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왔다 1월 1일이 왔다 모든 날의 어미로 왔다 등에 해를 업고, 해 속에 삼백예순네 개 알을 품고 왔다 먼 곳을 걸었다고 몸을 풀고 싶다고 환하게 웃으며 왔다 어제 떠난 사람의 혼령 같은 새 사람이 왔다 삼백예순다섯 사람이 들이닥쳤다 얼굴은 차차 익혀나가기로 하고 다 들이었다…
죽음은 자연스럽다 캄캄한 우주처럼 별들은 사랑스럽다 광대한 우주에 드문드문 떠 있는 꿈처럼 응, 꿈 같은 것 그게 삶이야 엄마가 고양이처럼 가릉거린다 얄브레한 엄마의 숨결이 저쪽으로 넓게 번져 있다 아빠가 천장에 나비 모빌을 단다 무엇이어도 좋은 시간이 당도했다 (하략) ―김…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
높새가 불면 / 당홍 연도 날으리 향수는 가슴에 깊이 품고 참대를 꺾어 / 지팡이 짚고 짚풀을 삼어 / 짚새기 신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 슬프고 고요한 / 길손이 되오리 높새가 불면 / 황나비도 날으리 생활도 갈등도 / 그리고 산술도 / 다 잊어버리고 백화를 깎아 /…
왼손등에 난 상처가 오른손의 존재를 일깨운다 한 손으로 다른 손목을 쥐고 병원으로 실려오는 자살기도자처럼 우리는 두 개의 손을 가지고 있지 주인공을 곤경에 빠뜨려놓고 아직 끝이 아니라고 위로하는 소설가처럼 삶은 늘 위로인지 경고인지 모를 손을 내민다 시작해보나마나 뻔한 실패를 향…
오늘 밥풀은 수저에서 떨어지지 않네 오늘 밥풀은 그릇에서 떨어지지 않네 오늘 밥그릇엔 초저녁 별을 빠뜨린 듯 먹어도 먹어도 비워지지 않는 환한 밥풀이 하나 있네 밥을 앞에 놓은 마음이 누룽지처럼 눌러앉네 떨그럭떨그럭 간장종지만 한 슬픔이 울고 또 우네 수저에 머물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가지 끝에 서서 떨어졌지만저것들은나무의 내장들이다어머니의 손끝을 거쳐어머니의 가슴을 훑어 간딸들의 저 인생 좀 봐어머니가 푹푹 끓이던속 터진내장들이다―신달자(1943∼ )
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주소서, 나의 눈물에 해당하는…… 산비탈과 먼 집들에 불을 피우시고 가까운 곳에서 나를 배회하게 하소서. 나의 공허를 위하여 오늘은 저 황금빛 열매를 마저 그 자리를 떠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내게 약속하신 시간이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기적들을 해가 지…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황인찬(1988∼)한눈에 반할 때가 있다. 처음 본 그 순간에 결정된다. 마음…
세상의 모든 물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부력, 상인은 새끼를 밴 줄도 모르고 어미 당나귀를 재촉하였다 달빛은 파랗게 빛나고 아직 새도 깨어나지 않은 어두운 길을 온몸으로 채찍 받으며 어미는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었다 세상으로 가는 길 새끼는 눈도 뜨지 못한 채 거꾸로 누워 구름처럼 둥…
어린 강아지를 만지듯 잇몸에 손가락을 대본다한 번도 알지 못하는 감각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일들이 일어나서 살 만한 것인가이빨로 물어뜯는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은 말한다이를 잘 숨기고 필요할 때 끈질기게 물어뜯으라고이렇게 부드러운 말 속에피의 비린 맛이 숨어 있다니그러나 그들은 늘 자신…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나의 시작이다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한 구절…
타는 가을 산, 백운 계곡 가는 여울의 찬 목소리야트막한 중턱에 앉아 소 이루다추분 벗듯 고요한 소에 낙엽 한 장 떠지금, 파르르르 물 어깨 떨린다물속으로 떨어진 하늘 한 귀가붉은 잎을 구름 위로 띄운다마음이 삭아 바람 더는 산 오르지 못한다하루가 너무 높다 맑은 숨 고여저 물, 오래…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빈 호주머니여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그간의 일들을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김사인(195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