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리는 열차에서 몇 번 뛰어내리다 보면 저절로 요령을 익히게 된다. 열차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싶으면 사다리를 잡은 손에 힘을 준 채 한쪽 다리를 땅에 슬그머니 내려놓아 본다. 발바닥이 튕겨 나오면 아직 때가 아니다. 땅에 닿으면 앞구르기를 해야 한다. 충격을 다리로만…
《 엄마의 손가락은 더듬더듬 책가방의 지퍼를 찾아 내려갔다. 다섯 살배기 딸아이는 엄마를 지켜보다 가방을 넘겨받았다. 작은 손으로 능숙하게 가방을 열고 어린이집 체육복을 꺼냈다. 두 살배기 남동생 옷도 챙겼다. 아이는 자기 몸뚱이만 한 옷 뭉치를 들고 가 빨래통에 넣고 다시 엄마 곁으…
《 “숲 속에서 큰 나무가 쓰러졌는데 이 광경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면 나무는 과연 쓰러진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생각했다. ‘친엄마가 누군지 모르고 내가 태어나는 것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나는 정말 존재하는 것인가.’ 》 올해 내 생일을 4월 6일로 정했다. 석사학위…
촤악, 촤악. 콘크리트 부두에 부딪힌 파도가 하얗게 쪼개져 흩어졌다. 먼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냉기가 여전하다. 하지만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부둣가에 선 문중식 씨(70)는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했다. 밀...
《#1. “아저씨! 지금은 물이 너무 차요. 날 따뜻해지면 그때 오세요.” 초겨울비가 세차게 쏟아지던 2011년 11월 어느 날. 최인섭(가명·59) 씨는 걸어서 한강으로 향했다. 100세가 넘은 연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3개월 사이를 두고 돌아가신 이후 2년 가까이 정신을 놓고 살았…
《 1997년 7월. 너무도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기에 ‘죽음의 산’으로도 불리는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해발 8125m)를 오르고 내려오던 산악인 박정헌(42)은 7300m 설원지대를 걷고 있었다. 원래는 ‘벌거벗은 산’이라는 뜻을 지닌 이 산은 1937년 독일 원정대 16명 전원…
1960년 봄 전북 이리(현 익산)에서 경기 평택군 송탄면 서정리국민학교로 전학 온 열한 살 소년 이재형 군은 이렇게 ‘K-55’ 부대와 첫 인연을 맺었다. 소년은 다시는 부대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지만 운명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새콤달콤한 맛의 여운이 혀끝에서 맴돌던 …
조 씨는 4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집은 지독하게 어려웠다. 가난은 불운과 함께 찾아왔고, 불운은 전염병처럼 집안을 휩쓸었다.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적에 세상을 떠났다. 맏형은 스무 살이 되던 해,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다. 후유증이 심해 일을 하지 못했다. 둘째 형은 자살했다.…
#1. 8일(현지 시간) 미국 뉴저지 주 버겐 카운티 법원에선 미국 내 3번째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가 제막된다. 카운티 정부가 세우는 것이지만 한인 시민단체인 시민참여센터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제막식을 앞둔 김동석 시민참여센터 상임이사(56)에겐 한 가지 원칙이 있다. 미국에서 위안부…
4월의 나주는 배꽃향기가 짙다. 배나무가 들판을 가득 메운 전남 나주시 문평면의 작은 마을. 스물여섯의 여자는 바람에 흩어지는 배나무 꽃을 보고 ‘꼭 눈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에 오기 전, 눈은 영화에서만 봤다. 눈은 아름다웠지만 겨울바람은 매서웠다. 목도리로 얼굴을 싸매고 옷을…
도로 가는 길은 고달팠다. 14일 오후 6시 10분 도쿄(東京) 역에서 신칸센에 올라 오카야마(岡山) 역에서 일반열차로 갈아타고 돗토리(鳥取) 현 요나고(米子) 역에 도착하니 오후 11시 45분. 역 앞 호텔에서 잠을 잔 뒤 이튿날 아침 버스를 타고 시치루이(七類) 항구로 향했다. 오…
#. 프롤로그 한강 투신은 고통이 덜한 자살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목숨에 미련이 없어도 고통은 두려운 사람들이 이런 착각에 빠져 한강다리에 선다. 하지만 강은 품 안으로 뛰어드는 이들에게 더없이 가혹하다. 한껏 가속이 붙은 사람 몸이 물과 부딪힐 때 충격은 맨땅에 그대로 떨어지는 것…
2008년 12월 17일 종묘공원. 초겨울 마른 땅을 적시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과 종로지역 국회의원, 종로구청장 등이 한자리에 모였다. “셋, 둘, 하나, 제로” 카운트다운이 끝나자 오 시장 등이 일제히 버튼을 눌렀다. 폭죽 소리와 함께 현대상가에서 낡은 현판과 …
《 금요일 밤 서울 강남역 일대는 넥타이 부대로 붐볐다. 남자들은 이미 거나하게 취한 듯 갈 지(之)자 걸음을 이어갔다. 그는 그런 일행만 골라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엔 ‘강남 전 지역 픽업 가능’이란 문구와 함께 그의 이름 석 자가 크게 박혀 있었다. 유흥주점 광고지
《 2012년 12월 27일, 울산에는 보기 드물게 많은 눈이 내렸다. 평균 적설량이 6.7cm나 됐다. 오르막길인 중구 성안동 길은 새벽부터 차량 통행이 금지됐다. 성안동 오르막길 끝자락에 위치한 울산시장애인종합복지관(울산 중구 백양로 160)으로 가는 도로는 인적조차 드물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