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봇대에 붙어 있는 조그만 광고를 보자마자 무작정 찾아갔다. ‘극단 동인극장 연구생 구함’이라고 적힌 종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배우가 되겠다고 상경한 나는 그렇게 연극판에 뛰어들었다. 거기서 배우 김갑수 형을 만났다. 극장에서 기숙하면서 배우들의 양말을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이웃에 사는 친구들과 가재를 잡으러 뒷동산 계곡에 갔다. 초겨울에다 산중이라 추웠다. 손발이 시려오는 것을 참지 못해 주머니 속에 있던 성냥을 켜 모닥불을 피웠다. 그런데 모닥불이 바람에 날려 산으로 옮아붙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불을 껐지만
‘나를 있게 한 그 사람’이라는 글을 쓰려고 보니 무엇보다 매일 새벽 나와 우리 가족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시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아주 어릴 적 “우리 강아지가 박사네∼” 하시며 오늘의 나를 예견하신 외할머니, 갖은 구박과 놀림을 가장한 애정 표현으로 끊
‘아이는 부모의 등을 보며 자란다’는 말이 있다. 부모의 살아가는 모습이 가장 소중한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나 역시 훌륭한 어머니의 ‘등’을 보면서 자랐다. 어머니(차데레사·세례명)는 1910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열여섯 나이에 옥구군(현 군산시) 대야면으로
나의 인생에 길잡이가 되어 주고 나에게 운명적인 변화의 기회를 주었던 은인 중에서 한 분을 골라 그 이야기를 쓰려고 하니 많은 분이 떠올라서 어떤 분의 이야기를 써야 할까 고민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미국 유학 시절 나의 지도교수였던 세계적인 디자인 멘토
“엄마, 나 오늘 농구선수 됐어.” 서울 광희초등학교 5학년이던 나는 종례시간에 담임선생님이 “농구선수 할 사람 손을 들어라”고 말씀하자 서슴없이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던 내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그러고는 집에 돌
서울예고는 내가 음악가로 성장하는 토대를 마련해준 곳이다. 음악생도들과 나눈 대화, 미술과 학생의 그림으로 가득 찬 복도, 오케스트라 연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무용과 학생들의 ‘백조의 호수’ 공연…. 지휘과가 없어 작곡과로 들어간지라 지휘를 배울 수는 없었지만
시댁에서는 달마다 제사를 지내고 설과 추석에 따로 차례를 지냈다. 아버지가 목사인 기독교 집안에서, 응접실에 소파가 놓여 있고 서재가 따로 있는 서양식 집에서 자라난 내가 맏며느리가 돼 시댁의 한옥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시댁 분위기에 젖는 데 꽤 오랜 시간이
나의 은사이자 이젠 감히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로버트 라스뮤센 씨를 만나게 된 건 히피문화와 펑크아트의 발상지인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였다. 1993년 그리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불구하고 히피문화와 펑크아트에 매료돼 떠났던 타지에서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그
아홉 살 때 처음으로 연극을 봤던 생각이 난다. 부민관(현재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공연하던 극단 신협(국립극단의 전신)의 ‘원술랑’이었다. 신라 김유신 장군의 아들 원술랑 얘기다. 원술랑을 사모하는 소녀 진달래 역을 맡았던 배우 김선영의 청아하고 낭랑한 목소리,
하나의 인격체로 형성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누구인가 묻는다면 대부분 어머니를 들 것이다. 자식 걱정을 어머니만큼 하는 사람이 없고 그 심정은 자식의 품성 형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을 먹고
숨이 턱턱 막혔다. 어깨에 연탄을 짊어지고 달동네 좁은 골목을 힘겹게 오를 때면 배고픔은 차라리 사치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 나의 중학교 시절은 새까만 연탄 자국과 땀 냄새가 뒤섞인 암울한 회색빛이었다. 동생들을 위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천신만고 끝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이 모든 것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생각해 본다. 나를 있게 한 사람을 생각하면 스승님들이 떠오른다. 나는 세 분의 피아노 선생님께 배웠다.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뇌막염으로 서너 달 학교를 쉬어야
나에게 유전자를 물려준 아버지는 항상 극복의 대상이었다. 유능하고 잘생긴 변호사였던 그분은 언제나 호탕하셨다. 술도 많이 마시고 놀기도 잘하셨다. 글을 잘 쓰셨지만 결코 착실한 편은 아니어서 책은 한 권도 남기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당시 집안 망하는 첩경이라던 국
대구중 1학년 때 야구를 시작하면서부터 포수가 마음에 끌렸다. 마스크를 쓰고 앉아 소리를 지르며 수비진을 지휘하고 투수를 리드하는 게 멋있어 보였다. 무거운 장비를 착용하면 힘들 때도 있다. 섭씨 37도를 오르내리는 한여름에 경기를 치르면 몸무게가 2∼3kg이나 빠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