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과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 등 남북간의 과거사에 대해 김정일북한국방위원장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황태연(46) 동국대 교수의 27일 발언을 놓고 파문이 일고 있다.
그의 발언은 올 봄으로 예상되고 있는 김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앞두고 과거사문제에 대한 논란이 증폭되고 있는 가운데 나왔다. 특히 김영삼 전 대통령을 비롯한 보수층에선 김국방위원장의 답방을 결사 반대하고 있다.
이처럼 미묘한 시점에서 이 정부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그로 꼽히는 황교수가 문제의 발언을 던졌다. 평소 여권 핵심부의 브레인으로 자처해 온 그는 집권 여당인 민주당의 부설 국가경영전략연구소 부소장직까지 맡고 있다.
벌써 일각에선 그의 발언이 여권 핵심부와의 교감 속에서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의문까지 제기되고 있다. 물론 민주당과 청와대 관계자들은 이 같은 의문을 일축하고 있다. 문제의 발언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임박한 듯 보이는 김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앞두고 정부나 여권으로선 어떤 형태로든 입장을 정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그의 발언이 여권의 정면돌파를 위한 신호탄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정부 여당은 김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 때 남북간 과거사는 가능한 한 거론하지 않고 가야한다는 생각이지만 덮고 싶다고 덮어둘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은 사실이다. 여권 일각에서도 625 전범과 과거사 사과는 언젠가는 한번 거르고 가야 할 문제로 차제에 이를 공론화하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황교수의 발언이 시기적으로, 국민 정서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 발언이었다는 데 대해서는 이론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그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625 전쟁 책임 문제는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책임소재 여하에 따라서는 전쟁의 성격이 달라지고 남북한 정권의 정통성까지 부인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만큼 복잡 미묘한 문제에 대해 김정일국방위원장이 625 전쟁 때 유아(당시 8세)였으므로 책임이 없다 증거가 없어 조사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는 식으로 말한 것은 누구든 쉽게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아라고 하지만 북한 사람들은 김일성주석이 7세이던 1919년에 31운동을 뒤에서 지도했다고 믿고 있고, 같은 논리로 위대한 장군인 김국방위원장도 625 전쟁(그들로서는 민족 해방전쟁) 때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황교수의 발언에 여권 관계자들도 한숨을 내쉬고 있다. 한 고위 관계자는 도대체 지금 이 시점에 그런 발언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개탄했다. 다른 관계자들은 그의 발언이 김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앞두고 과거사 사과 문제를 둘러싼 보혁대결을 가열시킬 가능성에 대해서 크게 우려했다.
황교수의 발언은 궁극적으로 국민의 보편적 정서에 맞지 않은 남북관계 발언이 가져올 수 있는 혼란의 한 단적인 예를 보여주면서, 김대중()대통령의 대북정책의 속도와 추진 양태, 그리고 국내정치와의 관련성에 대한 의혹을 더 깊게 하고 있는 것이다.
윤승모기자 ysm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