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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개월을 하루 한끼 연명 63kg 몸무게가 38kg으로 줄어(일)

28개월을 하루 한끼 연명 63kg 몸무게가 38kg으로 줄어(일)

Posted February. 22, 2010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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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드럼부대 소속이었다. 기상과 취침 시간을 알리는, 전투와는 거리가 먼 부대였다. 그런 그에게 파병 명령이 떨어졌다. 지도를 펼쳐서야 코리아라는 낯선 나라를 찾을 수 있었다. 그해 봄은 화창한 날씨조차 두렵게 느껴졌다. 전선에 배치된 지 사흘 만에 그는 스스로의 운명을 선택할 권리조차 잃었다. 28개월의 포로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625 최대 전투가 벌어진 1951년 봄

열아홉 살의 테드 로즈 이병은 1951년 3월 4일 영국 글로스터연대 소속 병사 200여 명과 함께 한국 땅을 밟았다. 한 달 보름 남짓 전투훈련을 받은 로즈는 4월 22일 경기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임진강변의 본부중대에 배치됐다.

부대의 구조도 익숙지 않은 첫날, 중공군의 대반격이 시작됐다. 2만7000여 명에 이르는 인()의 장막이 설마리 지역을 에워쌌다. 이날 전투는 625전쟁을 통틀어 중공군의 최대 공습이었다. 하지만 글로스터연대는 4000여 명에 불과했다.

임진강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군이 가장 많이 희생된 전투였다. 140명이 죽고 900명이 다쳤다. 로즈 이병을 포함해 포로가 526명에 달했다. 참패였지만 이들의 항전이 없었다면 중공군은 5월이 되기 전 서울을 함락했을 것이다.

보급병이던 로즈 이병은 쉴 새 없이 고지를 오르내리며 탄약과 식량을 날랐다. 사흘째인 4월 24일, 본부중대의 창고는 탄약 한 발, 식량 한 점 없이 깨끗이 비었다. 이튿날 오전 10시 긴급명령이 떨어졌다. 뿔뿔이 흩어져라! 그리고 대규모 퇴각이 시작됐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다. 사방은 이미 중공군 천지였다.

중공군은 포로들을 이끌고 북으로 올라갔다. 미군 정찰기를 피해 낮에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포로들에게 지급된 음식이라곤 무슨 씨앗 같은 것뿐이었다. 포로들은 그걸 새 모이라고 불렀다. 5월 15일 압록강변의 한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열아홉 밤을 걸었다.

아무런 기약 없던 포로생활

포로수용소라지만 철조망이나 감시초소 따위는 없었다. 그저 민가였다. 나중에 이곳은 벽동포로수용소로 불렸다. 화장실이라도 가려면 모두 일어나야 할 정도로 좁은 방에 10명씩 수용됐다.

마을 중간 중간 중공군이 보초를 섰다. 탈출은 어렵지 않았지만 시도하는 이는 드물었다. 마을을 빠져나가면 바로 평지여서 숨을 곳이 없었다. 더욱이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다. 한 장교는 7번 탈출했지만 모두 붙잡혔다.

붙잡히면 동굴 같은 곳에 갇혔다. 처음에는 5일, 그 다음은 7일 하는 식으로 수감 기간이 늘어났다. 동굴에서 풀려나면 다른 포로들 앞에서 자아비판을 하도록 했다.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중공군은 포로들의 표정을 살폈다. 웃는 사람이 있다면 장난을 치는 것으로 간주해 다시 동굴로 보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북한군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그곳 생활은 더욱 끔찍하다는 소문이 흉흉했다.

오전에는 주로 나무를 하고, 오후에는 세뇌교육을 받았다. 식사는 하루 한 끼만 제공됐다. 재료를 알 수 없는 가루였다. 한 번은 고기를 달라고 아우성치자 포로 400여 명에게 고작 닭 6마리가 나왔다. 몸이 아프다고 하면 갈색 가루약을 줬다. 그래도 낫지 않으면 그 다음은 흰색 가루약이었다. 어디가 아프든 약은 똑같았다.

63kg이었던 로즈 이병의 몸무게는 몇 달 새 38kg이 됐다. 벽동수용소에서만 동료 3040명이 숨졌다. 그가 목격한 것만 그랬다. 휴전협정을 맺는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는 불안과 초조 속에 무더운 1953년 8월을 맞았다. 그가 풀려난 것은 그해 8월 16일, 정전협정 체결(7월 27일) 20일 만이었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는 데 한 달 보름이 걸렸다.

잊히지 않는 기억들

지난달 말 영국 런던 근교의 로즈 씨 집을 찾았다. 작은 정원이 딸린 단층짜리 주택이었다. 이제 78세인 로즈 씨에게 포로생활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물었다. 로즈 씨는 한참을 망설이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짧게 말했다. 잠시 뒤 그는 다시 입을 뗐다.

포로수용소를 향해 밤마다 행군을 할 때였지. 중공군 부상자들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나게 됐어. 그들에게 식사가 나왔어. 그중 한 명은 양 손이 모두 없더군. 그 사람이 어떻게 음식을 먹었는지는 몰라. 더는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날이 1951년 4월 27일이지.

로즈 씨가 어렵사리 끄집어낸 60여 년 전의 기억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는 빛바랜 수첩을 꺼내왔다. 수첩에는 수용소에 있던 동료들의 이름과 계급, 입대일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따금 노래 가사도 있었다. 왜 이런 걸 적었느냐고 묻자 뭐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 죽을 것 같았다고 했다. 수첩 중간부분이 찢겨 있었다. 중공군이 뭘 적었는지 알아본다며 찢어갔다고 했다. 그의 삶의 한 부분도 그렇게 찢겨 있는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