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수학능력시험일 아침이다. 올해 수능을 보는 고3은 1998년생 ‘IMF둥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나라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태어난, 팔뚝만 했던 아이들이 어느덧 어엿한 18세 청년이 돼 수험장으로 간다. 그해 당시 한국은 나라가 통째로 망할 것 같은 위기감이 팽배…
11일 오전 7시 반 서울 강북의 한 일반고인 A고 정문. 대학수학능력시험을 한 달여 앞둔 가을 아침의 공기는 고3 학생의 마음만큼이나 스산했다. 교문을 들어서는 학생들의 얼굴은 모두 플라스틱 가면을 쓴 듯, 표정이 없고 푸석하다. 그런데 그 얼굴 중 하나에서 빨간 것이 흘러내린다. …
한 뼘 정도 열린 문틈 사이로 조그마한 눈동자가 요리조리 굴러가는 것을 알아챈 최경옥 씨(49·여)가 크게 손짓을 했다. 두 학생의 고사리 같은 손 위로 사탕과 초콜릿 한 움큼이 쏟아졌다. “수업 끝나면 다시 와. 선생님이랑 문제집 같이 풀어 보자.” 최 씨의 직함은 인천 동방초등학교…
보상금을 더 받아내는 소송을 하라는 권유도 뿌리쳤다. 자신이 하고 싶고, 또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러 돌아가고 싶었다. 그는 “내가 구한 심장마비 환자가 두 달 뒤 건강한 모습으로 치킨을 사들고 사무실로 찾아오는 것 같은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라고 했다. 현장을 뛰어다…
가슴 가득히 숨을 마시고 내뱉었다. 쉬이∼ 하는 기계 소리 없이 산소가 그대로 코를 거쳐 폐로, 그리고 온몸으로 쫙 퍼지는 게 느껴졌다. 믿기지 않았다. 눈을 감고 코끝과 콧구멍을 다시 만졌다. 나는 지난 4년여간 산소호흡기와 이를 연결해 준 콧줄 없이는 숨을 쉬지 못하는 중증폐손상 …
누가 직업을 물어보는 게 싫었습니다. 축구 선수라고 소개하면 자꾸 설명이 길어져서요. 30년 가까이 공 차는 것만 알고 살았는데 이상한 일이죠. 저는 2013년 K3리그(프로 4부 리그 격) 청주직지 FC에서 득점왕이 됐고, 지난해에는 화성 FC로 팀을 옮겨서 우승까지 했습니다.…
‘송도순, 김병기, 전유성….’ 그가 건넨 중앙대 연극영화과 동창회 수첩에 적힌 67학번 이름들이다. 송도순 씨는 성우로, 김병기 씨는 탤런트로, 전유성 씨는 개그맨으로 전공을 살려 활약했다. 수첩을 건넨 그의 이름도 적혀 있다. 김원배(67). 그의 직업란엔 전공과 어울리지 않게…
오랜만에 만난 얼굴들이었지만 웃을 수 없었다. “김 과장은 장인이 하는 꽃게잡이 배 타고 있대.” “이 대리는 금융회사 들어갔다고 하더라. 잘됐지.” 이런 대화들이 간간이 오갔지만 대부분은 아무 말이 없었다. 지난달 26일 오전. 서울 마포구 상암동 팬택 본사 대강당에 직원 수백…
“우리 아들 눈 좀 뽑아가 주세요. 제발….” 2010년 7월. 저녁 먹으러 가는 길에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방금 자식의 죽음을 확인한 A 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학 신입생인 A 씨의 아들이 전북 부안의 계곡에서 놀다가 숨진 채 발견됐다는 것. 사망한 지 4시간이 지났다…
‘개새끼’ 앞에서 막혔다. 박형서의 단편소설 ‘아르판’을 번역할 때다. “한국에 남겨두고 온 친구들 이름을 부르며 마을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개새끼처럼 뛰어다니기도 했다”란 문장을 마주했다. ‘개새끼’를 영어로 옮기려면 어떤 단어를 써야 할까. 그냥 dog(개)로 하자니 심심…
《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석가모니상 왼쪽에 새로 모신 약사여래불상을 가렸던 흰색 천이 내려지고 흰색 고깔이 벗겨지자 명안 스님(38)의 독경 소리가 빨라졌다. 양옆에 앉아 독경을 하던 무상 스님(36)과 덕성 스님…
“아기가 일찍 나올 수도 있겠어요. 스스로 숨을 쉴 수 있을지….” 두 손이 바르르 떨렸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눈칫밥을 먹어가며 얻은 둘째였다. 대기업에 다니는 ‘아빠 과장’이, 1년 동안 육아휴직을 하면서 아내와 첫째를 뒷바라지하고 얻은,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둘째였…
《 꿈과 행복은 당연히 잘 어울리는 한 쌍. 초중고교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에게 이 두 낱말과 잘 어울리는 또 다른 단어들을 고르라면 그중 하나는 아마 서울대일 것이다. 이렇게 꿈, 행복, 서울대를 한 묶음으로 만들고 나면 야구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서울대 입학이 아니라 …
《 사람 한 명 없는 도축장에선 수백 개의 허연 입김이 파란 하늘로 피어올랐다. 빛을 반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빛나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구슬처럼 둥글고 커다란 소들의 눈이었다. 우유 생산량이 많아 사랑받던 젖소 ‘순둥이’도 두 눈을 껌벅이며 도축장 안에서 ‘차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