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교수, 한의학서 힌트얻어 25억짜리 기술개발

  • 입력 2004년 6월 1일 18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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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르기를 없애는 비방이 무엇입니까?”

“알레르기는 몸속에 남아도는 열이 밖으로 나와 피부염이 생기는 증상이지요. 열을 다스리는 약재로는 다래가 잘 쓰입니다.”

한의학을 다루는 TV 드라마의 한 장면이 아니다. 서양과학의 논리로 무장된 생명공학자와 동양의 전통 한의학자의 실제 대화 내용이다.

서울대 유전공학연구소 김선영 교수(사진)는 몇 년 전부터 전국의 내로라하는 한의학자와 생약학자 70여명을 만나 이런 ‘선문답’을 주고받았다. 이유는 한 가지. 신약으로 쓰일 부작용 없는 천연물질을 발굴하기 위해서다.

지난달 27일 김 교수팀은 바이오벤처회사 팬제노믹스와 공동으로 개발한 항알레르기 물질(PG102)을 미국 에피카스사에 210만달러(약 25억원)의 로열티를 받고 이전하는 계약식을 체결했다. PG102는 우리의 대표적인 야생과일인 다래에서 추출한 천연물. 한의학자들에게 ‘처방’을 받은 10가지 후보물질 가운데 하나였다.

이 밖에도 관절염에는 ‘풍습을 제거하는’ 12가지 생약 성분, 위장 질환에는 ‘차고 습한 기운이 위에 고여 있는 것을 제거하는’ 13가지 생약 성분, 그리고 면역기능이 떨어졌을 때는 ‘음기를 도와주는’ 버섯류가 선택됐다.

김 교수팀은 최근 이들 물질을 분리해냈다. 이 물질들의 효능에 관여하는 인체 유전자를 알아내는 데도 성공했다.

“현대 과학에서 알레르기는 몸의 면역체계 일부가 과도하게 작동한 결과라고 보죠. 이에 비해 한의학은 기(氣) 열(熱) 풍(風) 습(濕) 등의 추상적인 용어로 질환의 원인을 표현해요.”

서양과학을 전공한 사람에게 생소하기 짝이 없는 이런 설명이 유용한 이유는 신약물질을 남보다 빠르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해답’을 알고 물질을 찾아가는 방식이어서 ‘역생물학(reverse biology)’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기존의 신약개발 과정, 즉 수천 가지 후보물질에서 출발해 최종적으로 하나를 선택한 뒤 약효를 검사하는 것과 반대라는 의미다.

물론 한의학자들의 말 속에서 옥석을 가리는 일이 가장 힘들다. 예를 들면 한약은 서양 의학적으로 안전성을 입증한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에 독성검사를 집중적으로 실시하거나 주변에 흔한 식용물질에서 답을 찾고 있다. 팬제노믹스 연구소장 진미림 박사는 “까다로운 과정이긴 하지만 선조의 지혜를 통해 부작용 없는 천연물질을 찾을 수 있어 보람이 크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엉뚱하게도 국사학자와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고서들이 쌓여 있는 서울대 규장각에서 임금에게 처방한 내용이 담긴 ‘의서’를 분석하는 작업이다. 왜 하필이면 임금일까.

“현대인과 비슷한 질환을 앓았을 것이기 때문이죠. 운동이 부족하고 스트레스가 많은 것이 왕의 업무잖아요. 특히 청일전쟁이니 아관파천이니 해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던 조선시대 고종의 ‘의료일지’가 완벽히 보존돼 있어요. 이를 참조하면 현대인의 정신질환용 신약 개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김훈기 동아사이언스기자 wolf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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