이 소백산맥을 넘어오기를 기다려 탄금대 앞 벌판에 진을 치고 …
![1696년 4월 29일 “흉한 것이 나왔다”… 숙종을 진노하게 한 ‘파묘’[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24/04/03/124304248.8.jpg)
숙종 22년(1696년) 4월 29일, 장희빈의 아버지 묘에서 흉한 것이 나왔다는 상소를 연서역(서울 은평구)의 생원이 올렸다. 세자를 위협한 행위라는 상소였다. “우리 동궁의 혈맥도 그 무덤에 서로 이어졌으므로, 이번에 변을 일으킨 자는 틀림없이 국적이니, 여느 요사한 죄로 취급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