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인 파산의 늪에 빠졌다.”
최근 일본에선 다중채무자, 이른바 ‘빚 돌려막기’를 하는 채무자들이 급증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것을 빗대 이 같은 표현을 쓰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사회적 위기감이 커지자 일본 정부는 유관기관 대책회의를 갖고 대응에 나섰지만, 구조적 문제점이 여전하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특히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이 상당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진 가계의 ‘부채 버블’이 점차 커지면서 일본 경제와 사회에 현재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도쿄신문은 올 5월 “코로나19 유행을 계기로 증가한 개인 대출이 2022년 이후 32개월 연속 증가하고 있다”고 전했다. 일본 대금업협회에 따르면 일본의 평균 가계부채는 655만 엔(약 6100만 원·2023년 기준)으로, 평균 연봉인 459만5000엔(약 4300만 원)을 훌쩍 웃돈다. 여기에 고물가, 저임금, 고금리의 ‘삼중고’가 이어지며 채무자들의 상환 부담이 커지고 있다. 일본에선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 12년 만에 ‘개인 파산자’ 최고치
블룸버그통신은 지난해 말 일본의 개인 파산 신청자가 8만 명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8만2668명이 개인 파산을 신청한 2012년 이후 12년 만에 최고치다. 후지뉴스네트워크(FNN)는 최근 “올 1∼8월 일본 전국에서 휴업, 폐업, 해산한 기업(자영업자 포함)이 4만7078건에 달했다. 전년 동기 대비 약 4000건(9.3%) 늘었다”고 전했다. 채무상담을 진행하는 한 시민단체 사무국장은 도쿄신문에 “물가는 뛰는데 수입은 감소하거나 제자리”라며 “모바일 등 대출 방법이 간편해진 것도 빚이 느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일본 정부는 다중채무자 대책회의를 열었다. 다중채무자는 세 곳 이상의 대부업체들로부터 돈을 빌린 이로, 2021년 114만 명에서 지난해 140만 명으로 늘었다.
일본에서 채무 상환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택하는 길은 크게 ‘개인 파산(자기파산)’이나 ‘개인 회생(개인 재생)’이다. 개인 회생은 소득이 있는 사람이 일부 채무 변제 후 나머지를 면책받는 갱생형 제도. 이에 비해 개인 파산은 소득이 없는 사람이 재산을 청산한 후 100% 면책받는 청산형 제도다.
일본 사법통계연보에 따르면 2023년 개인 파산은 7만8215건으로, 개인 회생(9440건)보다 8배 이상 많았다. 한국에서 개인 파산이 개인 회생의 3분의 1 수준인 것과 비교하면 정반대다. 일본에서 개인 파산 신청자가 많은 건 개인 회생의 경우 매달 안정적인 수입을 증명해야 해 비정규직, 프리랜서 등은 선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개인 파산을 선택해도 변호사 등 일부 전문직을 제외하면 일반 직장인에게 해고나 취업 제한 등의 불이익은 없다. 게다가 일본에서 개인 파산은 개인 회생에 비해 비용이 적게 들고, 절차도 간단하다. 이에 따라 금융업계 등에선 “제도적으로 힘들게 돈을 갚기보다 빚 탕감을 노린 개인 파산을 유도하는 잘못된 정책으로 개선이 필요하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 英 ‘부채 구제명령’으로 채무자 지원
유럽에서도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등을 포함한 개인 채무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정부 차원에서 다양한 구제 제도를 내놓고 있다. 영국의 ‘부채 구제명령(DRO·Debit Relief Order)’이 대표적이다. 영국은 2009년 DRO를 도입해 감당하기 힘든 빚을 진 채무자가 개인 파산으로 가지 않고, 채무를 면제받도록 하고 있다. 채무자가 공인 중재기관을 통해 신청하면 1년간 채권 추심이 중단되고, 잔여 채무가 면제된다.
영국 잉글랜드 성인 442명 중 한 명이 이 제도를 이용할 만큼 이용도가 높다. 이 제도를 이용한 이들 중에도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이 적잖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 제도는 문턱을 낮춰 실효성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해 영국 금융당국은 탕감 가능한 부채 한도를 3만 파운드(약 5700만 원)에서 5만 파운드(약 9500만 원)로 높였다.
황인찬기자 hic@dong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