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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족대표위원회(全韓族代表委員會)를 조직하여 해당 위원회의 명의로 독립을 선언하고 그리하여 신(新)국가 건설의 최고위원회를 작(作)함이로소이다. … 회집(會集) 지점은 상하이가 가장 적당한가 하나이다.” 15일 8·15광복 80주년을 앞두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고자 전한족대표위원회를 조직하자며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을 소집한 문건이 처음 확인됐다. 3·1운동을 약 한 달 앞둔 시점에 임정 구성의 첫 단추가 된 이 문건이 드러나며 독립운동사에서 큰 궁금증 중 하나였던 ‘독립지사들의 상하이 집결’ 이유가 밝혀졌단 평가가 나온다. 김도형 전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은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 총재 신규식(1879∼1922)이 1919년 2월 8일 미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도산 안창호(1878∼1938)에게 발송한 통첩(편지)을 대한인국민회 자료에서 확인했다”고 밝혔다. 총 7장인 편지는 그해 파리강화회의 개최를 맞아 “신속하고 완전한 전 한족(韓族)의 대동단결”과 함께 “불가불 3월 이내로 전족(全族)위원회가 성립돼야 할 것”이라 촉구하는 내용이 담겼다. 김 전 연구위원은 “신규식은 ‘신국가 건설의 최고위원회’를 ‘한민족을 대표하는 정치적 통일기관’으로 규정했다”며 “임시정부를 구성하자는 뜻”이라고 했다. 신규식은 “국내와 원동(遠東·극동) 각지의 각 단체에도 동지를 파견했다”고도 알렸다. 이 편지를 보낸 신규식은 상하이에 독립운동 터를 닦은 인물로 당대 독립운동가 가운데 도산과 함께 가장 영향력이 컸으며, 2·8독립선언 등의 막후로 꼽힌다.“新국가건설 최고위 만들자” 편지받은 도산 “대동단결 ”상하이行[광복 80주년] 상하이 임시정부 소집 문건 첫 확인1919년 2월 신규식이 안창호에 편지“全한민족 대표 조직해 상하이 모이자”… 安 “임시정부 조직했나” 전보 보내독립지사들 상하이 집결 배경 밝혀… “실제 임정수립 이어져 의미 남달라”새로 확인된 1919년 2월 독립운동 단체 대표 소집 문건은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이 대동단결해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제안을 담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신규식은 안창호에게 보낸 통첩(편지) 형식의 문건에서 ‘파리강화회의(1919년 1월∼1920년 6월)에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이 각자 대표를 보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명의와 실질 모두에서 한민족의 단일한 대표를 파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 질서를 논의하는 파리강화회의가 우리 민족 독립의 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적지 않았다.● 통첩 보낸 신규식, 비밀조직 ‘동제사’ 이끌어 해당 편지는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는 대표의 위상에 대한 제안을 넘어서 임정 수립까지 언급했다. 신규식은 행동의 ‘대강령’으로 “국내의 청년단(일본 유학생 포함)과 기독교 천도교 유림, 국외의 재미대한국민회 러시아고려민족대회 북간도 서간도 한족(韓族)대회 및 베이징 난징 상하이 등지에 있는 각 독립운동 단체가 각각 2, 3인의 대표자를 뽑아 일정한 지점에 회집(會集)하여 전한족대표위원회를 조직해 위원회의 명의로 독립을 선언하고 신(新)국가 건설의 최고위원회를 만든다”고 천명했다. 편지를 보낸 신규식은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 출신으로 국내외 독립운동을 연결하며 일본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과 3·1운동의 발발 등을 막후에서 조정한 거물이다. 이 편지에서 “원동 동포가 대표로 김규식 씨를 파견함을 보며 기쁘고 감사하다”고 한 부분은 다소 능청맞다. 동제사의 청년 그룹으로 하여금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도록 한 것이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동제사의 비밀스러운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 발견된 편지는 미주 대한인국민회에 보내진 것이지만, 신규식은 같은 편지를 국내와 서간도·북간도·노령의 주요 독립운동단체와 인사 대부분에게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편지에는 대동단결의 필요성을 알리며, 방침을 문의하기 위해 국내와 원동(遠東·극동) 지방의 각 단체와 뜻있는 개인에게 이미 동지를 파견했다는 내용도 담겼다.● “대동단결 선언에 필적하는 가치” 학계에선 이 문건이 1917년의 ‘대동단결 선언’에 필적하는 가치를 지닌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동단결 선언은 각지의 독립운동이 난관에 봉착한 상황에서 신규식을 필두로 박은식 신채호 박용만 조소앙 등 14명이 발기해 임정 수립을 위한 민족대회를 소집하자고 제의했던 선언이다. 하지만 실행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김희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장은 “이번에 확인된 통첩은 실제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고 했다. 아직 3·1운동 발발 이전이었지만, 통첩은 효과를 발했다. 편지에 따르면 “원동의 독립운동 단체 2, 3곳이 이런 방안에 이미 동의했고, 다른 단체들도 향응(響應)”하는 상황이었다. 도산도 기민하게 움직였다. 편지는 1919년 2월 중순경 미주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도형 전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에 따르면 대한인국민회는 2월 24일 임시위원회를 열어 “영구적 해외 한인의 대동단결을 위해 원동에 전권 대표자를 파견”하기로 의결했다. ‘중앙총기관’이 성립하면 대한인국민회는 중앙총회를 해산하고 그 산하에 들어간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도산은 3월 9일 상하이의 현순 목사로부터 국내에서 3·1운동이 발발했다는 전보를 받았다. 이에 도산은 현 목사에게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세계열강에 선언문을 보냈나?(Do organize provisional Government and send declaration to Powers of world?)”라고 묻는 전보를 보냈다. 도산이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구성될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도산은 3월 14일에 “대동단결을 찬성함”이란 전보를 신규식에게 보낸 뒤 상하이로 출발했다. 상하이 임정 구성에 참여한 인물 가운데 상당수가 이 통첩을 받고 움직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 전 연구위원은 “당시 적어도 베이징을 경유해 상하이에 도착한 이시영, 이동녕, 조완구, 김동삼 등은 이 통첩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 편지는 2000년대 미 로스앤젤레스(LA)의 대한인국민회총회관 복원공사 중 천장에서 발견된 문건 6300여 점 가운데 하나다. 이 문건 등은 독립기념관이 2011년과 이듬해 현장 조사를 했으며, 2019년 한국으로 대여돼 독립기념관이 소장해 왔다. 분량이 방대한 탓에 자료를 모두 검토한 김 전 연구위원에 의해 최근에야 편지의 중요성이 파악됐다. 편지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에 공개돼 있다. 신규식은 안창호에게 보낸 것과 동일한 내용의 편지를 하와이의 ‘국민보’와 박용만에게도 보냈고, 해당 편지는 미국 우편검열국이 입수해 영문 발췌 번역본으로 남았다. 번역본과 편지를 확인한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는 15일 출간 예정인 저서 ‘김규식과 그의 시대’에서 “초기 상해 임시정부 수립과 운영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유명 학원 문제집과 강의 영상 등 유료 학습 교재 1만6000여 건을 불법으로 유포해 온 국내 최대 학습교재 공유방 ‘유빈아카이브’가 12일 오전 폐쇄됐다. 문화체육관광부 저작권범죄과학수사대는 이날 “텔레그램 공유방 ‘유빈아카이브’를 폐쇄했으며, 지난달 23일 운영자 A 씨를 검거해 불구속 입건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해당 공유방 운영에 가담한 공범들에 대해서도 수사를 벌이고 있다. 수사대에 따르면 A 씨는 2023년 7월 유빈아카이브를 개설한 뒤 대형 학원 등의 유료 교재와 동영상 강의, 모의고사 자료 등 학습자료를 무단 복제해 대학수학능력시험과 변호사 시험 등의 수험생 약 33만 명에게 불법 공유한 혐의(저작권법 위반)를 받고 있다. 유빈아카이브는 가입자가 22만 명에 이를 만큼 수험생 사이에서는 유명한 텔레그램 채널이다. 교재를 구매한 학생들이 이를 스캔해 관리자에게 넘기면 이를 채널에서 공유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이에 적지 않은 이들이 자료의 무단 유포에 동참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입시학원들에 따르면 유빈아카이브에선 ‘일타 강사’의 자체 교재와 모의고사 자료, 온라인 강의 영상 등도 불법으로 유포된 것으로 알려졌다. 유명 강사들의 강의 파일이 PDF 형태로 무료로 공유돼, 학생들 사이에선 “교재는 유빈이가 구해준다”는 말이 퍼질 정도였다. 수사대에 따르면 A 씨는 유빈아카이브 운영이 사교육으로 인한 교육 불평등과 격차를 해소하는 의로운 행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고가의 학습자료는 이른바 ‘소수방’이라 부르는 유료 공유방을 따로 만들어 수익을 챙긴 것으로 확인됐다. 운영진은 단속을 피하기 위해 점조직 형태로 운영했으며, 잇달아 새로운 방을 만들기도 했다. 서울의 한 대형 입시학원 관계자는 “손해배상 청구를 위해 피해 금액을 집계 중”이라며 “이번 검거를 계기로 텔레그램 등을 이용한 불법 행위가 근절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또 다른 입시학원 관계자도 “고유 창작물인 모의고사 문제, 강의 내용 등이 불법 유포돼 큰 피해를 보았다”며 “교육 콘텐츠는 보호받아야 할 지식재산권이라는 점이 널리 인식되길 희망한다”고 했다. 정향미 문체부 저작권국장은 “온라인 공간에서의 저작권 침해 행위는 창작자들의 노력을 훼손하고, 건전한 콘텐츠 산업 생태계를 파괴하는 중대 범죄”라며 “텔레그램과 같은 익명 채널을 악용한 불법 행위는 끝까지 추적하고 엄정하게 대응하겠다”고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최예나 기자 yena@donga.com}

유명 학원 문제집과 강의 영상 등 유료 학습자료 1만6000여 건을 불법으로 유포해 온 국내 최대 학습교재 공유방 ‘유빈아카이브’가 폐쇄됐다.문화체육관광부 저작권범죄과학수사대는 12일 “이날 오전 텔레그램 공유방 ‘유빈아카이브’를 폐쇄했으며, 지난달 23일 검거된 운영자 A 씨를 불구속 입건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해당 공유방 운영에 가담한 공범들에 대해서도 수사를 벌이고 있다.수사대에 따르면 A 씨는 2023년 7월 유빈아카이브를 개설한 뒤 대형 학원 등의 유료 교재와 동영상 강의, 모의고사 자료 등 학습자료를 무단 복제해 수학능력시험과 변호사 시험 등의 수험생 약 33만 명에게 불법 공유한 혐의(저작권법 위반)를 받고 있다.유빈아카이브는 가입자가 22만 명에 이를 만큼 수험생 사이에서는 유명한 텔레그램 채널이다. 교재를 구매한 학생들이 이를 스캔해 관리자에게 넘기면 이를 채널에서 공유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이에 적지 않은 이들이 자료의 무단 유포에 동참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입시학원들에 따르면 유빈아카이브에선 ‘일타 강사’의 자체 교재와 모의고사 자료, 온라인 강의 영상 등도 불법으로 유포된 것으로 알려졌다. 유명 강사들의 강의 파일이 PDF 형태로 무료로 공유돼, 학생들 사이에선 “교재는 유빈이가 구해준다”는 말이 퍼질 정도였다.수사대에 따르면 A 씨는 유빈아카이브 운영이 사교육으로 인한 교육 불평등과 격차를 해소하는 의로운 행위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고가의 학습자료는 이른바 ‘소수방’이라 부르는 유료 공유방을 따로 만들어 수익을 챙긴 것으로 확인됐다. 운영진은 단속을 피하기 위해 점조직 형태로 운영했으며, 잇달아 새로운 방을 만들기도 했다.서울의 한 대형 입시학원 관계자는 “손해배상 청구를 위해 피해 금액을 집계 중”이라며 “이번 검거를 계기로 텔레그램 등을 이용한 불법 행위가 근절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또 다른 입시학원 관계자도 “고유 창작물인 모의고사 문제, 강의 내용 등이 불법 유포돼 큰 피해를 보았다”며 “교육 콘텐츠는 보호받아야 할 지식재산권이라는 점이 널리 인식되길 희망한다”고 했다.정향미 문체부 저작권국장은 “온라인 공간에서의 저작권 침해 행위는 창작자들의 노력을 훼손하고, 건전한 콘텐츠 산업 생태계를 파괴하는 중대 범죄”라며 “텔레그램과 같은 익명 채널을 악용한 불법 행위는 끝까지 추적하고 엄정하게 대응하겠다”고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최예나 기자 yena@donga.com}

광복 80주년을 맞는 오늘날 한국은 세계 주요 국가로 발돋움했다. 한반도를 강점했던 일본은 우리와 나란히 선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됐다. 역사에서 되새겨야 할 교훈이 80년 전과 같은 배일(排日)에 머물러선 안 되지 않을까. 마침 국내 대표적 일본 근대사 학자인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가 최근 ‘한국인의 눈으로 본 근대 일본의 역사’(어크로스)를 발간했다. 지난달 23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연구실에서 그를 만났다.신간은 메이지유신부터 패전까지 근대 일본의 도약과 몰락의 역사를 우리의 관점에서 짚어 본 책이다. 19세기 일본은 인구와 경제 대국으로 에도 막부가 안정적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그런 일본은 체제를 변혁하며 근대화의 길을 걸었는데, 농민 반란이 잇따르던 조선은 불안한 체제를 고수하다가 몰락했다는 건 아이러니하다.박 교수는 “서양 함대를 본 일본도 외세를 두려워했던 건 매한가지였지만, 개방을 하고 적극적으로 외부의 충격을 받아들였다”며 “반면 조선은 개방을 너무 늦게 한 데다, 개혁의 길로 나아가려는 정치적 용단이 부족했다”고 진단했다. 일본은 서구 열강의 외압에 끌려간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국가의 전환점으로 삼아 능동적으로 도약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日 유신지사들의 방향 전환1863년 10월 사쓰마번에 밀려 교토에서 쫓겨난 조슈번은 ‘양이를 주장하다가 탄압을 받았다’는 명분을 쥔다. 박 교수는 책에서 이를 두고 “약소국일수록…외세를 받아들이고 이용해 도약할 수 있는 여유와 능력의 폭이 좁다. 그러니 곧잘 배외주의자가 그 사회의 지도자가 된다. 그러나…그들은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썼다.“사실 개방은 인기가 없거든요. 충격이 있고, 관성을 바꿔야 하고, 손해 보는 집단이 생기고, 백성은 불안하니 동요하지요. 하지만 고립돼서 잘되는 사회는 거의 없습니다. 20세기 후반 한국처럼 리스크가 있어도 개방해 외부와 연결하고 교류해야 발전과 번영이 옵니다. 극단적 외세 배격의 끝엔 ‘주체 조선’, 북한이 있지요.”물론 교류엔 지켜야 할 선이 있다. 박 교수는 “조선은 외세를 제한 없이 끌어들이다가 청나라군을 불러 국내의 난을 진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일본은 내전을 벌이는 가운데서도 양측 모두 ‘외국의 군대를 동원하진 않는다’는 컨센서스가 있었다”고 강조했다.일본이 메이지유신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특히 지사(志士)들의 유연성이 눈에 띈다. 메이지유신의 상징적 인물 가운데 하나인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6∼1867)가 대표적이다. 미국 페리 제독이 함선을 이끌고 나타났던 1854년에 그는 에도에 있었다. 젊은 혈기로 ‘서양 오랑캐의 목을 따겠다’던 그는 ‘정신 승리’로 서양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난학자 아래로 들어가 서양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 해군과 무역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투신했다. 유신의 양대 세력인 사쓰마번과 조슈번을 화해시키고 ‘삿초동맹’을 맺도록 중재하기도 했다.박 교수는 “사카모토에게선 ‘아니다’ 싶으면 바로 방향을 전환하는 ‘풋워크의 경쾌함’을 볼 수 있다”며 “평화주의자이자 국제주의자인 사카모토가 살아서 메이지 정부에서 활약했다면 일본의 근대는 훨씬 명랑했을 것”이라고 했다.반면 우리 근대사에서 사카모토처럼 유연한 인물을 찾기란 쉽지 않다. 박 교수는 “변하지 않는 것을 찾는 성리학이 사회를 지배한 것도 한 원인”이라며 “명분론에 휩쓸리고 타협과 협상을 허락하지 않는 사고방식은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주는 것 같다”고 했다.막부군의 ‘질서 있는 퇴각’도 눈에 띈다. 막부군의 마지막 패전 당시 총대장은 원래 막부의 해체와 왕정복고를 주장했다가 한직으로 내쳐졌던 가쓰 가이슈(勝海舟·1823∼1899)였다. 패전을 예감한 막부 측이 사쓰마번의 리더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1828∼1877)와 친교가 있던 그를 대장으로 내세운 것. 두 사람의 협상을 통해 에도 주민의 큰 피해 없이 막부는 물러날 수 있었다. 원한과 분열은 최소화됐다. 박 교수는 당시 역사에서 “진영 대립의 완화와 진영을 초월하는 인재 등용이 보인다”고 했다.“메이지 정부가 막부의 가신들을 많이 등용합니다. 막부 해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1836∼1908)가 대표적인 인물이에요. 최후까지 정부군에 항전했던 인물인데, 3년 콩밥 먹이고 외무장관까지 시키거든요. 모든 걸 ‘그저 승부일 뿐’이라고 보는 사무라이들의 장점이지요.”● ‘급류’로 바뀌는 역사의 시간하지만 일본의 도약은 침략으로 이어졌다. 일본에선 동아시아 정세에 별 변동이 없던 19세기 초, 세계를 인식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세계를 정복해야 한다는 ‘웅비론’이 등장했다. 박 교수는 “외세의 침략을 당한 경험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고 했다. “위기감이 한편에선 ‘완전히 쇄국하자’는 쪽으로, 다른 쪽에선 거꾸로 ‘세계를 정복하자’는 뒤틀린 반동으로 나타난 듯하다”는 설명이다.하지만 오늘날 한국이 국방력을 유지하고, 중국이 지금과 같은 규모로 존재하는 한 일본이 한반도에서 모험주의적 선택을 할 소지는 거의 없다는 것이 박 교수의 시각이다. 그는 특히 우리를 둘러싼 지정학적 상황에선 한일의 협조가 긴요하다고 강조했다.“유럽의 영국과 프랑스처럼 한일 양국이 유라시아 대륙 동단에서 강력하게 협조하는 게 일본으로서도, 한국으로서도 유일한 살길입니다. 그러면서 중국이 따라오는 걸 기다리는 방법뿐이에요. 그러기 위해선 일본의 극우파를 고립시켜야 하고, 국내 일각의 무조건적 배일주의도 적절히 제어돼야겠지요. 이젠 성숙한 대일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가 일본을 이끌어야 할 분야가 적지 않습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차라리 머리가 떨어질지언정, 무릎을 꿇고서 종이 되지는 않으리. 집 나선 지 어느새 한 달이 넘어, 벌써 압록강을 건너버렸네. 누굴 위해 발길을 머뭇거리랴? 가슴 펴고 나는 가리라.” 1911년 1월 27일 53세의 석주 이상룡 선생(1858∼1932)은 식솔을 이끌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수레로 건너며 이렇게 읊었다(‘도강·渡江’). 그의 뒤엔 일제가 강점한 조선이, 앞에는 서간도가 있었다. 고향집인 경북 안동의 임청각을 출발(1월 5일)하기 전날, 석주 선생은 “잘 있거라 고향 동산아, 슬퍼하지 말자. 난리 그친 밝은 새날 돌아오리니”(‘거국음·去國吟’)라고 읊었지만, 끝내 ‘새날’을 보지 못하고 만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가져가지 말라”던 그의 유해는 중국 하얼빈에 안장돼 있다가 1990년 고국으로 돌아왔다.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선생을 기리는 ‘국무령 이상룡과 임청각―나라 위한 얼과 글’전이 5일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개막했다. 이달 31일까지 열리는 전시에선 그의 문집 ‘석주유고(石洲遺稿)’에 수록된 시문 등을 먹으로 새로 쓴 서예 작품 59점과 그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문서 자료 등을 선보인다. 서예 작품은 석주 선생과 같은 고성 이씨 일가의 후손인 원로 서예가 이동익 씨가 썼다. 안동 명문가에서 태어난 석주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조직했고, 1908년에도 병사를 일으키려다 일본군의 기습으로 실패했다. 원래 성리학자였던 그는 이런 좌절을 거치며 서양 근대사상과 민주공화 지향을 받아들이는 한편, 계몽운동에 나서며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주도했다. 이번 전시에선 ‘몸을 바쳐 나라를 지키겠다’는 내용이 담긴 협회의 취지서를 볼 수 있다. 만주로 망명한 뒤엔 1911년 애국지사들과 함께 지린성 삼원보에 모여 한민족 자치조직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책임을 맡았다. 이어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했고, 이듬해엔 경학사의 이념을 계승한 부민단을 조직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에는 남만주 독립운동의 총본영인 군정부를 조직해 서로군정서로 개편하고 책임자인 독판을 맡았다. 1925년 9월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3대 수반이자 국무령으로 추대됐다.이번 전시에선 서로군정서의 군자금 영수증 등과 함께 모신나강 소총, 마우저 권총 등 독립군이 사용했던 종류의 총기 등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여러 서예 작품은 글의 내용에 따라 훈민정음체(한글)와 광개토대왕비 서체 및 행서 예서 등으로 서체를 달리 해 석주의 정신을 느낄 수 있게 했다. 고성 이씨 종택인 임청각의 역사도 소개한다. 임청각은 독립유공자를 11명 배출했다. 최병구 서울역사박물관장은 4일 전시 개막사에서 “석주 이상룡은 임청각의 종손으로서 편히 살 수 있었음에도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의 터전을 닦은 인물”이라며 “오늘날의 한국을 있게 한 주인공을 기리는 전시”라고 소개했다. 김희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장도 축사에서 “(사람들을) 갈라치지 않고 통합해 이끈 지도자였기에 만주에서 그를 중심으로 형성된 독립운동 세력은 좌우 갈등이 별로 없었다”고 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기획전시실에서 광복 이후 80년 동안 광복절이 어떻게 기념되고 기억돼 왔는지를 조명하는 ‘우리들의 광복절’전도 11월 9일까지 개최한다. 독립 기념 메달(1945년)과 해방 1주년 기념 우표(1946년), 30주년 기념 국립오페라단 팸플릿(1975년) 등 다양한 유물과 관련 사진을 선보인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를 분석해, 경제의 흐름을 들여다보고 경영자 등이 변화에 대응하는 방법을 소개한 책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confidence’를 주제로 다루는데, 이를 ‘자신감’으로 번역했다. 우리말로는 여러 의미가 있는 단어라 번역이 애매한 건 사실인데, 이 책에선 ‘미래가 잘될 것이라는 믿음’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될 때가 많다. ‘소비자신뢰지수(CCI·Consumer Confidence Index)’에서와 같은 쓰임새다. “2020년 3월 초에 팬데믹이 엄습하자 도미노피자그룹의 주가가 급등했다. … 자신감이 떨어지면 식단에도 ‘지금 이곳의 나’라는 사고방식이 자연스럽게 반영된다. 건강한 음식 선택과 장기적인 식단 계획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당장 미래가 불확실한데 장기 계획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2부 ‘충동과 감정의 영역, 긴장의 중심’에서) 저자는 ‘자신감’이라는 개념을 ‘확신’과 ‘통제감’이라는 요소로 나눠 분석한다. 예를 들면 확신도 통제감도 높은 대중의 심리적 상태를 저자는 ‘안전지대’라고 부른다. 이 상태는 좋은 것 같지만 역설적으로 기존 리더와 기업 상당수가 도태되는 영역이다. 저자는 “마침내 평온을 되찾았다는 마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느라 새로운 경쟁이 시작됐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분석했다. 유행하는 음악에서 소비자의 심리를 유추할 수도 있다. 2020년 1월 빌리 아일리시가 테일러 스위프트를 제치고 미국 그래미 어워드를 휩쓸었다. 저자는 “테일러 스위프트는 … 시장의 자신감이 높을 때 가장 좋은 성과를 올렸다. … 아일리시는 넓게 보면 인디 음악의 부상을 의미했고, 이면에는 소비자 심리가 악화되고 있다는 신호가 숨어 있었다”고 했다. 저자는 미국에서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는 행동경제학자다. ‘불확실한 시대, 최고의 결정을 이끄는 확신의 프레임’이라는 부제만큼 책이 확실한 분석 틀을 제공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인과관계 설명이 다소 자의적인 느낌도 있지만 소개되는 다양한 사례를 참고할 만은 하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9차 예약판매 시작.’ 홈쇼핑이나 대기업 마트 온라인 쇼핑몰인 줄 알았다. 이 문구는 ‘국립박물관 문화상품’ 온라인 숍의 ‘까치 호랑이 배지’ 판매 글 제목이다. 이 배지는 이미 약 2만3000개가 팔렸는데, 지금 주문하면 석 달여 뒤인 11월 19일부터 순차적으로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최근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가 주목받으면서 작품 속 호랑이(‘더피’)와 까치(‘수시’)를 닮은 이 배지가 덩달아 인기를 누리는 것. 해외에서도 구매 문의가 잇따르고 있지만 국내에 유통할 물량도 없다. 박물관 굿즈(상품)를 뜻하는 ‘뮷즈(museum+goods)’의 인기는 ‘케데헌’ 전에도 이미 폭발적이었다. ‘반가사유상 미니어처’ ‘단청 키보드’ ‘수막새 수저받침’ ‘달항아리 도어 차임’ 일시 품절, ‘갓 키링’ 주문 폭주 OO일부터 순차 발송….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뮷즈가 줄줄이 사탕이다. 혹시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살 수 있지 않을까? 소셜미디어엔 아이들 방학인 요즘 ‘한강대교부터 주차장 진입 대기 줄을 서서 1시간 걸려 박물관에 입장했는데, 굿즈 구매하려고 또 문화상품점에서 줄을 섰으나 오전에 이미 매진됐더라’는 경험담이 한둘이 아니다. 데이터도 같은 사실을 보여준다. 국립박물관의 뮷즈를 개발해 판매하는 국립박물관문화재단에 따르면 뮷즈 매출은 2022년 113억 원을 기록하며 처음 100억 원을 넘었는데, 지난해엔 213억 원으로 2년 만에 약 2배가 됐다. ‘취객선비 3인방 변색 잔 세트’(이것도 일시 품절)는 차가운 액체를 따르면 겉에 그려진 김홍도풍(風)의 선비 얼굴이 붉게 변하는데, 지난해 약 8만 세트가 팔렸다. 재단의 뮷즈 매출은 올해 3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와 별개로 국가유산진흥원의 온라인 쇼핑몰도 일월오봉도가 그려진 가방, 지갑, 손수건, 부채 등이 인기리에 팔리면서 최근 매출이 급신장했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뮷즈는 ‘힙트래디션(hip+tradition)’의 대표적 아이템이 됐다. 이미 일시적 유행(fad)을 지나 트렌드(trend·소수가 동조하며 2, 3년 유행)가 됐고, 메가트렌드(megatrend·대다수가 동조하며 10년 이상 지속)가 될지 갈림길에 있다고 봐야 한다. K컬처의 부상이 전통문화와 박물관에 대한 관심을 낳고, 전통이 다시 범(汎)K컬처의 자양분이 되는 선순환의 한 단면이다. 뮷즈를 보면 일단 예쁘고 실용적이어서 갖고 싶게 생겼다. 김미경 박물관문화재단 상품사업본부장은 “2016년 입사했을 땐 저렴한 문구류가 많았는데, 이후 일상에서 쓸모 있는 다양한 상품에 개발의 초점을 맞추는 한편 젊은 감각의 디자인을 외부 공모한 것이 주효한 것 같다”며 “문화유산이 박물관을 넘어 한국인의 삶에 스며들도록 기업 등과의 협업을 확대할 것”이라고 했다. 세계에 한국 호랑이를 각인시킨 건 1988년 서울 올림픽의 마스코트인 호돌이였다. 이 올림픽 개회식에선 민속놀이 굴렁쇠가 등장해 세계인의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당시에도 이미 굴렁쇠를 굴리며 노는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이제라도 전통의 미감(美感)이 다시 일상으로 들어오는 건 반가운 일이다. 가격이 좀 나가긴 하지만 무형유산 보유자 등 장인들의 전통 공예품에도 이런 관심이 옮겨갔으면 좋겠다. 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

과거 태평양 미크로네시아 지역의 뱃사람들은 별이 보이지 않을 때는 파도(wave)를 읽고 섬의 위치를 찾아냈다. 너울이 섬에 부딪히면 섬 주위에서 굴절 및 회절되는데, 이 형태를 감지했다. 이를 통해 60km 넘게 떨어진 곳에서도 섬이 있는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고 한다.지금은 명맥이 거의 끊어진 이 독특한 항해술은 과거 ‘마탕(mattang)’이라고 하는 일종의 해도를 사용해 후대에 전해졌다. 너울이 섬을 만나면 어떻게 진행 경로가 바뀌는지를 야자수 잎줄기를 격자 모양으로 엮어 표현한 물건이다.‘구름 관찰자를 위한 가이드’를 냈던 영국의 과학 저술가가 다양한 파동(wave)의 이모저모를 다룬 책이다. 저자는 2005년 ‘구름감상협회’를 설립해 회장을 맡고 있는 괴짜. 과학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음에도 쉬지 않고 등장하는 익살스러운 표현이 꽤 인상적인 책이다.바다 위에 뜬 해초는 둥실거리며 비슷한 위치에 머무를 뿐 물결에 쓸려가지 않는다. 파도는 배를 뭍 쪽으로 밀어내지 않는다. 수면의 물은 원을 그리며 움직일 뿐, 바다 쪽에서 땅 쪽으로 밀려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먼바다에서 해안으로 밀려오는 움직임의 정체는 ‘에너지’다. 바닷물이라는 매질이 에너지를 운반한다.2011년 영국왕립학회 과학도서상 수상작으로, 파도뿐 아니라 음향파와 전자기파, 광파, 지진파, 뇌파 등 각종 파동을 다뤘다. 경기장의 파도타기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교통 체증은 파동일까 아닐까?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갑오개혁(1894∼1896년) 당시 온건 개화파는 점진적 경찰 개혁을 추진했다. 하지만 일본의 개입으로 일본식 엄벌주의가 도입됐고, 이것이 민중의 반발을 불러오면서 항일 의병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토 슌스케(伊藤俊介) 일본 후쿠시마대 교수는 21일 서울 서대문구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 ‘일본에서 본 한일관계’에서 ‘근대 이행기 조선의 국가권력 위상과 민중’을 발표하며 이같이 밝혔다. 이토 교수에 따르면 갑오개혁 초기 개화파는 유길준(1856∼1914)의 경찰권 제한 의견을 반영해 민중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일상 생활에 대한 경찰의 간섭을 최소로 억제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을 강권적(強權的)으로 통치하기 위해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공사의 부임과 함께 경무청에 경찰권을 집중시키는 등 일본식 제도 도입을 추진했다. 이토 교수의 이번 발표는 당시 신문자료 등을 통해 그에 대한 민중의 반응을 조명했다. 갑오개혁은 경찰력을 동원해 민중의 전통적 가치관과 생활 관습을 바꾸도록 강요했다. 민중에게 퍼져 있던 관우 신앙을 탄압했고, 거리에서 긴 담뱃대 등의 사용을 금지했다. 일본인 거류지 확장을 위해 방해가 되는 가택을 강제로 철거하기도 했는데, 이를 일선에서 경찰이 담당했다. 이에 따라 조선 민중은 경찰을 ‘대일 협력자’ ‘생활 파괴자’로 인식하고 반발했다. 민속놀이의 일종인 ‘석전(石戰)’을 중지하란 명령에 분노한 민중이 경찰관에게 돌을 던지거나, 경찰의 일본인 살해 사건 수사를 방해하는 일도 일어났다. 이토 교수는 “1897년 대한제국이 ‘구본신참(舊本新參)’을 내걸고 개혁을 한 건, 이 같은 일본형 근대에 대한 반발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문치’와 ‘민본’에 기초한 독자적인 근대국가를 건설하려는 시도였다”고 설명했다. 이날 학술회의에선 이토 교수를 비롯해 나리타 지히로(成田千尋) 리쓰메이칸대 교수와 다카하시 유코(高橋優子) 오사카공립대 인권문제연구센터 연구원, 이쿠라 에리이(飯倉江里衣) 가나자와대 교수, 오가타 요시히로(緒方義広) 후쿠오카대 교수 등 한국 관련 연구를 하는 일본 차세대 학자 5명의 발표가 이어졌다. 박지향 동북아재단 이사장은 “한일 양국의 차세대 연구자들이 학술교류를 통해 문제의식과 연구방법론을 공유하고 새로운 통찰을 얻길 바란다”고 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9일 이승만 전 대통령의 서거 60주기를 맞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추모식이 개최됐다.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의 김남수 회장은 이날 주관한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 서거 60주기 추모식’에서 “이 전 대통령은 독립과 건국부터 6·25전쟁과 한미동맹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명운에 목숨을 건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어깨에 메고 살았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또 “이 전 대통령은 국가의 운명 앞에서 물러서는 일이 없었고, 필요하다면 모든 방법과 수단을 아낌없이 사용했다”며 “반공 전선에서 온몸으로 분투하면서 지구의 공산화를 막아낸 작은 거인”이라고 덧붙였다. 국가보훈부 후원으로 열린 이날 추모식에서는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인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추모사를 했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이 전 대통령이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 쓴 글을 낭독했다. 기념사업회 상임고문을 맡고 있는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과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 국민의힘 배준영 김재섭 의원 등도 참석했다. 이날 미국 하와이에서도 한인기독교회에 있는 이승만 동상 앞에서 헌화식이 개최됐다. 그리스도교회에서는 특별 강연과 추모 영화 상영이 진행됐다. 1960년 4·19혁명으로 하야한 이 전 대통령은 약 한 달 뒤인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떠났다. 1964년 6월 급성 위장 출혈로 쓰러졌고, 이듬해 7월 19일 하와이 마우나라니 요양병원에서 별세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미국 뉴욕대의 심리학자 톰 하틀리는 30년 전 학생이었을 당시 정신병을 앓은 적이 있다. 어느 날 다른 이들이 모두 자신을 죽이려 드는 것처럼 느꼈다고 한다. 신호등마저도 특별한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비밀 임무를 받았다고 생각한 그는 미션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그러자 자신이 마치 ‘쉬는 날의 제임스 본드’처럼 느껴졌다. ‘퀘스트(quest·탐색)’가 중단되고 느낀 감정은 안도가 아니라 좌절이었다. 그의 사례는 정신병을 겪을 때조차 인간은 ‘만족스러운 서사를 향한 욕망’을 느낀다는 걸 보여 준다. 영국 맨체스터대 심리학 교수인 저자는 “인간은 살면서 겪는 거의 모든 경험에 ‘마스터 플롯(Master plots·반복되는 이야기의 구조)’을 입힌다”고 강조한다. 이를 활용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퀘스트는 대표적인 마스터 플롯이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부터 영화 ‘반지의 제왕’까지 수많은 이야기가 이런 플롯을 갖고 있다. 괴물과 유혹, 진퇴양난, 초자연적 존재, 길동무 등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핵심은 ‘탈속성(脫俗性)’이다. 주인공은 멀고 기이한 세상으로 떠난다. 마침내 시련을 이긴 주인공은 삶을 갱신하게 된다. 오디세우스는 가족과 재회해 새 삶을 살고, 절대 반지를 없앤 프로도는 죽지 않는 땅으로 향한다. 저자는 걸어서 세계를 일주하는 실제 인물의 이야기 등을 소개하면서 이 플롯이 지루한 삶을 바꾸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강조한다. 책은 이런 방식으로 마스터 플롯 8가지를 소개한다. 각각의 플롯은 삶의 만족도를 높이거나(‘언탱글드·untangled’ 플롯), 자기 비난에서 벗어나고(‘이카로스’), 중독을 극복하고(‘괴물’), 경쟁자를 이기고(‘불화’), 응원과 사랑을 받고(‘약자’), 삶의 의미를 찾고(‘희생’), 밑바닥에서 탈출(‘구멍’)하도록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플롯을 아는 것과 삶에 적용하는 건 다른 문제다. 여행을 떠나느냐 마느냐는 각자에게 달린 것이니까.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국립중앙박물관은 국사편찬위원회와 함께 전시 ‘광복 80주년, 다시 찾은 얼굴들’을 15일부터 10월 12일까지 서울 용산구 박물관 상설전시관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선 유관순 열사(사진), 안창호 한용운 선생 등 ‘일제 주요 감시 대상 인물 카드’(국가등록문화유산) 실물이 처음으로 관람객을 만난다. 이 카드엔 체포 직후 촬영됐거나 수집된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이 부착돼 있다.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의사, 유 열사, 안 선생 등 독립운동가 5명의 모습을 인공지능(AI) 기술로 복원한 영상도 상영된다. 안 의사의 옥중 유묵, 나석주 의사의 거사 준비 편지, 이·윤 의사의 선서문 등도 볼 수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학계에선 4, 5세기 도래인(渡來人)이 발전된 철기나 토기 등을 일본(당시 왜·倭)에 전파하며 일본이 중앙집권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이에 더해 가야계를 중심으로 한 도래인이 군사·사회 시스템 같은 ‘소프트웨어’도 전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조성원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연구원은 한국고대사학회가 16, 17일 여는 세미나 ‘동북아 국제정세와 한국 고대의 이주·정착’에서 ‘고고 자료를 통해 본 4∼5세기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의 이주와 정착’을 발표한다. 조 연구원은 이 발표문에서 “4, 5세기 가야계 도래인들은 기술자의 역할만 조명된 탓에 일본 고대사의 주체가 아닌 보조로 인식되고 있다”며 “하드웨어가 올바르게 작동하도록 하기 위해선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며, 이것이 도래 문화 전파의 본질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발표문에 따르면 4세기 일본 야마토(大和) 정권은 동북아시아 교역의 중심지인 금관가야로부터 철기 및 선진문물을 독점 입수하며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학계에선 대체로 일본의 철기와 스에키(須惠器·고대 일본의 도질 토기)가 도래인으로부터 비롯됐다고 본다. 400년 고구려의 남정(南征)으로 금관가야가 붕괴하자, 한반도로부터의 도래는 더욱 본격화됐다. 이 시기 일본 기나이(畿內·수도 주변) 지역 집락 유적에서 한식계(韓式係) 토기가 다량 발굴되는 것이 방증이다. 이때부터 일본에선 각종 철제 무기류가 대량생산됐고, 무덤엔 대량의 무구(武具)와 무기가 부장되기 시작했다. 조 연구원은 “금관가야와 신라에서는 3세기 대부터 나타났던 모습”이라며 “가야계 도래인이 일본에 철기 생산 기술뿐 아니라 고대 군사조직의 운영 및 통솔과 관련된 소프트웨어도 전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도래인은 일본의 일상도 바꿨다. 일본열도에 말의 존재와 관련된 흔적은 5세기 대부터 확인되는데, 관련 유적에선 도래인과 연관된 이동식 아궁이와 시루 등 토기가 출토됐다. 도래인이 말과 말을 키울 수 있는 기술을 가져왔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말은 운송과 경작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야마토 정권은 독점한 도래 문화를 활용해 권력 기반을 다지는 한편, 선진 문물을 각지의 수장층에 배분하며 지배를 유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 연구원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4세기 후반∼5세기 전반 일본은 고훈시대(古墳時代·3세기 중후반∼7세기 무렵)가 중기로 접어들면서 정치 사회적 변화가 적지 않았다”며 “고대국가로 성장하던 가야계 도래인이 백제계보다 앞서 이런 변화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국립중앙박물관은 국사편찬위원회와 함께 전시 ‘광복 80주년, 다시 찾은 얼굴들’을 15일부터 10월 12일까지 서울 용산구 박물관 상설전시관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선 유관순 열사 안창호 한용운 선생 등 ‘일제 주요 감시 대상 인물 카드’(국가등록문화유산) 실물이 처음으로 관람객을 만난다. 이 카드엔 체포 직후 촬영됐거나 수집된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이 부착돼 있다.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의사, 유 열사, 안 선생 등 독립운동가 5명의 모습을 인공지능(AI) 기술로 복원한 영상도 상영된다. 안 의사의 옥중 유묵, 나석주 의사의 거사 준비 편지, 이·윤 의사의 선서문 등도 볼 수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학계에선 4, 5세기 도래인(渡來人)이 발전된 철기나 토기 등을 일본(당시 왜·倭)에 전파하며 일본이 중앙집권국가로 발돋움하는데 기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이에 더해 가야계를 중심으로 한 도래인이 군사·사회 시스템 같은 ‘소프트웨어’도 전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조성원 국립경주문화연구소 연구원은 한국고대사학회가 16, 17일 여는 세미나 ‘동북아 국제정세와 한국 고대의 이주·정착’에서 ‘고고 자료를 통해 본 4~5세기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의 이주와 정착’을 발표한다. 조 연구원은 이 발표문에서 “4, 5세기 가야계 도래인들은 기술자의 역할만 조명된 탓에 일본 고대사의 주체가 아닌 보조로 인식되고 있다”며 “하드웨어가 올바르게 작동하도록 하기 위해선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며, 이것이 도래 문화 전파의 본질일 것”이라고 강조했다.발표문에 따르면 4세기 일 야마토(大和) 정권은 동북아시아 교역의 중심지인 금관가야로부터 철기 및 선진문물을 독점 입수하며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학계에선 대체로 일본의 철기와 스에키(須惠器·고대 일본의 도질 토기)가 도래인으로부터 비롯됐다고 본다.400년 고구려의 남정(南征)으로 금관가야가 붕괴하자, 한반도로부터의 도래는 더욱 본격화됐다. 이 시기 일본 기나이(畿內· 수도 주변) 지역 집락 유적에서 한식계(韓式係) 토기가 다량 발굴되는 것이 방증이다. 이때부터 일본에선 각종 철제 무기류가 대량생산됐고, 무덤엔 대량의 무구(武具)와 무기가 부장되기 시작했다. 조 연구원은 “금관가야와 신라에서는 3세기 대부터 나타났던 모습”이라며 “가야계 도래인이 일본에 철기 생산 기술뿐 아니라 고대 군사조직의 운영 및 통솔과 관련된 소프트웨어도 전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도래인은 일본의 일상도 바꿨다. 일본열도에 말의 존재와 관련된 흔적은 5세기 대부터 확인되는데, 관련 유적에선 도래인과 연관된 이동식 아궁이와 시루 등 토기가 출토됐다. 도래인이 말과 말을 키울 수 있는 기술을 가져 왔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말은 운송과 경작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야마토 정권은 독점한 도래 문화를 활용해 권력 기반을 다지는 한편, 선진 문물을 각지의 수장층에 배분하며 지배를 유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 연구원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4세기 후반~5세기 전반 일본은 고훈시대(古墳時代·3세기 중후반~7세기 무렵)가 중기로 접어들면서 정치 사회적 변화가 적지 않았다”며 “고대국가로 성장하던 가야계 도래인이 백제계보다 앞서 이런 변화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라이자는 살면서 자신이 내린 결정 중에 어디까지가 체면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을까 생각했다. 대학에 얻은 일자리, 자전거와 채식주의, 심지어 머리 모양까지도 보이지 않는 구경꾼들의 의견에 맞추어 선택한 듯 느껴졌다. 스스로 인정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나, 뭐라도 정말로 원하는 것을 선택했는지는 자신이 없었다.”(단편 ‘개미’에서) 누군들 속으론 이런 느낌이 없으랴. 레즈비언 커플인 일라이자와 레이철은 게이 친구인 할의 정자를 받아 인공수정으로 아기를 낳을 준비를 하고 있다. 어느 날 풀에 찔리는 악몽을 꾼 레이철은 눈에 개미가 들어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들 아서가 태어난 뒤에도 개미가 자신의 머릿속에 살아 있다는 생각을 뿌리치지 못한다. 마침내 레이철은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나고, 아서는 죽은 레이철이 우주 어디엔가 살아 있을 수 있다고 믿으며 우주비행사를 꿈꾼다. 아서는 엄마를 만날 수 있을까. 연작 소설의 형식을 띤 장편소설로, 책엔 ‘개미’를 필두로 ‘게임 체인저’ ‘선베드’ 등 단편 10편이 담겼다. 각 단편은 ‘죄수의 딜레마’ ‘중국어 방’ ‘통속의 뇌’를 비롯한 철학적 사고실험을 저마다의 테마로 하고 있다. 전체의 장르는 과학소설(SF). 저자는 영국 골드스미스대 영문학 박사이자 영화 ‘폭풍의 언덕’ 등에 출연했던 배우이기도 하다. 의식과 인공지능 관련 주제의 박사 논문이 소설로 이어졌다. 2020년 낸 이 소설집으로 영국 부커상 후보에 올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성공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한다’,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자기계발서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물론 이런 열풍이 가장 거세게 부는 곳은 자본주의의 심장인 미국이다. 그런데 수많은 대중을 모아 놓고 하는 미국인들의 대형 ‘동기 부여 세미나’ 같은 행사는 우리에겐 좀 괴상해 보이기도 한다. 영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인 저자 역시 취재를 위해 그런 행사에 동참했다가 영 실망한 모양이다. ‘긍정적 사고’를 강조하는 것으로 미국에서 유명한 한 세미나에서 박사이자 목사인 강사는 대단한 비결이라도 알려주는 양 청중을 기대하게 만들어 놓고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삭제하세요! 영원히.” ‘뭐, 어쩌라고…’ 싶다. 원래 서양은 윤리의 근간 중 하나가 ‘효용’인 데다 ‘많이 가질수록 좋다’는 자본주의의 발상지인 터라, 행복을 손을 뻗어서 따는 열매처럼 접근하려는 경향이 있다. 뭔가를 자꾸 해야 한다고 사회가 강요하는 건 오늘날 한국도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그런 식은 행복에 대한 답을 주진 못했고, 역효과도 났다.“행복하고자 애쓰는 것 자체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주범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불안정과 불확실함 혹은 실패 같은 부정적 요소를 모조리 제거하려는 노력이 우리에게 자신감 상실, 두려움, 불안감, 슬픔을 안겨준다는 얘기다.”(1장 ‘행복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들’에서) 저자는 다른 접근법을 소개한다. 집착에서 벗어나 불확실성을 즐기고, 불안정을 포용하고, 실패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이른바 행복에 이르는 ‘부정적 경로’다. 원래 인위보단 무위를 지향하는 쪽에 가까운 사람이라면 ‘새삼스럽게도 썼다’ 싶을 수도 있겠다. 우린 널리 사랑받는 김상용의 시처럼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왜 사냐건/웃지요”라는 한국인이 아닌가. 하지만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둠으로써 오히려 생의 의지와 활기를 얻을 수 있다는 서양 중세의 격언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를 비롯해 경청할 얘기가 적지 않게 담겼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적막한 사립문에 해는 저무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나가 보았더니, 천 리 밖에서 편지를 전해 주는 이가 있었습니다.…아이는 마침내 무사합니까.” 1644년 선비 홍위(1620∼1660)가 처가에 보낸 편지의 일부 내용이다. 홍위는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고 아내는 돌림병에 걸렸다. 쌀독이 비었는데 가뭄마저 지독해 “하염없는 세상만사를 다만 하늘의 뜻에 맡길 뿐”이었다. 6년 뒤인 1650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경상도 관찰사와 동부승지를 지낸 홍위지만, 당시의 편지에선 고달프기 이를 데 없었던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이 편지는 지난달 출간된 신간 ‘간찰, 붓길 따라 인연 따라’(태학사)에 실려 있다. 조광조 이황 이항복 송시열 등 이름난 조선 유학자 142명의 간찰(簡札) 164편을 망라한 책이다. 고미술품 수집가인 이상준 더프리마 회장이 소장한 ‘동방명적’ 등 간찰첩 6책을 탈초(脫草·초서 등으로 쓰인 한문을 정자로 바꿈)하고 번역한 이는 고문헌 연구가 석한남 씨(67). 1일 서울 동작구 자택에서 만난 석 씨는 “간찰엔 옛사람들의 쉰 목소리가, 배고픔과 목마름이,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숨결이 전해진다”고 했다. 석 씨가 건넨 명함엔 직함이 ‘동네 훈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대학 박물관이나 국립중앙도서관 등이 탈초를 의뢰하고, 학자들도 배움을 청하는 ‘재야의 고수’. 하지만 오로지 독학으로 한학과 초서를 익혔다. 국내에서 석 씨처럼 전문적으로 탈초 및 번역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는 이는 강단을 포함해도 손으로 꼽는다. ‘석 훈장’은 원래 외국계 금융회사 지점장을 지내는 등 전혀 다른 업종에서 일했다. 서른아홉 살 때 인사동 주변에서 근무하며 오가다 본 초서의 아름다움에 반해 액자를 하나 샀다. 그런데 TV에 나오는 전문가들에게 뜻을 물어도 읽지를 못했다고 한다. ‘그럼 내가 하지’ 싶어 10년을 기약하고 매일 새벽 공부를 시작했다. 위창 오세창 선생(1864∼1953)이 집대성한 ‘근묵(槿墨)’을 파고들었다. 해외 출장이나 화장실에도 공부 거리를 가져갔다. 그렇게 15년 정도를 공부했더니 눈이 뜨였다. 관련 기관과 박물관에 도록 등의 오류를 지적하는 편지를 보냈더니 “어디서 공부하셨느냐”며 탈초·번역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석 씨는 최근까지 간찰 2000여 점을 번역했으며, ‘다산과 추사, 유배를 즐기다’ 등 책 20여 권을 냈다. 수집한 간찰에서 흥선대원군이 보낸 밀서를 찾아내기도 했다. 2018년엔 자신이 모은 귀중 고문헌과 옛 글씨 등 168점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탁해 특별 전시와 학술 심포지엄도 열렸다.그에 따르면 제도권 핵심에 있던 유학자와 ‘아웃 사이더’들은 글씨체부터 다르다. “서인(노론)의 거두였던 송시열과 송준길의 양송체는 격식과 위엄을 갖추고 있지만 인간미가 담기진 않았어요. 반면에 귀양 간 이들이 유배지에서 갈고닦은 글씨체는 자유분방하지요. 실학자들은 편지 글씨에 멋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간찰첩은 과거 문집을 만들기 위해 후손이 수취인들로부터 하나하나 모아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일제강점기 즈음부터 상품으로 거래되기 시작해 지금도 종종 경매에 나온다. 하지만 박물관 수장고에 묻힌 채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어쩌다 운이 좋게 탈초, 번역을 시작했다가도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중단되는 일이 잦다는 것이다. “고문헌은 누가 읽어주면 보물이고, 아니면 폐지일 뿐이에요. 다산의 ‘하피첩’도 고물상의 수레에서 나온 겁니다. 한데 이젠 초서를 읽을 수 있는 젊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선조들이 남긴 귀중 고문헌이 앞으론 모두 다 폐지가 돼 버릴 판입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어제 네가 빚은 예술은 자그마치 1리터/너랑 같이 있으면 life is party (…) 한 병 더 가져와 막걸리 막걸리를 (…) 나오고 있지 사는 느낌 나는 특히 네가 좋아” 래퍼 빈지노가 서울 용산구 해방촌의 작은 주막 ‘윤주당’에서 막걸리 빚기를 배우고 만들었다는 노래 ‘침대에서/막걸리’(2023년). 좋은 막걸리 한잔은 ‘살아 있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 윤주당의 술 빚는 ‘주모’ 윤나라 대표(39)가 책 ‘윤주당의 사계절 막걸리 레시피’(한스미디어·사진)를 최근 발간했다. 23일 만난 윤 대표는 “우리 전통주는 1년 열두 달 내내 빚는다”며 “빚는 사람에게 계절감과 함께 ‘산다’는 감각을 일깨워 준다”고 했다. 딸기 솔잎 아카시아 연잎 오미자 참외 더덕 유자 석류…. 신간이 소개하는 막걸리 부재료들이다. ‘넣으면 안 되는 것이 있나’ 싶을 정도다. 윤 대표는 “우리나라엔 다양한 먹거리가 나기에 원래 그때그때 나는 재료를 넣어 술을 빚었다”며 “탁주에 과일 등을 넣어 만드는 건 요즘 생긴 문화가 아니다”라고 했다.“창덕궁과 운현궁, 익선동 한옥들이 모두 근처예요. 좋은 효모가 공기 중에 떠다닐 것 같지 않아요?”윤 대표를 만난 곳은 종로구 운니동의 ‘윤주당 브루어리’(양조장). 여기선 입국(특정 누룩균을 배양한 당화제)을 쓰지 않고 전통 누룩만으로 막걸리를 만든다. 당을 알코올로 바꾸는 효모균은 지붕이나 나뭇잎을 비롯해 어디에나 붙어 있는데, 동네마다 집마다 종류가 달라 술맛도 달라진다. 100일을 발효하고, 석 달을 숙성했다는 여러 탁주는 풍미가 다양했고 운치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과세하려고 조사했는데, 전국에 양조장이 1만5000개였어요. 양조장이 커피숍만큼 많아지면 그만큼 술맛도, 우리 문화도 풍부해지는 게 아닐까요.” 원래 윤 대표와 전통주의 인연은 외할아버지의 막걸리 심부름 정도였다고 한다. 서울예대 영화과를 졸업한 뒤 공연·문화기획 분야에서 일하다가 2, 3년 정도 일을 쉬던 2015년에 운명이 바뀌었다. 구(區) 소식지를 보고 ‘3개월짜리 막걸리 교실’에 등록했다. 전통주에 빠져들어 공부를 더 하다가 2019년 해방촌에 주점을 열었다. 당시 동네에 와인바와 위스키바, 심지어 모로코 식당까지 있어도 전통 누룩 막걸리를 파는 곳은 없었다고 한다. 낮엔 술 빚기 클래스도 운영했는데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주 인도 한국 대사관, 벨기에 한국문화원, 프랑스 파리 등에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우리 전통주 빚기를 시연하고 강의하기도 했다. 윤 대표가 막걸리로 이루고 싶은 건 뭘까. 그는 “‘막걸리는 값싼 술’이라는 편견을 없애는 것이 내 사명”이라고 강조했다.“한식 파인 다이닝에서도 음식을 와인과 페어링하지요. 하지만 우리 전통 음식과 가장 잘 어울리는 건 전통주예요. 전통주엔 단 술만 있다는 것도 오해입니다.” 윤 대표는 코스 요리엔 먼저 도수가 낮고 곡향이 은은한 차(茶) 같은 전통주로 시작해 해산물은 산미가 있는 술, 고기는 요리 따라 다르지만 솔잎이나 연잎을 넣어 탄닌 성분이 있는 약주 등을 마실 것을 권했다. 갈비찜 같은 요리엔 단 술이 잘 어울린다고 한다. 식후주로는 혼돈주(소주와 탁주를 섞은 술)나 과하주(過夏酒)처럼 알코올 도수가 낮지 않은 술을 취향대로 마시면 된다.“일본식 주세법을 따랐다가 지금도 원료를 쌀로 하고 일본식 입국을 쓴 술만 청주로 분류됩니다. 수많은 우리 맑은 술이 약재를 넣은 것도 아닌데 ‘약주’예요. 또 탁주·약주에 과실, 채소류를 녹말 대비 일정량 이상 넣지 못하게 돼 있어요. 복분자를 많이 넣고 싶어도 그러면 안 되는 거지요. 불합리한 법은 고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곳에선 대항해 시대의 해적 같은 무법자들이 판을 치게 마련이다. 최근 빈발하는 랜섬웨어(ransom·몸값+software·소프트웨어) 해킹이 딱 그 꼴이다. 해커에게 데이터를 인질로 잡히면 ‘몸값’을 내야 시스템을 복구할 수 있는데, 망망대해에서 해적을 만난 상선처럼 당장은 공권력에 신고해도 별 도움이 안 된다. 당하지 않으려면 자위력을 갖춰야 하는데, 작은 배들은 인식도 부족하고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투자를 잘 하려 하지 않는다. 해적에게 통행세를 뜯기던 시절이 다시 오고 있다. 최근 국내 대형 온라인서점 예스24가 랜섬웨어 해킹을 당했다. 도서 구매와 공연 티켓 예매, 디지털 콘텐츠 다운로드 등이 중단돼 매출 피해가 이달 9일부터 약 5일 동안 100억 원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시스템이 거의 정상화됐다지만 해킹으로 개인정보 유출이나 저작권 침해가 있었는지는 향후 조사 결과를 지켜봐야 안다. 가능성은 작지만 만에 하나 원전 운용 시스템이나 ‘…페이’가 해킹을 당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예스24는 사태 초기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에 신고는 했지만 홈페이지엔 ‘시스템 장애’라며 해킹 사실을 밝히지 않다가 뒤늦게 인정했다. 16일엔 “랜섬웨어 공격이라는 특수성상 해커가 외부 반응을 감시하거나 추가 위협을 가할 수 있어서 정보 공개 수위와 시점을 신중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며 양해를 구했다. 예스24는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회사여서 해킹 사실을 숨기기 어려웠을 뿐이라는 시각도 있다. 최근 제조업체를 겨냥한 랜섬웨어 공격이 부지기수지만 드러나는 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한다. 정부에 신고해 봐야 시스템을 복구해 주는 것도 아니니, 그냥 쉬쉬하며 해커에게 대가를 지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국제 랜섬웨어 대응 이니셔티브(CRI)의 일원인 한국은 CRI의 기조에 따라 피해 기업에 ‘대가를 지불하지 말라’는 권고를 하고 있다. 먼저 개선해야 할 것은 걸음마 수준인 다수 기업의 사이버 보안 의식이다. 2023년 알라딘 전자책 유출 사건을 계기로 대한출판문화협회가 보안 실태조사를 했지만 예스24는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보안 업데이트를 중단한 구닥다리 윈도 운용체제(OS)를 일부 서버 시스템에 쓰는 등 보안이 전반적으로 허술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요즘 해킹은 점점 첩보영화를 닮아가는 것 같다. 고도의 기술을 가진 해커가 아니라도 인공지능(AI)으로 쓸 만한 랜섬웨어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최근 불거진 SK텔레콤 해킹은 침투 후 잠복 기간이나 정보 유출 규모로 미뤄 볼 때 특정국과 연관된 해커의 소행이 아니냐는 의심마저 나오고 있다. 미국이 CRI를 주도하자 중국과 러시아는 ‘사이버 안보 협력 협정’을 체결하는 등 진영에 따라 해킹 대응도 갈라지고 있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의 ‘토끼발’(세계를 위협하는 악성 코드)이 마냥 공상 같지가 않다. 대항해 시대의 해적은 각국이 해군력을 강화하고 단속하면서 비로소 사라졌다. 비트코인이 있기에 ‘보물섬’을 따로 마련할 필요도 없는 사이버 해적은 잡기가 훨씬 까다로울 것이다. 당장은 기업들이 경각심을 갖고 보안 백업 시스템을 마련하는 한편, 정부와 정보를 공유하고 협력해 대처하는 수밖에 없다.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