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인가, 막 학교에서 돌아온 초등학교 3학년 조카가 결연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큰 이모, 나연이는 커서 꼭 평민이 될 거야.” 나는 오랜만에 듣는 ‘평민’이라는 단어에 잠깐 주춤하다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물어보았다. 학교에서 계급 사회에 대해 배우고 있는데 양반들은 나쁜 …
작업실 문 안쪽에 스케치북 사이즈만 한 코르크 보드 하나를 걸어두었다. 잊고 싶지 않은 글귀나 그때그때 필요한 메모들을 압정으로 고정시켜 놓고 작업실을 오갈 때마다 들여다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마감 날짜가 지난 원고 청탁서를 떼려다가 오랜만에 그 보드 앞에 멈춰 서서 벌써 수개월째 혹…
문학 계간지에 단편소설 마감을 앞두고 있다. 잠시 손을 놓고 딴생각에 빠져 본다. 학창시절 시험 기간에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시험 끝나고 나면 무엇을 하고 놀까? 신나게 계획을 세우던 때처럼. 그러고는 온갖 잡동사니들을 올려둔 피아노 위를 한번 흘긋 본다. 십오륙 년 전에 한 이…
미국 대선이 한창이다. 8년 전 이맘때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 머물고 있었다. 4개월 동안 살게 된 숙소에 도착해 보니 ‘가구’라는 것은 일절 없었고 화장실에도 두루마리 휴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학교 관계자와 당장 필요한 이불 매트리스 책상 의자를 사러 이케아로 달려갔다. 하룻밤…
태풍 피해 복구가 한창인 제주에서 며칠 머물게 되었다. 평생교육원에서 일을 마친 당일 저녁만 제외하고 거의 온종일 비가 오고 세차게 바람이 불었다. 늘 가방에 챙겨 갖고 다니는 삼단 우산으로는 턱도 없어 커다란 박쥐우산 같은 것을 하나 사야 하지 않을까 망설일 때는 또 잠깐씩 비가 그…
강의실 앞자리에 앉은 학생이 어느 날 나에게 왜 손수건을 두 개나 들고 다니는 거냐고 물었다. 출석부, 커피 텀블러, 물병, 손수건 두 개가 놓여 있는 교탁을 가리키면서. 동네 술집 창가 자리에서 에디터와 이야길 나누고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소식이 끊겼…
커피를 처음 마셔 본 게 언제였는지? 중학교 때 원예반 선생님은 우리가 고등학생이 되자 이따금 카페에 데리고 가셨다. ‘뜨락’이라는 데였는데 선생님 댁과 우리들의 집과도 멀지 않은 곳이었고, 알고 보니 우리 동네였다.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열일곱 살 때 그 카페에서 커피를 …
동네 소방서 옆에 여고가 있습니다. 산책할 때면 운동장이 있어서 그런지 교정에 들어가 국민체조 같은 걸 한번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 학교에서 근무한 선생님 한 분이 정년퇴직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선생님은 하루 평균 서너 통씩 학생들에게 편지를 써왔다고 합니다.…
벌써 열흘도 전부터 점심을 먹을 때면 어머니는 동네에 대목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배추 값이 얼마나 뛰었는지, 한 이야기를 하고 또 한다. 나는 차례 음식은 한 접시씩만 하고 요즘 구경도 하기 어렵다는 비싼 시금치 대신 부추를 데쳐서 상에 올리고 햇김치로는 열무김치를 …
저자가 일본 ‘문구왕’이라고 알려진 ‘궁극의 문구’라는 책은 개인적으로 내용보다는 목차가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이 책의 목차는 이를테면 ‘쓰다’ ‘붙이다’ ‘지우다’ ‘자르다’ ‘엮다’ ‘재다’ ‘정리하다’ 등 움직임을 나타내는 동사로 구분되어 있다. 목차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연…
너무나 뜨거웠던 여름을 보상해 주기라도 하듯 하루아침에 가을이 날아와 버린 느낌이다. 때라도 맞춘 듯 대학은 내일부터 2학기 수업을 시작한다. 강의 노트에 메모를 하고 구두를 닦고 커피를 담아 갖고 다니는 텀블러들을 세척하여 건조시키는 것으로 개강 준비를 한다. 그러나 마음은 아직 여…
동생들이 차례대로 결혼을 하게 돼 집을 떠날 때, 나와 자매들은 가족 앨범을 모두 꺼내놓고 사진들을 나눠가졌다. 독사진은 각자 챙기면 간단했지만 문제는 오래전에 찍은 가족사진들이었다. 각 사진에 대한 서로의 은근한 애착 때문에 사진을 나누는 데 시간이 꽤 걸렸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나…
한 주 동안 ‘굴드의 피아노’라는 책에 빠져 지냈다. 이 책은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사망한 후 캐나다 국립도서관에 그의 유품들이 도착하는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유품 중에는 그 유명한 ‘난쟁이 의자’도 있었다. 1953년에 아버지가 만들어준, 굴드가 ‘평생 애착(愛着)을 지녔던 물건’…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날 오후에 인사동에 갔다. 아는 이의 전시도 보고 오랜만에 인사동 길을 좀 걸어 다녀 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쏟아지는 햇볕 때문에 미술관에서 나오자마자 에어컨이 켜져 있을 카페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관광객들, 상점 앞의 사람들 틈에서 무언가 팔락거리고 있…
새 학기는 연필을 깎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형편이 어려웠던 시절이었을 텐데도 아버지는 연필이나 공책 같은 학용품만큼은 넉넉하게 사다 주곤 했다. 1970년대 후반이니까 아마도 낙타표 문화연필이나 동아연필이었을 텐데, 나한테 생의 첫 번째 연필은 사막에서 건설 일을 하던 아버지가 집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