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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막한 공사장 가림막에 나무 그림자가 드리웠습니다. 하얀 바탕에 검은 그림자가 마치 한 폭의 수묵화 같네요.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대파 배달인가요? 데리러 오신 할머니 짐을 대신 옮기는 중이라네요. 킥보드 길이랑 딱 맞아서 일부러 장식한 것 같아요. ―경기 광명시 광명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이번주 백년 사진이 고른 사진은 1924년 9월 2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젊은 여성을 러시아에 팔았다는 인신매매범 남용석이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는 기사내용입니다. 이 사건은 당시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함께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여실히 드러낸 사례입니다.먼저 기사를 한번 보시죠. 북화태(北樺太)는 북사할린섬을 말합니다. 여자 매매의 악행 (1924.09.02)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자에게 끌려 눈보라 치는 북화태로 이미 팔린 여자가 4명아무리 먹고 입는 것에 백방으로 노력을 하는 인생이요 세상에는 죄악이 많이 행한다 하지마는, 우심(尤甚)한 것은 공공연하게 사람의 고기를 팔고 사는 악마의 계집 장사들이다. 이런 일이 비록 오늘에 새로이 생긴 일은 아니지마는 항상 현장에 팔려가는 불쌍한 여러 여성을 대할 때마다 현대 사회 제도의 결함을 절실히 느끼게 됨은 누구나 다 아는 바어니와 한 실례를 들건대, 본격을 함경남도 단천(端川)군 읍내에 두고 당시 북화태 (北樺太) 아항(호港: 편집자 주: 알렉산드라프스크)에서 소위 청부업 삼화조(請負業 三和組)라는 간판을 붙이고 한편으로는 그곳 서정(曙町)에 대복루(大福樓)라는 요리점을 두고 인육 시장(人肉市場)을 시설해 놓고 멀리 수륙 만리를 격한 고국으로부터 불쌍 한 어린 여성들을 이리저리 꾀어 사 들여다 놓고 그들의 피를 빨아 채우는 남용석(南龍錫)은, 지금으로부터 수일 전에 현금 5,000여원을 가지고 경성 시내에 들어와 북미장정 74번지 평양여관에 투숙하면서 각처로 몰려드는 뚜쟁이들과 연락을 취하여 가지고 사들인 계집이 벌써 4명이나 되는데, 그중에는 본적을 황해도 평산군 금천면에 두고 당시 구룡산에서 자기의 남편과 함께 어려운 살림을 하고 있던 신자금(申子今·20)이라 여자와 무교정에서 역시 구차한 살림을 하던 이옥순(李玉順)이라는 여자 2명은 모두 이제까지 집안 살림을 하다가 운명이 그만 뿐이든지 자기 남편과 최후로 이별을 하고 악마의 밥이 되었으며, 그 외에 2명은 대구부 달성정 233번지 김화원(金花園·19) 황해도 서흥군 서흥면 수파리 40번지 최익선(崔益善·19)이라는 두 여자인데 그들의 몸값은 최고 300원으로 최하 180원이며 팔려가는 기한은 4년 동안이라는데 그들은 멀지 아니하여 눈발이 날리고 찬 바람이 몸을 베이는 로령(露嶺) 북화태(北樺太)로 뜻 아닌 발길을 옮겨 놓을 터이며 남용석은 2주일 전에도 자기의 사무원 심주택(沈株澤)을 평양여관으로 내보내어 6명이나 사들여 갔으므로 지금 북화태에는 약 30여 명의 불쌍한 조선 여자가 악마의 밥이 되어 있는 중이며, 여관 주인 항봉찬(咸奉贊)도 여관 간판을 붙였으나 암밀(密)히 뚜쟁이 노릇을 하며 계집을 파고 사는데 구전(錢)으로 배를 채우는 모양이며, 사직동 225번지 방영자(方英子·20)라는 젊은 여자도 여학생으로 분장을 해가지고 그 집에 밤을 낮 삼아 드나들며 각처로 여자를 유인하여 들인다고 그 동리 부근 사람들은 비평이 자자한 모양인데, 아직도 앞으로 전기(前記) 남용석은 얼마나 많은 계집을 무역할는지. 그 집에는 뭇사람이 드나들며 수군거라는 모양이 매우 심상치 아니한 인신매매의 대 소굴인 모양이며 그 자는 서대문 경찰서 고등계에 호출을 받아 방금 취조를 받는 중이라더라.● 기사를 요약해보면, 함경남도 단천군 출신의 남용석이라는 인물이 조선 여성들을 속여 러시아 북화태(지금의 북사할린)로 팔아넘긴 인신매매 사건을 경찰이 수사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남용석은 경성의 평양여관을 거점으로 하여 4명의 여성을 매수했고, 그들은 각각 180원에서 300원의 몸값으로 4년 동안 팔려가게 되었으며, 남용석의 사무원도 6명의 여성을 추가로 매수해 러시아로 넘겼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경찰에 의해 조사 중이며, 여관 주인과 유학생으로 위장한 여성도 인신매매에 연루되었습니다.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남용석이 인신매매를 저지르면서도 사진을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사진을 찍지 않았던 것과 대조적으로, 남용석은 자신의 범죄를 알릴 수 있는 증거를 스스로 남겼다는 점에서 의문을 자아냅니다.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는 여성들을 상품처럼 여기고, 거래의 일환으로 사진을 찍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진을 통해 여성들의 외모를 잠재적 구매자들에게 보여주고, 이를 ‘광고’처럼 활용했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사진이 여성들을 협박하고 통제하기 위한 도구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진을 이용해 “도망갈 생각을 하지 마라”는 경고를 남기며 범죄를 은밀히 지속했을 수 있습니다.당시 조선 사회는 인권에 대한 개념이 크게 부족했으며, 여성들이 이러한 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구조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미흡했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잉어들이 놀던 수족관에 화려한 녀석이 나타났습니다. 관람객들의 인기를 차지한 빨간 물고기는 실은 로봇이라고 하네요. ―경기 광명시 광명동굴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일 서울 종로구 교보생명 빌딩에 광화문글판 가을편이 걸렸다. 윤동주 시인의 시 ‘자화상’에서 가져온 문안으로 고단한 현실에 처해 있더라도 더 나은 내일을 꿈꾸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를 갖자는 의미를 담았다. 올해 가을편 디자인은 추계예술대 홍산하 씨의 작품이 선정됐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924년 8월 27일자 동아일보 2면에 흥미로운 사진이 실렸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사진은 실제로 찍은 것이 아니라, 상상으로 그려낸 일러스트레이션입니다. 이 이미지를 처음 보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백년사진’ 코너를 진행하면서 이렇게 헛웃음이 나온 것은 처음이었는데, 본문을 현대의 언어로 번역하면서도 웃음이 나왔습니다. 함께 보시죠. 함께 실린 기사의 제목은 “과학으로 본 화성: 화성에 사는 사람은 우리와는 다르다고”입니다.◇화성에 동식물(動植物)이 있느냐. 있고 말고. 우리 사람보다도 더 진보 발달된 인류(人類)가 있다. 운하(運河)인 듯한 검은 줄이 화성면에 일백 팔십여개나 보인다. 강렬한 전기(電氣)로 지구에 통신길을 열라고 하는 형적이 있다 이렇게 떠드는 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운하라고 추측하는 검은 줄은 산맥인 것 같다고 하고 전기 통신은 『말코늬』의 시실 없는 말이라고 하여 화성에 인류가 산다는 것은 믿지 못할 말이라고 합니다. 화성에 공기 (空氣)나 수증기(水蒸氣) 있는 것은 학술상으로 증명이라도 할 수 있답니다. 그러나 동식물 중에도 인류가 있으리라고 말할 만한 확실한 증거는 아직 없습니다. 하여튼 화성에 인류 있다는 것은 한 의문(疑問)에 지나지 못하는 것인데 이번에 이 의문을 조금이라도 풀어보려고 장을 대는 사람이 많아서 『알프스』산『융그、푸라우』높은 봉에 올라가서 힘있는 전기로 통신을 해보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의문이 얼마나 이번에 풀릴는지 아직은 이 역시 의문입니다마는 화성이란 별이 여러 가지 의미로 보아서 우리 지구와 사이가 가까운 것은 사실입니다. 되둥대둥 적기 때문에 쓸 데 없이 지면만 허비하였습니다. 이것을 다 적고 나니 화성에 무선 전신으로 통신이 여기저기 왔다고 외국전보가 있으나 거연히 믿지 못할 일입니다. 사진은 화성에 사는 사람들의 사진입니다. 영국 문호 사진은 화성에 사는 사람들의 사진입니다. 영국문호『에취、지、웰스』가 화성에 사는 사람은 이러하리라고 한 것을 불란서 화가 『무류피아르』가 그린 것인데 거기 사는 사람은 이 땅에 사는 사람과 같이 생긴 것이 아니라 머리가 몹시 크고 눈이 무서웁게 생겼으며 다리가 뱀의 꼬리 같이 여러개가 있어서 다닐 때네는 공중으로 슬슬 떠나니가가 않으면 우리 땅의 사람처럼 밥을 먹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극히 자양될 것만 빨아 먹는데 소화기관(消化機關)은 없다 합니다. 언제든지 화성에 사는 사람과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한바탕 큰 싸움을 할 날이 있답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도 영악하지마는 그 별에 사는 사람은 아주 재주가 무섭다니까 그 놈들이 몰려와서 우리들의 피를 빨아 먹을 날이 있답니다. 그러나 이것은 소설이라 믿을 수는 없습니다. ● 영화 [우주전쟁]의 원작 소설에 나오는 화성인에 대한 묘사화성에 동식물이나 인류가 존재할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화성 표면에 보이는 검은 줄무늬가 운하일 것이라고 추측하며, 화성에서 지구로 전기 신호를 보내는 시도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기사와 함께 실린 그림은, 영국 작가 H.G. 웰스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프랑스 화가가 그린 것으로, 화성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와 전혀 다르게 생겼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H.G.웰스의 소설 [우주전쟁]은 2005년 스필버그 감독과 톰크루즈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집니다) 이들은 큰 머리, 무서운 눈, 뱀처럼 여러 개의 다리를 가진 모습을 하고 있으며, 공중을 떠다니며 영양분을 흡수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살아간다고 묘사됩니다. 또한, 언젠가 지구인과 화성인이 큰 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는 상상까지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소설적인 상상일 뿐,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기사는 설명하고 있습니다.이 일러스트레이션은 100년 전 인류가 화성에 대해 갖고 있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잘 보여주는 역사 자료입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화성 탐사선과 로버를 통해 실제 화성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이런 형태의 생명체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화성에서의 생명체 존재 가능성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100년 전 그려진 외계인 모습, 오늘날의 이미지와 얼마나 닮았나그런데 저 일러스트레이션을 보면서 우리가 지금 상상하고 있는 화성인(火星人) 또는 외계인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몸에 비해 큰 머리, 가느다란 팔다리는 분명히 인간과는 다른 외형을 갖고 있지만 둥근 머리와 눈과 입은 인간을 닮았습니다. 인간의 상상력이 그 때와 지금이 큰 차이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100년 전 누군가 처음 상상해서 표현한 외계인의 모습이 일종의 교과서처럼 인용된 것은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20세기 초 대중 매체에서 그려진 화성인의 모습이 오랫동안 대중의 인식에 각인되면서 이후 영화, TV 프로그램, 만화 등에서 이러한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외계인은 이런 모습이다라고 생각이 고착화된 가능성은 없을까요? 심리학에서도 말하는 초두효과(primacy effect)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 처음 접한 정보나 이미지가 그 다음번 인식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는 심리 현상 말입니다. 과학적 사실보다 문화적으로 전승된 이미지가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과학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과 대중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외계인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주세요. 감사합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벌들이 막바지 채밀에 한창이군요. 벌써 열매를 맺은 연도 보여요. 일벌들의 마음이 바쁘겠어요. ―경기 시흥시 관곡지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가게 유리문 낙서가 눈길을 사로잡네요. 눈은 심하게 처졌어도 활기 넘치는 사장님, 궁금해서 들어가 봐야겠는데요?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00년 전 가을을 기다리며: 당신의 마음에 남은 풍경은?신문에 실리는 사진 중에는 신문사에서 일하는 사진기자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서 찍는 사진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툭 찍는’ 사진도 있습니다. 치열한 현장을 오가거나 가족들과 여행을 떠났을 때 우연히 아름다운 장면을 만나면 카메라나 스마트폰을 들어 순간을 포착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설명을 붙여 신문에 게재하거나 인스타그램에 올립니다. 2024년 현재 기준 동아일보에는 포토에세이나 고양이눈이라는 사진칼럼이 그런 사진들이 활약할 수 있는 플랫폼입니다. 이번 주 백년 사진에서는 날씨 사진을 골라봤습니다. 100년 전 지난 주 신문에는 툭 찍은 듯한 사진이 꽤 많이 실렸습니다. 날씨 스케치 사진이 1주일에 무려 3장이나 실렸더라구요. 하루치 신문이 4면이나 6면에 불과하고 일주일치 사진이라고 해봐야 지면 전체를 통틀어 20장이 넘지 않는 상황에서 날씨 사진만 3장이 실린 것은 이례적입니다. 100년 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환절기에, 가을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도 많고 그걸 사진으로 보여주려던 기자들도 많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좀 더 높은 해상도로 사진이 보관되어 있었다면 더 생생한 장면을 여러분에게 소개시켜 드릴 수 있을텐데 그렇지 않아 아쉽습니다. 저화질의 사진이지만 여러분이 눈을 감고 상상해 보시면 훨씬 생생한 풍경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을까요?첫 번째 사진은 1924년 8월 18일 2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카메라 앞에 큰 나무가 무성한 잎을 늘어뜨린 채 서 있고 왼쪽 저 멀리 둥근 모양의 두 그루 나무가 원근감을 보여주며 작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앞에 자리 잡은 나무는 여름의 마지막 숨결을 담아낸 듯, 무성한 잎사귀를 가지 끝에 늘어뜨리고 있습니다. 그 위용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게 서 있는 반면, 멀리 시야 끝에 보이는 두 그루의 둥근 나무는 서서히 다가오는 가을의 첫 발자국을 암시하듯 작고 은은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화면 속에서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자연이 그리는 계절의 변화를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가까이의 무성함과 멀리의 잔잔함이 대비를 이루는 이 장면은, 여름의 뜨거움 속에서도 이미 찾아온 가을의 서늘한 기운을 감지하게 하며, 시간이 흘러감을 느끼게 하는 서정적인 풍경을 우리에게 선사합니다.두번째 사진은 1924일 8월 20일 사진입니다. 같은 계절에 파종을 했으니 실제로야 같은 크기로 서 있을테지만 사진에서는 역시 왼쪽의 수수는 아주 크고 오른쪽 세 개는 작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망원렌즈가 아니라 광각(wide) 렌즈로 촬영해 화면의 리듬감을 주려고 했을 겁니다. 왼편에 우뚝 서 있는 수수 이삭은 마치 여름의 잔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다가오는 가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 뒤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작은 수수들은 마치 겸손하게 가을을 기다리는 듯,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있습니다.광각 렌즈가 선사하는 이 독특한 시점 덕분에, 화면 속 풍경은 리듬감을 지닙니다. 마치 자연이 시간의 흐름을 춤추듯 표현하는 듯합니다. 가까운 수수는 자신감을 담아 당당하게 서 있지만, 멀리 보이는 수수들은 그 뒤를 조용히 따르며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습니다.이 사진 속에서 자연은 한 계절의 끝과 다른 계절의 시작을 함께 노래하고 있습니다.마지막 사진은 1924년 8월 23일 사진입니다. 지금도 서울의 상징 중 하나인 한강철교 부근 강변에서 여성 두 명이 산책하고 있습니다. 둥근 가로등이 구름 낀 하늘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저 하늘은 아마 붉은 파스텔톤이지 않았을까요? 둥근 가로등은 그들 곁에서 은은한 빛을 내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변치 않는 평화를 상징하듯 서 있습니다. 여인들의 모습은 이 순간의 고요함을 담아내며, 그저 이곳에서 잠시 멈추어 자연이 전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듯합니다. 가을로 넘어가는 저녁, 한강 위에 서린 여유로움과 평온함이 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습니다.소견이라는 표현은 지금은 신문사 기자들이 잘 안 쓰는 표현입니다. 소견(所見):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이라고 사전에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 장의 사진 모두 일반적인 사진과 달리 사진 설명이나 관련 기사가 따로 없습니다. 그냥 한 줄짜리 제목만 달려 있습니다. 무책임한 걸까요? 그것보다는 독자들 각자 가을 풍경을 만끽하면서 나름대로의 시상을 떠올리도록 넌지시 여백을 남겨 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오늘은 100년 전 무더운 여름이 끝나고 가을을 맞이하던 우리나라의 풍경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무엇이 보이시나요?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주세요. 진짜 이번 주만 지나면 가을이 오려나요. 폭염에 수고 많으셨습니다. 조금만 더 힘내시길 바랍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1일 오전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에서 2023학년도 후기 학위수여식을 마친 학생들이 학사모를 던지며 졸업을 자축하고 있다. 경희대는 학위수여식이 개최되는 21∼23일 서울캠퍼스 본관 분수대 앞과 국제캠퍼스 중앙도서관 앞에 졸업을 기념하는 학생과 학부모를 위한 포토존을 마련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1일 서울 종로구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열린 ‘마음이 고양고양’ 전시를 찾은 관람객들이 작품을 관람하고 있다. 이 전시에서는 신진 작가 6인이 고양이와의 특별한 인연을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한 작품과 이주희 작가의 그림책 ‘어떡하지?! 고양이’의 원화 등이 전시된다. 작가의 작품 외에도 시민들이 찍은 고양이 사진도 관람할 수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9일 오전 인천 서부경찰서에서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 전기차 화재 사건에 대한 3차 합동 감식이 진행됐다. 벤츠 기술진이 참관한 가운데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경찰, 소방 등 합동 감식반이 최초 화재가 시작된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 모듈을 조사하고 있다. 인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얼기설기 지은 집의 현관문이 보입니다. 어느 동네를 찍은 사진인 것 같습니다. 사진의 왼쪽 빈 공간에 ‘매월 1일과 15일은 파리 잡는 날’이라는 구호와 함께 파리 그림도 같이 넣은 포스터가 합성되어 있습니다. 무슨 사연인지 보겠습니다. 1924년 8월 11일자 동아일보 3면에 실린 ‘내 동리 명물’코너입니다. 1924년 6월 25일자부터 1924년 8월 15일자까지 동아일보 3면에는 2장의 사진이 매일 실립니다. 주로 서울 시내의 각 동마다 자랑거리 또는 특별한 이야기거리를 사진 한 장과 기사로 설명하는 기획기사가 50일간 연재되었었습니다. “사진기사 – 일백동정(一百洞町) 일백명물(一百名物)”이라는 코너였습니다. 100군데 이야기를 마친 코너는 8월 15일에 끝이 났습니다. 오늘 사진은 그 중 광희정(지금의 서울 중구의 한 지역)의 마을에 관한 입니다. 기사를 보시죠. 광희정 파리광희정 2정목292번지 윤기병광희정 사람 말이 내 동리 명물은 파리라 어느 집을 가보던지 사람의 집이라기 보담 파리의 집이라고 하는 것이 상당할 만큼 파리가 숱하게 많다고 합니다. 파리는 추한 곳에 많이 꾀이는 물건이니 파리를 명물로 내세우는 것은 동리가 추하다고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못된 바람 부는 곳에 무슨 좋은 명물이 차지가겠습니까?파리가 늦은 가을에 알을 배고 그대로 과동(過冬)을 한답니다. 봄 새 날이 따뜻하여지면 일백 45개 색기 파리를 낳는데 그 색기가 얼마 동안만 지내면 또 알을 배게 된답니다. 그래서 봄에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암파리 한 마리가 가을까지 가면 칠십구억사천백이십칠만 가량되는 파리의 조상 할미가 된답니다. 이 파리가 만일 잡히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몇 해 동안만 지내면 이 세상은 파리의 물건이 되고 말 것입니다.세계에 파리 만키로 제일 갈 만한 곳은 아마 압록강 건너 안동현인가 합니다. 안동현 거리를 지나가자면 거리의 먼지가 떼를 지어 날아갑니다. 이 먼지는 참말 먼지가 아니요 파리가 먼지를 뒤여 쓴 것입니다. 광희정 파리쯤은 아마 명함도 못 들일줄 압니다. 1924년 8월 11일자 동아일보광희정에 살고 있는 윤기병이라는 독자가 자기 동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특별한 자랑거리는 없고 파리가 득실되어 유명하다고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기 보다 오히려 파리가 사는 지역이라고 자기 동네를 비하하고 있습니다. 특정 지역이 더럽고 위생상태가 엉망이라고 지적하는 내용이니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동네 사람들에게 꽤나 욕을 먹었을 내용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보면, 파리가 많은 것은 단순한 불쾌감을 넘어서 전염병의 위험까지도 의미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지적은 단지 불평이 아니라, 지역 사회에 대한 건강과 안전에 대한 경고로 볼 수 있습니다. 정확한 근거는 없지만 필자는 가을에 암컷 파리 한 마리를 살려 놓으면 겨울을 지낸 후 45마리의 새끼를 까고 그 새끼들이 몇 세대 이어가면서 다음 해 가을이 되면 79억4천1백2십칠만 마리의 파리가 생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하급수적인 증가를 막아야 한다는 의미일겁니다. 여기서 파리의 번식력에 대한 경고는 단순히 과장된 숫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파리와 같은 해충이 어떻게 통제되지 않을 경우 빠르게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경고하고 있습니다.기사 말미에는 경성의 광희정보다 파리가 더 많은 곳은 중국 안동(지금의 중국 단둥) 지역이며 길을 걷다보면 먼지가 뿌옇게 보이는데 그게 실제로는 파리떼라면서 그 동네가 세계에서 파리가 제일 많은 곳이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 비교를 통해 필자는 경성의 위생 상태가 최악은 아니라는 위안을 찾으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지금 관리하지 않으면 거리 전체에 파리가 날아다니는 심각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100년 전 경성에서는 파리가 시민들의 안전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누군가의 노력으로 지금은 서울의 위생은 큰 변화와 발전을 했다는 것입니다. 동아일보 데이터베이스에서 ‘파리 잡는 날’을 검색해 보니 시대의 변화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우선 1928년 7월 11일 실린 아래 기사입니다. 조금 읽기 쉽게 바꿔서 정리해보았습니다. 휴지통이라는 칼럼은 2024년인 지금도 동아일보 지면에 있는, 기자들의 단상을 적는 칼럼입니다. 이 기사는 단순히 ‘파리 잡는 날’을 공지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당시의 위생 정책이 얼마나 형식적이었는지, 그리고 그런 정책이 실제로 효과를 거두었는지에 대한 회의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또한 일본식 조선어 사용이 조선인들에게 얼마나 어색하게 다가왔는지도 비판하고 있습니다.◇휴지통▲매월 10일과 25일은 “파리잡는날”이라고 파출소 앞과 큰 길거리에 고시판을 세우고 물뿌리는 자동차에까지 굉장한 광고판이 붙었다. ▲그것이 선전의 제일 비법일런지는 모르되 아마 모르긴 하겠지만 그런 광고를 써붙여야 파리를 잡으리라고 인정하는 위생과장인들 특별히 파리를 잡지는 않을 걸 ▲써붙이기만 하면 선전이 되나. 일본씩 조선말을 바로그럴 듯이 써놓기는 하였지만 일본말 모르는 조선인은 읽어도 뜻은 모를 말 뿐이니 신발명 일선융화(日鮮融化) 조선어란 말인가동아일보 1928년 7월 11일 ● 1960년대에는 서울시 차원에서 파리를 비롯한 유해 곤충 퇴치 활동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사가 있어 함께 소개합니다. 초등학교 학생 한 명당 1백 마리의 파리를 잡고 음식점 등은 가게당 5백 마리씩 파리를 잡자는 캠페인을 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시기의 기사는 서울시가 전염병 예방과 위생 개선을 위해 얼마나 적극적으로 노력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파리 한 마리의 위험성도 간과하지 않고, 도시 전체가 협력해 해충을 퇴치하려는 노력이 돋보입니다. 초등학생들까지 동원해 파리를 잡게 한 것은 단순한 방역 활동을 넘어, 어린이들에게 위생 교육을 심어주기 위한 사회적 운동이기도 했습니다.서울시는 1일 시내 불결지역 59개동(1만6천8백39가구7만7천4백70명)을 비롯、고지대빈민촌 28개동(8천5백49가구 3만9천7백20명) 난민정착지 7개동(1만1천8백79가구5만8천2백50명)을 전염병발생예상지구로 설정하고 춘계방역대책을 세웠다.서울시는 첫 달인 3월엔 유해곤충발생원을 제거하며 4월엔 위생업소종사자 20만명,전염병발생지역 주민 5만 명 등 25만 명을 상대로 장티푸스 등 전염병 보균자를 색출키로했다.서울시는 이를 위해 9개 기동반을 편성, 4월 한달 동안 시민28만6천명에게「콜레라」예방주사를 접종하고 72만명에겐 장티푸스, 15만3천9백명에겐 천연두 접종을 실시한다.서울시는 이밖에 국민학생 1백39개교 70만 명과 접객업소 1만7천업소를 상대로「파리잡기운동」을 벌이는데 초등학교 학생은 1인당 1갑(1백마리 기준), 접객업소는 5갑씩을 잡도록 권장키로 했다. 또한 영세민 10만가구에는 파리잡는「끈끈이」1장씩을 분배한다.서울시는 이밖에 파월병력과 기술요원의 교체 및 내왕이 많아짐에 따라「페스트」의 국내침입이 우려되므로 귀향인의가정을 일일이 방문, 개별적인 예방접종을 한다.1967년 3월 1일자 동아일보 석간 4면 기사● 1969년도에는 매주 토요일을 ‘파리 잡는 날’로 지정하고 범사회적인 퇴치 운동을 펼쳤습니다. 이 기사는 파리 박멸 운동이 일상화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당시의 시민들은 매주 토요일을 ‘파리 잡는 날’로 인식했을 정도로 이 운동이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1970년대 흔히 볼 수 있었던 연막소독차가 어떤 정책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지속적인 노력 덕분에 오늘날의 깨끗한 도시 환경이 가능해졌다는 점에서, 당시의 정책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1日부터 박멸 운동 – 접객소 단속, 변두리 소독서울시는 여름철위생에 대비해 6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4개월 간을 파리박멸운동기간으로 정하고 접객업소원 불결 지역을 중점적으로 단속하기로 했다. 서울시는 이 기간동안 매주 토요일 오후를 파리 잡는 날로 정해 변소 쓰레기통 하수구 등 불결한 곳은 반드시 뚜껑을 덮고 소독을 하며 접객업소는 끓인 물만 제공케할 방침이다. 이밖에 서울시는 파리가 자라나기 쉬운 불결지역 192개소와 하천 621개 소에 대해서는 월 1회 생선회 소독을 실시하고 변두리의 폭 4m 이상 도로에는 연막 소독을 실시한다. 1969년 5월 29일 동아일보● 1972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사설에도 파리 퇴치가 사회적으로 필요한 운동이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 사설은 파리와 모기 같은 해충이 단순히 불쾌감을 주는 것을 넘어서, 공공보건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에게까지 방역과 위생의 중요성을 교육하려는 노력이 오늘날의 안전한 환경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여름철에는 우리가정에서도 당국과 협력, 방역에 특별한 유의가 있어야 한다. 우선 모기가 숨어있을 수채나 정원수(庭園樹)등에 대한 청소와 방엮을 철저히 해야겠다. 여름철의 모기가 무섭다는 것은 말라리아를 비롯해 여러가지 병균을 전염시킬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모기와 더불어 파리잡기운동도 벌여야하겠다. 변소의 소독을 게을리 해서는 안되며 각 국민학교에서는 어린이들에게 파리의 무서움을 알리고 집에서 파리잡기운동을 벌이도록 했으면 한다. 병균을 뿌리고 다니는 파리를 잡는다는 점에서나 어린이들에게 위생과방역관념을 심어준다는 점에서나 장려할만한 일이라고 생각된다.1972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사설● 오늘은 100년 전 서울 중구의 한 마을에 파리가 많다는 것을 소개하는 사진에서 출발해 1970년대까지 이어졌던 ‘파리잡는 날’ 운동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과거의 노력이 오늘날 우리의 생활 환경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위생 운동의 중요성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매우 심각했던 문제가 현대에 이르러 해결된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인식 전환 덕분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토요일 아침 북한 노동신문은 44장의 김정은 사진을 북한 내부와 국제 사회를 향해 뿌렸습니다.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께서 8월 8일과 9일 평안북도 의주군 큰물(홍수)피해지역을 또다시 찾으시고 재해복구를 위한 중대조치들을 취해주셨다”는 내용을 증명하는 사진들입니다. 현대 사회의 정치인들은 시민을 만나고 재해 지역을 둘러보는 사진을 보여주고 싶어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만, 북한 김정은의 최근 사진은 ‘자극적’이거나 오버하는 모습이 눈에 많이 띕니다. 대체 북한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김정은과 참모들이 뭔가에 쫓기듯 과한 이미지를 쏟아내는 이 상황은 무얼 의미하는지 한번 생각해 볼 시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토요일 북한이 공개한 사진은 너무 현란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 북한 내부에서 외부 정보가 차단된 상황에서 사진을 본다면 김정은과 참모들이 의도했던 ‘애민(愛民)의 지도자’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겁니다. 사진의 배경은 크게 두 곳입니다. 하나는 열차를 세울 수 있는 철길 옆 공터입니다. 김정은의 전용 열차가 수해 물품을 싣고 와서 멈춰섰습니다. 두 번째 배경은 약 70개의 수재민 텐트가 설치된 어느 관공서 건물의 공터입니다. # 1호 열차 앞에서 선물을 받는 수재민 사진김정은 전용 열차의 한 칸이 즉석 연설무대로 변했습니다. 지상에서 1미터 가량 떠 있는 열차의 높이는 연단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인공기가 서 있고 연설용 포디움이 설치되었습니다. 스피커는 6개가 설치되었습니다. 천정에는 노란 불빛의 조명이 설치되어 주인공을 비추고 있습니다. 연단 아래에는 천여명의 주민들이 모여 김 위원장을 우러러 보며 박수를 치고 있습니다. 제일 앞줄에는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이 많이 배치되었습니다. 당국이 준비한, 우리로 따지면 관광버스를 타고 온 수재민들이 선물을 한 세트씩(과자류를 채운 종이박스 + 쌀로 추정되는 투명 비닐 봉지 + 대성백화점 쇼핑백)을 받은 후 공터에 앉아 김 위원장의 연설을 듣고 있습니다.# 텐트촌에서 김 위원장을 만나는 수재민 사진2층짜리 건물 2개가 ‘ㄱ’자 형식으로 서 있습니다. 담 안에 공터가 있고 거기에 노란색과 검정색 계통의 텐트 70개 정도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오와 열을 맞춰 당국이 수재민들을 위해 텐트를 설치하고 그 안에 선풍기와 TV 등을 넣어주었는데 이곳을 김 위원장이 찾아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김 위원장이 어느 텐트로 들어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갑자기 한 텐트 안으로 들어가자 안에 있던 어른들이 하늘을 향해 손뼉을 치며 울먹입니다. 어른들의 반응에 놀랐는지 안에 있던 아이들은 김 위원장이 건네주는 과자를 무표정하게 받아서 입에 넣습니다. 사진기자의 눈으로 보면 두 상황 모두 사진 찍기 좋은 환경입니다. 포토제닉합니다. 완벽한 무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사진을 보며 불편한 점이 있었습니다. 연설하는 김 위원장 왼쪽편으로 고급 승용차가 보입니다. 차번호가 휴전협정을 의미하는 727 1953 이길래 지난번 푸틴에게 받았다는 러시아제 아우르스인가 하고 봤더니 다른 모양입니다. 구글 이미지 검색 결과 이 차는 2024년식 벤츠 마이마흐 GLS600 이었습니다. 앞 범퍼에 마이바흐 문양이 반복되어 있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절대 권력자로서는 당연히 누릴 수 있는 호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북한의 인민들의 생활 수준과는 너무 큰 차이가 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 불편한 점은, 텐트촌의 환경입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텐트 행렬은 이재민을 상징하기에는 좋은 요소입니다만 여름철 폭염에 적절한 대응이 맞는지 의문입니다. 동영상을 보더라도 뒤편의 건물 두 동에서 창문 밖으로 김위원장의 방문 모습을 지켜보는 인기척이 없습니다. 수재민이 건물 안에도 있었다면 창문을 통해 손을 흔드는 게 북한의 퍼포먼스 공식에 맞을 것입니다. 공간이 없어서였는지 아니면 ‘그림을 만들기 위한 설정’ 때문에 야외에 텐트를 설치하고 김 위원장 일행을 기다린 것인지 궁금합니다. 2011년 방콕에서 수해가 났을 때 태국 정부가 텐트를 쳤던 사진이 있어 소개해 드립니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이런 방식으로 수재민을 대우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요?북한 내부와 국제 사회를 향해 ‘자극적인 화면’을 만드는데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가뜩이나 힘든 수재민을 동원한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1만5천명의 수재민을 평양으로 불러들여 보호하겠다는 김 위원장의 약속이 어떤 식으로 지켜질지 궁금합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고급 한옥과 카페거리로 유명한 서울 삼청동에 수영장이 있었다는 걸 아시나요? 100년 전 신문에서 삼청동에서 물놀이하는 사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시원한 물줄기 아래에서 한 소녀가 더위를 식히고 있습니다.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는 모습이 지금의 사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세련된 풍경입니다. 1924년 8월 8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이곳 주변은 나중에 수영장이 들어섭니다. 삼청동은 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많고 골짜기도 아름다워 옛날부터 인기가 많았습니다. 조선시대 학자 성현(1439~1504)은 [용재총화]에서 “서울 안에서 놀 만한 곳은 삼청동이 제일이다. 인왕동이 그 다음이고, 쌍계동 백운동 청학동이 또 그 다음이다”라며 서울의 첫번째 명소로 삼청동을 꼽았습니다. 이이 선생도 [율곡전서]에서 “돌 사이 샘물은 그윽한 곳에서 울음 우는 듯하고, 해질 무렵 구름은 깊은 골짜기에서 생겨나니, 이를 따라 도리어 산의 문을 잠그는 듯 하네”라며 삼청동을 표현했습니다. 그만큼 삼청동은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에게는 놀이와 감상의 대상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삼청동의 이미지는 일제 강점기에도 이어져서 각종 야유회가 열리고 자유연애를 하는 남녀의 데이트 코스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특히 삼청동을 가로지르는 삼청동천은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여름이면 쏟아져 내리는 물을 이용한 목욕장소이자 물놀이 장소였고, 겨울에는 얼어있는 삼청동천 위에 스케이트장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출처: 이경아, [경성의 주택지].) 삼청동 수영장의 역사를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소녀의 환한 웃음 사진과 달리 신문에 실린 삼청동 물놀이장 관련 뉴스는 어두운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신문이라는 게 아름다운 풍경보다는 사람들의 안전과 관련한 뉴스를 많이 다루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선 수영장 풍경부터 보시죠. 1922년 삼청동 계곡 모습입니다. 꽤나 넓은 곳에서 수영을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1924년 6월 30일자 동아일보에는 삼청동 계곡에서 목욕을 하던 12살 아이가 물에 빠져 사망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시내 인사동(仁寺洞) 29번지에 사는 윤보인(尹報仁)의 장남 순보(順甫) 열두살된 아이는 재작일 오후 세시경에 삼청동(三淸洞) 세균시험실 뒤에 있는 개천에서 여러 아이들과 목욕을 하다가 빠저 죽었다더라.자연 계곡에서만 물놀이를 할 수 있었던 삼청동에 사업가들이 수영장을 만든 것은 1930년대 초입니다. 위의 소녀 사진 이후 7년이 흐른 1931년 7월 19일자 기사(아래)를 보면 삼청동 계곡에 풀장을 만들겠다는 사업계획서를 제출한 사업가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부내 팔판동(八判洞) 김용계(金容偰)와 삼청동(三淸洞) 재등창장(齋藏倉藏)등의 15명은 산좋고 물맑은 삼청동 삼청천에『뻬비、풀』을 설치코저 얼마 전에 그의 원서를 경성부에 제출하얏든 바 부당국에서도 그를 시인하야 불일간 허가하리라한다그 설계의 내용을 보면 삼청동 삼청천의 지류(支流)를 막고 그 위에 저수지(貯水池) 2개소를만들어 수심(水深) 6척의 류영장(遊泳塲)을 만든다는 것이다이의 총면적은 1100 평으로 길이가 50미돌 넓이(幅)가 13미돌이라한다그런데 삼청동 계곡의 익사 사고는 풀장이 설치된 이후에도 가끔 발생했습니다. 1933년 6월 23일 기사입니다. 고등학생이 죽었다는 뉴스입니다.부내 중학동(中學洞) 23번지 미곡입자 함영열(咸英烈)의 둘째 아들인 제일고보교(第一高普校)1년생 함홍식(咸鴻植)(14)은 작 21일 오후3시경에 동무들로 더부러 부내 삼청동(三淸洞)수영장에 목욕을 나갓다가 잘못하야 물에 빠저 죽엇다 한다.같이 수영 나갓든 그의 동무는 제일고보교 3년생 윤건로(尹健老)(16)와 그의 아우 윤강로(尹强老)(14)등의 두 명으로 그들은 전기 함흥식과 목욕을 하다가 먼저 돌아왓다.그후 전기 함홍식은 물이 깊지도 아니한 곳에서 그만 빠저 죽은것인데 이를발견하기는 22일 오전 1시 10분경이라한다.그같이 늦게야 발견한 까닭은 그의 집에서도 늦게야 찾기 시작하고 종로서에서도 밤11시경에야 그의 입엇든 교복이 삼청동『풀』언덕에 잇다는 말을 듯고 출동한 까닭이라 한다.● 지금이야 삼청동으로 물놀이를 가는 경우가 없지만 삼청동 계곡은 한 때 군부대의 휴양시설로 사용되었습니다. 1987년 7월에 가로 7m, 세로2.5m, 최대 수심 2.7m의 군인 수영장이 준공되었습니다. 청와대 뒷산을 가로지르는 북악 스카이웨이가 민간인 출입 통제구역으로 관리되었던 시절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다 청와대 뒷길이 개방되면서 등산하는 시민들에게 보여주기 민망하여 영구 폐쇄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북악산(백악산)으로 올라가는 등산길 (삼청안내소를 지나 삼청휴게소로 가는 길)에는 군부대 수영장으로 쓰였던 시절의 콘크리트가 파란색 페인트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계곡을 복원하면서 일부러 남긴 건지 실수로 덜 치운 것인지는 알수 없습니다.● 시민들이 삼청동 계곡으로 수영을 다니는 것이 언제 끝났는지는 불분명합니다. 다만 1932년 한강 인도교에 큰 수영장이 개장하면서 인기가 좀 시들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1932년 7월 21일 기사입니다.한강 수영장, 비 개면 개장일찍이 경성부(京城府)가 공사중의 한강수영장은 공사가 완료되어 19일 오전 10시에 현장에서 관계자와 용산서 입회로 인계를 마친바로는 위험방지의 경계선 22본과 감시원임치, 다이빙대(飛込), 휴게실, 탈의장에 새로 남녀별 세면소를 설치하였다. 우기가 그치는 데로 곧 일반 부민의 수영장으로 개장할 터이라 한다.● 오늘은 100년 전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여름철 물놀이를 하고 있던 소녀의 사진을 통해 삼청동 물놀이장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삼청동 수영장에 대해 여러분의 추억이 있으시면 댓글로 남겨주세요.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철창 너머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건…. 시골 마을 자가펌프장의 계기판과 버튼이 마치 사람 얼굴처럼 보이네요.―경북 의성군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가파른 계단에 접이식 의자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작은 휴식을 선사하는 배려가 돋보이네요.―서울 성북구 369마을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지난 달 29일 국정원이 북한이 김주애를 현시점에서 유력한 후계자로 암시하며 후계자 수업을 진행 중이라고 밝힌 가운데 김주애가 아버지 김정은과 함께 군 관련 행사에 참석해 눈길을 끈다. 김주애는 5일자 북한 노동신문에 등장했다. 지난 5월 이후 80일 만에 처음 등장했다. 신형전술탄도미사일무기체계 인계인수기념식에서다. 김주애는 이전과 달리 드러내고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행사관계자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이다. 다른 인물에 몸이 가려진 채 다리 부분만 보이는 장면도 있다. 또한 노동신문의 1면 기사에서는 이름도 보이지 않아, 후계자로 지목된 것에 대한 부담감 때문 또는 수해로 민심이 좋지 않은 내부 상황에서 설득 과정을 로우 키이(low key)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가능하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돌담 빈 틈 사이로 작은 풀 하나가 솟아나 있습니다. 시멘트보다도 단단한 생명력에 햇살이 잎을 쓰다듬으며 격려합니다. ―서울 홍익대 앞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