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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족 중 누군가가 죽음을 맞은 방은 다시 사용하지 않는다는 어느 고장의 관습에 대해 생각한다. 그곳에선 방 안의 모든 것이 죽는 당시의 상태 그대로 보존되고 아무도 그 방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아마도 한 세대 정도가 지나면, 그 집이 아무리 넓어도 살아남은 사람
처음 본 순간 “우아” 하는 감탄이 흘러나왔다. 한눈에 모두 담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책들. 문득 시골에서 봤던 은하수가 떠올랐다. 그 밤, 평상에 누워 바라본 검은 하늘엔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별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책도 그 별들처럼 아름답게 빛날 수
서울지도를 보면 드는 의문 중 하나. 왜 동대문은 동대문구에 없고, 서대문구에는 서대문이 없는 걸까?동대문은 현재 종로구에 있다. 그 이유는 단순히 행정구역의 변천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명의 상징성과 현실의 차이는 짙은 아쉬움을 남긴다.그렇다면 서대문은 어디
어느 노래 가사처럼 ‘눈물처럼 후드득 지는 꽃’을 본 일이 있는가, 아니 그 ‘후드득 지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송창식의 ‘선운사’는 동백꽃에 대한 노래다. 하지만 동백의 그 처연한 낙화(落花)를 제대로 느끼려면 선운사보단 강진 백련사로 가라. 고창 선운사에
조선의 수도 한양(漢陽)은 성곽 도시였다. 하지만 그 이름이 경성(京城)과 서울로 바뀌면서 성곽도시의 면모는 거의 사라져버렸다. 도시의 성장이 주요 원인이었다. 성벽은 적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쌓는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건국과 동시에 많은 인력을 동원해 무리하
외근을 마치고 돌아오던 오후, 화창한 초여름 하늘빛이 무척 아름다워 지하철 대신 버스에 올랐다. 다리를 건너기 훨씬 전부터 막히는 도로. 푸른 강을 바라보자 이미 마음은 강물 따라 먼 바다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문득 다리 위로 우뚝 솟은 카페가 보였다. 매일 지나면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은 경복궁 경내 너른 마당 한가운데 서 있다. 이 탑은 고려시대 석조예술 중의 최고 수준의 걸작으로 꼽힌다. 지광국사탑은 정확히 말하면 묘탑(墓塔)이다.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땅속에 봉안한 후에는 봉분을 올리지 않고 탑을 세운다. 이것이 바로 부도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당시 교황의 방한은 생방송으로 중계될 정도로 장안의 큰 관심사였다. 교황은 김포공항에 도착해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자마자 허리를 굽혀 땅에 입을 맞췄다. ‘순교자의 땅’이란 말을 연방 되풀이하면서. 깊은 인
인사동에서 점심을 먹게 되면 종종 운현궁으로 발길을 옮긴다. 운현궁 입장료가 그리 비싸지는 않다. 하지만 점심시간에는 무료로 개방되는지라 전혀 부담 없이 쉬어 갈 수 있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인사동의 소란스러움은 솟을대문을 지나면서 이내 고요해진다. 운현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