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내전을 질타한 ‘용감한 그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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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7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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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스스로 오지 않는다/레이마 그보위 지음·정미나 옮김
384쪽·1만8000원·비전과리더십

지난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라이베리아의 여성 평화인권운동가 레이마 그보위(리머 보위). 비전과리더십 제공
지난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라이베리아의 여성 평화인권운동가 레이마 그보위(리머 보위). 비전과리더십 제공
시작부터 불행한 결혼이었다. 유부남이던 상대방은 연애 시절부터 의심과 손찌검을 일삼았다. 이별을 결심했을 땐 이미 임신을 한 뒤였다. 결혼 생활은 가정폭력의 연속이었다. 섹스를 거부하면 어김없이 주먹이 날아왔다. 남편이 부인을 ‘멍청이’라고 부르니 멋모르는 아이들마저 엄마를 멍청이라고 불렀다. 아이들의 손을 붙들고 지옥 같은 시댁을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땐 빈털터리였다. 스물여섯 살이었던 레이마 그보위(리머 보위·40)는 세상을 등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전쟁이었다. 1990년 3월 라이베리아대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그보위는 의사가 되려는 꿈으로 들떠 있었다. 몇 달 뒤 찰스 테일러가 이끄는 무장 반군이 쳐들어오면서 14년에 걸친 라이베리아 내전이 이어졌다. 결국 학업을 중단하고 피비린내를 맡으며 피란길에 올랐다. 모든 게 쑥대밭이 된 난민촌에서 만난 사람이 전남편이었다. 싱글맘이 된 그보위는 밥벌이를 위해 우연히 사회복지사가 되었다가 여성 평화인권 운동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아프리카 여성 인권 운동에 헌신해 라이베리아 내전 종식에 일조한 공로로 지난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 드라마틱한 인생의 주인공이 자서전을 내놓았다. 역시 흑인 인권운동가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자서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처럼 커다란 감동을 기대하진 않는 게 좋다. 내전이 발발하기 직전부터 지금까지 20여 년간 걸어온 길을 그저 언니 누나처럼 차분히 들려준다. 서문에서 밝혔듯 이 책은 ‘전쟁 속에서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흰옷을 입고 분연히 일어났던 여자들의 이야기’다.

그는 기독교 단체의 트라우마 치유 및 화해 프로그램(THRP)에 참여해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우면서 자의식을 키워갔다. 집 안에 틀어박혀 신세를 한탄하던 데서 벗어나 평화를 위해 일하고픈 의욕도 커져갔다. 여성들로만 구성된 ‘평화건설여성네트워크(WIPNET)’가 창설되자 중추적 역할을 맡아 아프리카 여성들의 비폭력 투쟁을 이끌었다. 대표적 활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섹스 파업’. 남자들이 전쟁을 멈추도록 설득하려는 수단이었다. 섹스를 거부했다가 남편에게 맞아 멍이 든 채 시위장에 나오는 여자들도 있었다. 몇 달 동안 이어진 섹스 파업은 큰 효과를 보진 못했지만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아프리카 여성들의 자유와 평화에 대한 갈망을 널리 알릴 수 있었다.

마침내 2003년 라이베리아 내전은 끝났다. 하지만 시민들에게 남은 트라우마와 기반시설 파괴, 실업난 등 전쟁의 상흔은 여전하다. 저자가 라이베리아의 전후 복구를 지원하는 기관들에 하는 쓴소리를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이 기관들이 평화협상과 무장해제에만 거액을 쏟아 부을 뿐 가장 중요한 사회복지 문제는 놓치고 있다는 것. 저자는 “사회복지 지원 장치가 없었던 탓에 남자들이 전쟁을 시작했는지도 모른다”며 “남자들이 국경을 넘어 무장단체에 들어간 이유는 일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책의향기#인문사회#평화는 스스로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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