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드 가입 상담” 요청에 투자성향 조사도 않고 “이걸로”

  • 입력 2009년 2월 5일 02시 55분


본보 경제부 기자 증권사-은행 창구 고객체험

《자본시장 규제를 완화하고 투자자 보호를 대폭 강화한 자본시장통합법이 4일 시행됐다. 이 법에 따라 앞으로 금융회사는 우선 고객의 투자성향 등급을 매기고, 성향에 맞지 않는 상품은 권유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시행 첫날 금융회사의 가입 창구에서는 직원들이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거나 절차를 모르는 등 준비가 안 된 모습이 곳곳에서 확인됐다. 펀드 가입에 길게는 1시간이 넘게 걸리자 일부 투자자는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이날 서울 종로와 서소문, 여의도, 강남, 관악 등지의 은행과 증권사 지점 창구 10곳에 가서 직접 펀드 가입 상담을 받았다.》

“이렇게 무작정 골라도 문제가 안생기냐” 질문에

상담직원 허둥지둥 설문지 내밀며 “대충 쓰세요”

회사마다 투자성향 등급 달라 담당자도 헷갈려

복잡해진 절차에 가입시간 1시간 넘기는 경우도

4일 서울 시내의 한국투자증권 지점 객장.

기자가 “펀드에 가입하고 싶어서 왔다”고 하자 상담직원은 펀드 가입 경험, 예상 투자기간 등을 잠시 묻고는 바로 펀드 추천에 들어갔다.

이 직원은 국내 및 해외 주식형펀드 10여 개의 수익률이 적힌 안내문을 내밀고는 펀드당 두세 문장씩 간단한 설명을 했다. 그러고는 “이 중에서 가입하고 싶은 상품을 고르면 된다”고 했다.

기자가 “객장 입구에 자통법이 시행된다고 써 있던데, 이렇게 골라도 문제가 없느냐”고 묻자 직원은 그제야 ‘투자자 정보 확인서’ 서류를 갖고 와 설문 답변을 부탁했다. “만약 내 성향이 원하는 펀드와 안 맞으면 가입을 못하는 것이냐”는 물음에 직원은 “질문에 대한 답변을 조금씩 (공격적으로) 바꿔서 하면 된다”고 했다.

○ 투자성향 조사는 요식행위

서울 도심의 대우증권 지점에서 “중국펀드에 가입하고 싶다”고 하자 직원은 투자자 정보 확인서를 건넸다.

1∼8번으로 구성된 문항 중 3번 ‘고객의 투자 경험과 가장 가까운 것은 무엇입니까’에 답하려 하자 직원은 “중국펀드에 가입하려면 ‘공격형 상품’으로 답변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자신의 투자성향을 스스로 평가하는 8번 질문에 기자가 ‘위험중립형’으로 표시하려 하자 직원은 다시 “적극투자형에 체크해야 한다. 아니면 결과가 잘못 나와 중국펀드에 가입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앞부분은 아무렇게나 쓰더라도 8번을 공격적으로 쓰면 점수가 높게 나온다”는 ‘조언’도 덧붙였다.

직원의 권유대로 응답한다면 투자성향 조사는 요식행위나 다름없게 된다.

판매사가 팔고 싶은 펀드, 또는 고객이 가입하고자 하는 펀드를 정해놓고 그에 맞춰 설문의 답변을 유도하는 광경은 이날 대부분의 은행과 증권사 판매 창구에서 목격됐다. 심지어 투자자가 상담직원과 ‘합의’하고 설문을 처음부터 다시 진행해 이미 결과가 나온 투자성향을 바꾸는 것도 가능했다.

주식계좌를 개설하기 위해 증권사를 찾은 회사원 나모(25) 씨는 “직원의 권유에 따라 설문 답변을 더 공격적으로 바꿔서 했다”며 “설문이 지나치게 형식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

○ 전산처리 허둥지둥, 등급기준도 제각각

외환은행의 한 지점에서는 전산 시스템의 오류로 도중에 펀드 상담이 중단되기도 했다. 직원은 “작성한 답안이 컴퓨터에 입력이 잘 되지 않는다”며 “전화번호를 남겨주면 점수를 내서 나중에 알려줄 테니 그때 다시 상담하자”고 했다.

두 시간 뒤 이 직원은 전화로 투자성향 등급을 알려주면서 “사내교육을 받았지만 첫날이라 우왕좌왕했다”며 거듭 “죄송하다”고 말했다.

취재팀은 이날 동일한 펀드상품으로 서로 다른 판매사에서 가입을 시도했는데 똑같은 펀드가 어떤 곳에서는 ‘고위험상품’으로, 또 다른 곳에선 ‘초고위험상품’으로 분류되는 상황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심지어 같은 금융회사 안에서도 기준이 제각각이라 상담직원조차 어떤 펀드가 어떤 등급에 해당하는지 명확히 숙지하지 못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온라인으로 가입하면 이런 절차를 생략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우리투자증권의 지점 직원은 “아직 그에 대한 규정은 회사 내부에서도 정해지지 않은 것 같다”면서 말끝을 흐렸다.

자주 파는 펀드가 아니면 상품 설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현상도 눈에 띄었다. 하나은행 지점을 방문한 투자자 이모(35) 씨는 “권유받은 펀드가 마음에 들지 않아 ‘○○펀드는 어떠냐?’고 물었더니 은행 직원이 당황하면서 업데이트된 지 1년이나 지난 상품 설명서 한 장만 달랑 줬다”고 말했다.

○ 펀드 가입, 최대 1시간 이상 걸려

비록 미숙한 부분이 많았지만 대다수 판매사는 고객에게 설문지를 작성케 하거나 투자성향보다 위험한 상품은 각서를 쓰게 하는 등 기본적인 원칙은 잘 지키고 있었다.

첫날인 만큼 상담직원들은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책상 위에 상담매뉴얼을 펴놓고 꼼꼼히 대조하는 직원도 많았다.

절차가 복잡해진 탓에 펀드 가입시간은 최소 30분 이상 소요됐고 1시간이 넘게 걸리기도 했다. 서소문로의 한 은행 상담직원은 “직원들 사이에서는 ‘사실상 펀드 팔지 말라는 소리’라며 불만이 많다”고 전했다.

투자자들은 ‘안전한 투자를 위해서’라는 대원칙에 공감하면서도 갑자기 까다로워진 투자절차에는 불만을 나타냈다.

대우증권의 한 지점을 방문한 60대 남성 투자자는 “투자성향을 파악한다고 직원이 설문지를 내밀었는데 글씨가 깨알 같고 무슨 소린지 몰라 답변하는 데 한참 걸렸다”며 “직원들이 빨리 익숙해져서 시간을 단축시켜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대우증권의 상담직원은 “한 달 전부터 동영상 강의와 사내교육을 받는 등 신경을 많이 썼다”며 “고객으로선 귀찮기는 하겠지만 자신의 자산을 지키기 위한 과정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지연 기자 chance@donga.com

이서현 기자 baltika7@donga.com

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

※ 이 기사의 취재에는 본보 대학생 인턴기자 이창혁(25·KAIST 수리과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