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남정우, 인생을 바꾼 ‘침묵’ 인생을 건 ‘사일런스’

  • 스포츠동아
  • 입력 2015년 2월 24일 06시 55분


배우 남정우. 사진제공|남정우
배우 남정우. 사진제공|남정우
■ 무명배우 남정우의 할리우드 진출기

스콜세지 감독 ‘사일런스’ 연출 소식
대만 로케 현장 찾아가 캐스팅 읍소
“시체나 행인이라도 좋다” 단역 따내

대학 연극반 때 원작 ‘침묵’ 첫 무대
“그때 내 전부를 걸고 배우의 길 결심”
같은 작품으로 할리우드 진출 ‘감격’


여기, 한 무명배우가 있다. 33살의 남정우. 자신의 이름을 알릴만한 작품도 없었다. 도움을 줄 소속사도 없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꿈꾸는 자에게 기회는 온다’고 했던가. 오로지 꿈을 향해 결코 단 한 번도 지치지 않고 내달린 끝에서 드디어 기회를 쟁취했다. 남정우가 할리우드의 거장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신작 ‘사일런스’에 출연한다. 무명의 한국 배우가 할리우드 영화, 그것도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거장의 작품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사실은 그 역할과 비중을 떠나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그러기까지 그 도전은 무모해 보였다. 24일 대만 타이베이 인근에서 첫 촬영에 나서는 남정우의 할리우드 도전기는 그래서 한 편의 영화와도 같다.

남정우가 연극 ‘침묵’을 처음 만난 스무살 때부터 지금까지 활동을 중국어로 적은 피켓을 들고 있다. 이 피켓을 든 채 보름 동안 매일 타이베이 인근 ‘사일런스’ 촬영장을 10시간씩 지켰다. 사진제공|남정우
남정우가 연극 ‘침묵’을 처음 만난 스무살 때부터 지금까지 활동을 중국어로 적은 피켓을 들고 있다. 이 피켓을 든 채 보름 동안 매일 타이베이 인근 ‘사일런스’ 촬영장을 10시간씩 지켰다. 사진제공|남정우

대학시절 “인생을 바꾼” 공연, ‘침묵’

스콜세지 감독의 ‘사일런스’ 연출 소식을 접한 2012년, 남정우는 자신의 프로필을 현지 영화사에 보냈다. 답이 없자 2013년 혈혈단신 미국 뉴욕으로 향했다. 무모했다. 도착 다음날 영화사를 찾아갔다. 빌딩 경비원이 막아섰다. “스콜세지 감독을 만나러 온 한국 배우”라는 설명은 통하지 않았다. ‘감독과 약속했느냐’는 질문만 받았다. 여러 경로로 제작진과 만남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가 이처럼 ‘사일런스’에 매달린 데는 이유가 있다. 대학(감리교신학대) 1학년 때 연극반에서 활동하던 남정우는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옮긴 연극으로 처음 무대에 섰다.

“4일간의 공연이 끝나고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가슴이 뜨거워졌다. ‘침묵’이 내 인생을 바꿨다. 그때, 내 전부를 걸고 배우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했다.”

‘사일런스’의 원작 역시 그의 가슴을 뜨겁게 한 ‘침묵’이다.

● ‘7전8기’의 도전…“포기는 없다”

군 복무를 마친 남정우는 2005년 대학로 극단 학전의 오디션에 합격했다. 이듬해부터 ‘지하철 1호선’으로 무대에 서며 직업배우로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몇 편의 연극과 영화에 출연했다. 그러는 동안 ‘침묵’이 남긴 강한 여운은 가슴 속에서 가시지 않았다. 2년 전, 뉴욕에서 당한 온갖 수모도 잊지 않고 있었다.

“알고 지낸 재미교포 캐스팅 디렉터부터 공연기획사 사장인 일본인 친구, 미국 방송작가를 통해 기회를 엿봤지만 쉽지 않았다. 막막한 마음에 김윤진 선배님의 소속사 사무실을 찾아가기도 했다. 문이 닫혀 있어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올해 1월 중순, 대만에서 ‘사일런스’ 촬영이 시작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1월28일 무작정 타이페이행 비행기에 올랐다. 일단 현장에 가면 방법이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도착 다음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현지 영화진흥위원회부터 찾았다. 역시 문전박대였다.

“눈물이 날 뻔했다. 한국에서도 영화 오디션 보려면 홈페이지에 적힌 주소만 믿고 영화사를 찾아다닌다. 지도 보며 이리저리 땀 흘리며 뛴다. 그렇게 프로필을 제출해도 기회는 드물게 온다. 그 짓을 먼 타국에서 똑같이 한다고 생각하니 서러움이 밀려왔다.”

막막하던 그때 우연히 촬영장 주소를 알게 됐다. 딱히 자신을 알릴 방법이 없던 그는 피켓을 떠올렸다. 촬영장 입구에 서서 ‘스콜세지 감독을 만나러 뉴욕과 한국을 거쳐 대만에 왔다’고 쓴 피켓을 들었다.

“부담과 걱정의 마음을 안고 소심하게 외국 스태프에게 피켓을 보여줬다. 위축된 내 모습에 스스로 ‘이럴 거면 왜 왔지’란 생각이 들더라. 그때부터 피켓 들고 어떻게든 눈에 띄려고 애썼다.”

그에게 먼저 관심을 보인 건 할리우드 제작진이 아닌 현지 로케를 돕는 대만 스태프였다. 남정우는 이들에게 자신의 사연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영어로 썼던 피켓 문구도 중국어로 바꿨다.

“내가 안쓰러웠는지 촬영장 앞 편의점 사장님은 따뜻한 물과 고구마를 줬고, 촬영장 경비원 아저씨는 소시지와 커피를 타줬다. 하하! 오가는 시민도 힘내라며 ‘짜요’를 외쳐주더라.”

약 보름이 지나자 그를 눈여겨 본 한 스태프가 ‘사일런스’ 단역배우를 모집하는 사무실 주소를 건넸다. “오디션 담당자가 이미 나를 알고 있었다. 매일 촬영장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본 거다. 2년 전 뉴욕에 갈 때부터 준비한 연기를 그제야 펼쳐 보였다. 이틀 뒤 함께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믿기지 않았다.”

● 아직은 단역…“시체나 얼굴 없는 행인 역도 좋다”

17세기 일본이 배경인 ‘사일런스’는 두 명의 선교사가 겪는 박해의 이야기를 그렸다. 할리우드 스타 리암 니슨과 앤드류 가필드가 주연을 맡았다. 우여곡절 끝에 참여하게 된 남정우의 배역은 ‘당연히’ 단역이다. 일본 마을 주민. 그래도 아쉬움은 없다. “시체라도, 얼굴도 보이지 않는 행인이라도 좋다”는 그에게 대사까지 있는 역할은 만족할 만한 성과다.

“아무래도 나를 불쌍하게 봐서 캐스팅한 것 같다. 강추위에 매일 같은 자리에 서서 기약 없이 감독을 기다리던 한국 무명배우에게 기회를 준 거다. 몇몇 스태프는 내가 피켓을 든 채 거리에서 잘까봐 걱정했다고 하더라. 하하!”

대학 1학년 때 ‘침묵’을 처음 접하고 13년 뒤 같은 작품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된 그는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왜 대만까지 와서 이 짓을 하는지, 이게 맞는 일인지. 그래도 돌아갈 순 없었다. ‘꺼지라’는 소리 들을 때까지 있을 작정이었다. 대만에 올 때 지닌 목표는 두 가지다. 스콜세지 감독을 만나고, 어떤 역할이든 맡겠다는 각오였다.”

타이페이의 한 호스텔에 장기투숙하며 촬영을 준비 중인 남정우는 스콜세지 감독과 만남에 대한 기대도 상당하다.

“처음엔 영화 출연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매일 10시간씩 기다리며 점점 감독님이 보고 싶어졌다. 누군가를 그토록 오래 기다려 본 적이 없다. 나중에 감독님이 수고했다고 포옹 한 번 해주면 바랄 게 없겠다.”

남정우는 ‘사일런스’에 참여해온 전 과정을 SNS로 알리고 있다. 사진과 영상까지 곁들인 그의 무한 도전기는 생생하고 흥미롭다. 그는 이 과정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 계획이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지만 기록으로 남긴다면 뒷날 누군가에게는 작은 자극이 되지 않을까.”

남정우는?

1982년생. 감리교신학대 신학과 졸업. 초중학생 때 배드민턴 선수로, 1993년 충북 대표 활약. 2006년 연극 ‘지하철 1호선’으로 데뷔. 2008년 연극 ‘명성황후’, 2010년 ‘이’ 등에 출연. 2012년부터 영화로 무대를 옮겨 ‘48미터’ ‘배드민턴’ 등에 단역으로 참여. 지난해 영화 ‘빅매치’에서 우형사 역을 연기.

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트위터@madeinha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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