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동네]평론가 김윤식교수 고별 강연록 전문 -1

  • 입력 2001년 9월 13일 16시 59분


◆ 갈 수 있고, 가야할 길, 가버린길 - 어느 저능아의 심경 고백 1. 윤삼월에 태어난 어떤 아이 1968년 3월, 전임강사로 출발한 제가 이제 정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한 몸으로 두 세기를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장거리 경주의 완주를 한 셈이 아니겠습니까. 특정 종교가 아직 없는 저로서는 이렇게밖에 표현할 도리가 없군요. 이는 오로지 천지 신명의 도움이라고. 또한 돌이켜 보면 이토록 모자라고 서툰 저를 그래도 옆에서 도와주고 야단쳐주고 감싸주시기까지 한 선배, 동료, 후배들의 눈길이 아니었던들 결코 여기까지 이르지 못했을 터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제가 태어난 해는 1936년 음력 윤 3월 12일이었고, 곳은 경남 김해군 진영읍 사산리 132번지입니다. 손기정 선수가 올림픽 마라톤 신기록을 세운 바로 그해이지요. 윤삼월에 태어났기에 제 생일은 20년만에 한 번밖에 돌아오지 않거니와, 이로서 저는 당사주나 토정비결 기타 점치기 등에서 예외적 존재였으며, 또 그렇게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윤달이기에 잉여의 부분이라 자처했던 것이지요. 살아오면서 어려운 고비나 의외의 장면에 부딪힐 적마다 저는 속으로 가만히 뇌곤 했습니다. 이건 단지 잉여 부분이야라고. 그러면 고통도 기쁨도 헛것의 빛깔을 띄어 조금은 평온을 찾곤 했습니다. 한 농민의 장남으로 태어난 저는 둘째 누님(제가 태어났을 땐 큰 누님은 이미 시집가고 없었지요)의 뒤를 따라 산과 개울을 넘어 십 리길의 읍내 국민학교를 다녔으며, 해방을 맞고, 졸업을 하고 중학은 마산에서였습니다. 기차를 타고 겨우 도착한 그곳에서 처음으로 쪽빛 바다를 보았습니다. 제가 다닌 중학은 상업학교였기에 열심히 주산과 부기를 공부했고, 은행 취직이나 대학이라면 상과로 향해져 있었지요. 그러나 어쩐 일인지 저는 은행으로도 상과 대학으로도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도무지 잘 설명할 수 없는데, 문학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시, 소설 따위란 대체 무엇인가. 어째서 그것이 나를 매료시켰을까. 이 물음에 한동안 저는 자체분석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외로움이 그 하나. 제가 자란 곳은 마을에서도 떨어진 강가 포플러 숲이었지요. 낮이면 포플러 숲의 까마귀와 메뚜기, 뒤뜰 참새를 벗하며 그들의 언어에 친숙했지요. 밤이면 누님이 펼쳐놓은 교과서가 그 다른 하나. <아까이 도리고도리……> 등 뜻도 모르는 일본어 동요를 흉내내면서 갖가지 그림과 글자로 채워진 그 교과서들이란 그 자체가 세계로 향한 창이었던 셈. 또다른 하나는 제가 훗날 어른이 된 후 알아낸 것으로, 일제의 근대 교육의 지향 속에 놓인 신칸트학파의 이념이 그것. 후진국 독일의 철학을 도입한 일본 정신계 속엔 물질 경시, 문화 숭배 사상이 스며들었고, 이것이 문학, 예술 등에 대한 교육적 이념에 모종의 몫을 한 것으로 보였지요. 훗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미적 자율성이 그것이겠지요. 적절한 사례라 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제대(帝大) 출신의 유진오, 이효석, 그리고 김사량 등의, 문학하기에의 편향성도 이로써 조금은 설명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러한 자체 분석도 오늘의 이 마당에서 보면 별 도움도, 모종의 위안도 되지 못함을 저는 깨닫고 있습니다. 구약이나 희랍 고전에서는 예언자들이 등장, 태어나는 한 아이에 대해 그의 운명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장면을 대하면 저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받게 됩니다. 한 인간의 행로란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것. 신들도 이를 바꿀 수 없다는 것. 이 사실만큼 인간적인 것이 따로 있을까. 비로소 저마다의 고유한 죽음을 죽을 수조차 있으니까. 어느 별자리 아래 태어났고 그 별이 지켜주는 삶과 죽음이니까. 윤삼월에 태어난 이 아이는 이런 행운에서 아득히 벗어나 있지 않았던가. 2. 학문으로 나아간 길 문학을 하겠다고 혼자 결심했다면 응당 문과 대학을 택해야 했을 터이나 저는 이 점에서도 썩 둔감했습니다. 교사 생활을 하며 문학하기가 그것인데, 제딴엔, 직업과 이상의 동시적 전개 방식이었지요. 얄팍한 생각, 땅짚고 헤엄치기의 생각이라고나 할까. 문학하기가 그렇게 호락호락했을까. 좌우간 대학을 교원 양성 대학으로 하고, 국문학 전공으로 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대학에 들어와 보니, 대학이란 문학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학문(과학)하는 곳이 아니었겠습니까. 향가에 앞서 향찰식 표기법부터 시작해야 했고, 두시언해 초간본, 중간본의 표기법 차이 등에 대한 공부가 앞을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학문이란, 그러니까 객관적 논리의 세계 탐구이며 또 그 체계화인데, 문학의 경우 기껏해야 섬세하기 짝이 없는 작품을 단순한 몇 개의 논리로 환원시켜 보이는 것이었지요. 이른바 리얼리즘의 속성인 토대환원주의(土臺還元主義)가 그런 사례의 전형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당초의 제 목표인 글쓰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득할 뿐 어느 구석에도 발붙일 데란 없었지요. 아무도 수심(水深)을 가르쳐주지 않았기에 겁도 없이 청무밭인가 하고 날아간 초승달의 흰나비 꼴이었다고나 할까. 제 군번은 0007470입니다. 학보병인 까닭. 대학 2학년때 군으로 도망쳤다고 하면 적절할까요. 갓 수복된 3·8선 말뚝이 서있는 중부 전선 모사단 수색대대 배치더군요. 첫 휴가 때를 잊지 못합니다. 온통 눈으로 뒤덮인, 길조차 막힌 백색의 세계에서 인근 탱크부대 친구들의 도움으로 겨우 빠져 나와, 미아리 고개를 넘었을 때의 그 낯섦이라니. 붉은 벽돌집 색깔이 그럴 수 없이 낯설었지요. 더욱 아득한 것은 부모 계신 고향으로 가지 않고 학교로 직행했을 때였습니다. <자네, 휴가라서 왔는가?> 교수들도, 급우들도 이 한마디 뿐이 아니겠는가. 그도 그럴 것이 모두 자기 일상에 매달려 있었으니까. 고립무원이었다고나 할까요.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면접을 보시던 심악 선생께서 <자네 군복무 기간이 어째 이렇게 길었는가>고 물으셨습니다. 잠자코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군복을 벗고 복학하여 대학원에 적을 두게 되었을 땐 벌써 소설이나 시를 쓰겠다는 생각은 깡그리 떨쳐버린 뒤였지요. 학문을 해보겠다는 것, 학문이란 대학에서만 가능하다는 것, 문학의 과학이란 6·25를 마악 끝낸 이 판에선 뉴크리티시즘밖에 없다는 생각을 품었기에, 도서관에서 이들 서적읽기에 한동안 골몰했습니다. 당시의 동숭동 도서관 2층 열람실에는 계간지 『캐년 리뷰』, 『파르티잔 리뷰』, 『예일 리뷰』가 일 년치씩 묶여져 개가식으로 꽂혀 있었습니다. 어학 실력도 돌보지 않고 사전을 찾아가며, 그야말로 판독하고 베끼기를 일삼은 바 있습니다. 제가 이런저런 독서와 눈동냥, 귀동냥으로 얽어 본 느낌을 훗날 적은 것이 [뉴크리티시즘에 대하여](1969)입니다. 제 자신이 힘껏 이해한다고 한 한가지 결실이라고나 할까요. 지금 다시 보면, 혹은 전문가의 안목으로 보면 오해, 독단 투성이임엔 틀림없겠지요. 단지 마음 가난한 한 국문학도가 문학의 학문화가 무엇인가를 알아보고자 고민한 흔적입니다. 뉴크리티시즘이란 무엇일까. 지금도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만일 그것이 분석 비평의 일환이라면 정병욱 선생의 [쌍화점고](1962), [나의 침실로]를 분석한 송욱 교수의 [시와 지성](1955), [추천사], [행진곡] 등을 분석한 김종길 교수의 [의미와 음악](1966),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과 체홉의 [비탄]을 대비하여 분석한 유종호 교수의 [서구 소설과 한국 소설의 기법](1964) 등이 아마도 그러한 범주로 분류될 수 없을까. 매우 불행하게도 저는 이러한 분석 비평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선뜻 이런 공부로 나아갈 수 없었는데, 뉴크리티시즘을 낳게 한 역사적·사상적 배경을 조금 알게 된 것에 이 사정이 관련됩니다. 실상 그것은 최재서의 출세 논문인 [T. E. 흄의 비평적 사상](『思想』, 1934. 12, 日文)에서 촉발된 것이기도 합니다. 불연속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신고전주의가 기실은 반휴머니즘에 속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그것은 필경 파시즘에로 치닫는 것이 아닌가. 뉴크리티시즘이 미국 남부 벤드빌트 대학 중심의 『도피자』 그룹에 뿌리를 내렸다는 사실이 이로 보면 어찌 우연이랴. 남부 농본주의자들, 노예 해방을 철저히 거부하는 귀족주의적·보수주의적 세계관의 반영으로서 나타난 것이 뉴크리티시즘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New란 새로움이 아니라 인류사의 진행 방향에 역행하는 반동 사상이 아니었겠는가. 한 작품에는 절대적인 해석 하나만 있다는 것. 그것은 전문적 기능 보유자만이 독점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는 도도한 귀족주의야말로 뉴크리티시즘을 탄생, 존속, 발전시킨 원동력이며, 그 온상이 바로 대학 인문 과학이라는 성채가 아니었을까. 이러한 생각에 미치자 물론 제 공부의 깊이가 모자랐음에서 온 것이지만, 저는 뉴크리티시즘에 대한 회의가 뒤따랐을 뿐 아니라 그들의 자질이 제일 잘 드러나는 시 자체에 대해서도 흥미를 잃어갔던 것입니다. 제 석사논문이 [시의 구조적 특성](1962)이었지만 그런 작업을 계속할 생각이 엷어졌으며, 또한 이는 학문(과학)에 대한 흥미까지 엷게 하기에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제가 비평가로 문단에 나아가고,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1973)에로 몰두해 갔음은 이런 사정과 관련됩니다. 비평사 연구에서 제가 당황한 것이 카프의 존재였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근대 문학이라 할 때의 그 근대성의 핵심이라는 사실의 발견이야말로 지금껏 제 공부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근대란 무엇인가. 이런저런 규정 방식이 있을 수 있겠거니와, 그 무렵 제가 이해한 것은 그것이 인류사의 어떤 단계에 대한 명칭으로서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A) 국민국가(nation-state), 사회·경제적으로는 (B) 자본제 생산양식(mode of capitalist production)의 전개 단계가 그것입니다. 이를 인류사의 진행 방향이라 한다면, 따라서 보편성이라면, 지역에 따른 불균형 발전론이 문제될 터이며 이를 특수성이라 부르면 어떠할까. (C) 반제 투쟁, (D) 반봉건 투쟁 등이 이에 속할 터입니다. 한국 근대문학을 규정할 때 제가 적용한 도식이 여기 있었지요. 참으로 난감한 것은, 이 보편성과 특수성의 동시적 인식에 있었지요. 이 둘이 거의 절대 모순성으로 인식되어마지 않는 장면이 너무도 의식을 누르기 때문이었지요. 도남, 임화 등의 선학들의 고민도 이로써 조금 이해되었지요. 제가 세워본 <국어(국가어), 민족어, 토착어>, <인공어, 준인공어, 기호> 등의 범주 설정도 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혈의 누](1906)의 작가 국초는 일본식 표기체계에 기대었고, [표본실의 청개구리](1921)의 작가는 <彼는>이라고 망설임도 없이 적었으며, 춘원의 처녀작이 일어로 되어 있고, [오감도](1934)의 시인 역시 망설임도 없이 일어로 썼을까. 이러한 근대의 과제들이 카프 문학에서 십자포화를 맞고 있는 것처럼 제게 보여마지 않았습니다. 여기엔 한 시대의 인식적 지평에 대한 설명이 없을 수 없는데, 이른바 근대의 이해 지평에 놓인 헤겔주의가 그것입니다. 주인·노예의 변증법을 중핵으로 한 이 사상만큼 근대 및 인간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따로 있었을까. 그 직계 마르크스도 루카치도 이 점에서 일치된 것처럼 당시의 제겐 보였지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감격스러운 한 문장도 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할 길을 하늘의 별이 지도의 몫을 하는 시대는 복되도다."(루카치, 『소설의 이론』, 1916 서두) 하버드 옌칭 장학금으로 도쿄대(東京大)에 유학이랍시고 간 30대의 젊은 조교수인 제가 그 대학 정문 서점에서 이 책을 대하고 밤을 새워 읽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잠 안오는 밤이면 이 책을 펼쳐놓고 감회에 젖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무엇이 그토록 가슴 벅차게 했던 것일까. 회고컨대 그것은 <인류사>에 관련되었음이 아니었을까. 인류사의 진행과정의 한 단계인 근대(시민사회)에 대응되는 문학장르가 바로 소설(서사시)라는 것, 따라서 인류사의 근대가 지나면 소설도 당연히 소멸되어 다른 서사 양식으로 변한다는 것. 그러니까 과도기적 현상에 지니지 않는다는 것. 인류사, 이것만큼 매력적인 것이 달리 있었겠는가. 그런 공부라면 해볼 만하지 않겠는가. 인류사와 더불어 진행되는 근대에 대응되는 것이 소설 장르라는 이 대목만큼 매력적인 유혹이 달리 있었을까. 인류사라니! 문학 연구가 그대로 인류사의 진행 방향에 대한 과제라니! 근대도 과도기적인, 지나가는 단계라면 그에 대응된 소설도 같은 운명이라는 것, 탈근대에 오면 소설이 살아남을 이치가 없다는 것. 우리의 근대 문학이란 것도 이 근대의 개념 속에 있다는 것, 민족주의 계급주의가 십자포화 속에 놓인 것이 카프 문학이었다는 것, 그것이 이른바 보편·특수의 모순성으로 이루어진 역사(주의)였다는 것. 제가 쓴 첫 저술이며 학위 논문인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1973)는 자료 집성집이지만 이런 바탕 위에서 씌어진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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