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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대물림 정치'

Posted March. 31, 2004 22:50,   

2000년 5월 오부치 게이조() 당시 일본 총리가 뇌경색으로 사망하자 오부치 가문은 가족회의를 열었다. 지역구의 중의원 선거에 누가 나갈지를 정하는 자리였다. 1남2녀 중 일러스트레이터인 장녀(32)와 회사원인 장남(28)은 정치인 체질이 아니다며 손사래를 쳤다. 결국 성격이 활달한 차녀 유코(26)가 반강제로 선거에 나섰다. 유권자들은 오부치라는 이름만 보고 표를 몰아줬다.

일본 정계의 대물림 전통은 뿌리 깊다. 지난해 11월 총선거에서 당선된 의원 중 세습의원은 122명으로 전체의 4분의 1에 이른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의 각료 17명 중 8명이 2세 또는 3세 정치인이다. 고이즈미 총리도 조부 때부터 일군 지역 기반을 물려받아 정계에 진출했다. 아베 신조() 자민당 간사장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외손자이자 아베 신타로() 전 외상의 아들이다. 자민당이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를 비례대표 후보에서 제외시키자 부친이 나카소네의 방해로 총리의 꿈을 못 이룬 한()을 간사장인 아들이 갚았다는 해석이 나돌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대를 이어 정치를 업으로 삼으려는 2세 정치인 후보가 부쩍 늘었다. 1970년대 한국 정치를 주름잡은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 세 전직 대통령의 자녀들이 이번 총선에 출사표를 냈다. 감옥에 갇힌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외치며 출마한 아들의 스토리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미국의 부시 가문이 두 명의 대통령을 배출한 것을 보면 정치세습이 동아시아만의 특수 현상은 아닌 듯하다.

일본에서는 세습정치인을 지반(지역구) 가방(돈) 간판(가문)을 함께 물려받은 행운아라고 부른다. 달리기 경주로 치면 이들은 남보다 몇 발짝 앞서 출발선에 선 셈이다. 일본 정계는 정치인이 사망하면 자녀가 일정 기간 같은 지역구에서 출마하는 것을 금지하는 제도를 추진하고 있다. 디지털시대에 정치세습이 더 활발해진 것은 한국 정치의 아이러니다. 선대의 후광이 큰 만큼 책임도 무거워져야 한다. 가문의 이름을 팔아 단물을 빼먹을 생각으로 나선 2세는 없다고 믿고 싶다.



박원재 parkw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