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세상/이혜숙]‘융합과학’ 지원 시스템 만들자

  • 입력 2005년 3월 18일 18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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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미국 워싱턴에서 ‘미국과학진흥협회(AAAS)’ 연차대회가 열렸다. AAAS는 1848년에 창립돼 현재 12만여 명의 회원을 가진 세계 최대 과학단체. 지난해 2월 세계를 놀라게 한 서울대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 성과가 발표된 과학전문지 ‘사이언스’를 발간하는 곳이기도 하다.

올해 대회 주제는 ‘과학과 사회의 관계(Nexus of Science and Society)’. 셜리 잭슨 회장은 개막 강연에서 새로운 과학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 가기 위해 과학기술자뿐 아니라 인문사회 학자들과 정책 입안자, 그리고 교육학자들 간의 학제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근 난항을 겪고 있는 방사성폐기물처리장 용지 선정에서도 드러나듯 현대 과학기술에서 파생되는 문제점은 과학적 접근만으로는 해결하기가 어렵다. 방사성폐기물에 관한 정보가 국민에게 정확히 알려지고 정부의 장단기 계획이 제시된 가운데 전문가와 지역주민 간의 민주적인 토론이 진행돼야 한다. 이런 복합적인 해결 과정은 다양한 분야의 구성원들의 참여 속에 이뤄져야 한다. 잭슨 회장은 과학기술자들이 갈등과 불신의 현장에서 균형을 잡는 데 앞장서고 공공의 선을 위해 열정을 가지고 헌신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대회에서 받았던 또 하나의 강한 인상은 AAAS가 과학기술 간 융합을 적극적으로 고민하며 실천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학 물리학 화학 생명공학 등 제각각 발전돼 오던 과학 분야들을 융합해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는 게 목표다. 의사가 간암 환자를 치료하는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의사가 동일한 간암으로 판단한 10명의 환자에게 같은 약을 처방할 때 그 치료 효과는 때때로 다르게 나타난다. 사람마다 미세한 유전자의 차이가 있어 약에 대한 민감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래에는 개별 환자의 유전적 특성까지 고려한 ‘맞춤 의학’의 시대가 열릴 것으로 예견되고 있다.

이 맞춤 의학의 실현을 앞당길 수 있는 학문이 수리과학이다. 최근까지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하나의 종양은 1만5000개 정도로 기호화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종양 하나의 종류를 1만5000 차원의 수학적 공간에서 한 점으로 표시할 수 있다는 의미다. 만약 100개의 종양 샘플이 있다면 1만5000 차원의 공간에 100개의 점으로 표시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는 동일해 보이는 간암이라도 미래에는 훨씬 세밀한 진단과 처방이 내려질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수리과학과 생명공학이 융합돼야 하는 이유다.

과학기술에 대한 이와 같은 학제적 융합적 접근은 아직 한국에서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국내의 각종 학술회의는 특정 전문 분야만의 학술연구 발표로 진행되고 있다. 또 융합과학시대에 대비할 만한 인재 교육 프로그램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무엇보다 민간 차원에서 AAAS와 같은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주체가 설정돼야 한다. 이를 위해 국내에서 과학기술 관련 전문학회가 대부분 가입된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의 역할과 기능을 보완하고 확대하는 것은 어떨까. 현재의 학회 지원 수준을 넘어 학회들 간의 수평적인 협력 체제를 만들면 융합과학이 좀 더 빨리 실현될 수 있다. 또 과학기술자 외의 다양한 개인 회원을 대폭 확대해 우리 사회의 과학과 관련된 과제와 프로그램을 도출하고 해결책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이혜숙 이화여대 교수·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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