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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학 거친 장쩌민의 남자, 한반도 관련 보폭 커질 듯 (일)

북유학 거친 장쩌민의 남자, 한반도 관련 보폭 커질 듯 (일)

Posted November. 17, 2012 02:58,   

상하이 관료 출신이 아니면서도 장쩌민() 전 주석이 이끄는 상하이방()의 책사 역할을 했을 정도로 정치 감각이 뛰어나다. 현 정치국 위원(25명) 중 유일한 해외 유학파인 그는 북한통이기도 하다.

조선족이 키운 북한 전문가

1946년 11월 랴오닝() 성 타이안()에서 지난()군구 포병 부사령관을 지낸 장쯔이() 소장(준장에 해당)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인민해방군 포병부대를 창설한 주역 중 한 명이다. 장더장이 태자당(혁명 원로 자녀 그룹)과 가까운 이유다.

지린() 성 창춘()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그는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68년 11월 옌볜() 조선족자치주 왕칭() 현 뤄쯔거우()로 하방()됐다. 그의 인생에서 첫 변곡점을 맞은 게 이때였다. 조선족 최초로 중국에서 각료를 지낸 이덕수(69) 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을 만난 것.

왕칭 현 당위원회 상무위원이던 이덕수는 그를 왕칭 현의 선전조 간사로 천거했다. 이어 1972년 청강생 자격으로 옌볜대에서 공부할 수 있게 했다. 대학에서 조선어를 전공한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1978년 북한 김일성종합대 교환학생을 신청해 2년간 경제학을 공부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같은 과 후배가 된 셈이다. 이 경력은 평생의 밑천이 됐다.

1983년 3월 옌볜 주 서기였던 이덕수는 유학에서 돌아온 장더장을 옌지() 시 부서기로 발탁했다. 이때부터 중앙지도부의 눈에 들기 시작해 1985년 옌볜 주 부서기, 1986년 국무원 민정부(행정안전부에 해당) 부부장에 오르는 출세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장쩌민의 후광

1989년 톈안먼() 사태를 계기로 당 총서기에 오른 장쩌민은 이듬해 3월 첫 해외 방문지로 북한을 택했다. 수행단에 포함됐던 장더장은 유창한 이북 사투리를 구사해 북-중 양측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장쩌민은 그해 10월 그를 옌볜 주 서기로 임명해 대북 창구 역할을 맡기는 등 두터운 신임을 보여 줬다. 장쩌민은 1991년 1월에는 직접 옌볜을 찾아 격려하기도 했다.

장쩌민의 후광에 힘입은 그는 1992년 당 중앙후보위원에 뽑힌 데 이어 1997년부터 내리 3번 연속 중앙위원으로, 2002년부터는 2회 연속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는 탄탄한 경력을 쌓았다. 장더장은 저장 성 서기로 있던 2002년 항저우()에 시찰 온 장쩌민과 함께 이탈리아 가곡 오 솔레미오를 번갈아 불러 마치 부자()와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호사가들은 이를 빗대 장더장의 이름 앞뒤를 바꿔 이라며 장쩌민의 성을 붙이기도 한다.

이런 연유로 장더장이 2002년 처음 중앙정치국 위원에 올랐을 때 5년 뒤에는 당연히 최고 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하지만 시진핑 리커창이 부상하면서 5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광둥 성에서의 시련

장더장을 말할 때면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게 광둥() 성 성장 재직(2002년 11월2007년 12월) 당시 중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련의 사건들이다. 중국 국내총생산(GDP)의 8분의 1, 무역액의 3분의 1을 자랑하는 광둥 성은 지린 성 촌뜨기에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가 부임한 이듬해 3월 후베이() 성에서 온 농민공 쑨즈강(당시 27세)이 임시거류증을 휴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용소에 수용됐다가 간수들에게 맞아 숨졌다. 또 그해 11월 지역신문인 난팡()도시보가 광저우에서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발생했지만 당국이 이를 숨겨 왔다고 폭로해 퇴진 운동까지 벌어졌다.

당시 현지인들은 근묵자흑 근주자적( )이라더니 세계에서 가장 사악하고 무뢰한 북한에서 유학해 (장더장이 우리말은 안 듣고) 자기 방식만 고집한다며 비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신문 기자들과 책임자를 횡령과 탈세 혐의로 해직하는 방식으로 정면 대응했다. 그러나 2005년 12월 베이장() 강 카드뮴 오염 사건과 같은 달 산웨이() 시 시위대 발포 사망(14명) 사건으로 언론에서 파면설까지 거론하는 혹독한 시련도 겪어야 했다.

한반도 문제 직간접 관여할 듯

북한 전문가인 장 상무위원은 한반도 문제에 적잖은 발언권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 총서기와도 관계가 좋아 태자당()과 상하이방의 가교 역할을 할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장 부총리는 2007년 시 부주석의 부친 시중쉰()의 전기에 서문을 쓰기도 했다.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방중할 때마다 영접을 전담했다. 지난해 7월에는 북-중 우호조약 체결 50주년을 맞아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은 물론 김정은을 만나고 왔다. 작년 말 김정일 영결식 때도 중국에서 장 상무위원을 파견한다는 말이 나왔었다. 시진핑 체제에서도 북한의 전략적 중요성이 여전한 만큼 한반도 문제에서 장 상무위원의 행보가 특히 주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1992년엔 옌볜 자치주 경제시찰단을 인솔하고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부인 신수썬(63)은 산둥() 성 하이양() 출신으로 4대 국유은행인 건설은행 부행장을 지냈다.



고기정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