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7월 20일 미 동부시간으로 오후 10시 56분 20초.
달 탐사선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 표면 고요의 바다에 무사히 착륙한 닐 암스트롱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암스트롱은 에드윈 올드린 주니어 달 착륙선 선장과 함께 이글호를 타고 달에 내렸다. 새턴-V 로켓에 실려 우주로 발사된 지 3일 만에 달 뒤편에 도착했고 이어 달을 13바퀴 돈 뒤 착륙지점에 닿았다. 텍사스 휴스턴의 본부 컴퓨터에선 아폴로 11호의 연료가 곧 바닥날 것이라는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하는 등 긴박한 상황이 연출됐다. 암스트롱은 본부와 역사적인 첫 교신을 했다.
휴스턴, 고요의 바다 본부다.(휴스턴)
이글호가 지금 착륙했다.(달)
로저, 고요의 바다.(휴스턴)
우리는 달 표면에 도착했다. 다시 숨을 쉬고 있다. 정말 고맙다.(달)
이윽고 하얀 우주복에 헬멧을 쓴 암스트롱이 착륙선에서 사다리를 타고 천천히 달 표면에 내렸다. 달 표면에 첫발을 내디딘 암스트롱은 이것은 한 인간에 있어서는 작은 첫걸음이지만 인류 전체에 있어서는 위대한 도전이라고 말했다.
이어 착륙선 이글호의 선장인 올드린이 암스트롱과 합류했다. 두 사람은 달의 낮은 중력 때문에 마치 캥거루가 뛰는 것처럼 팔짝팔짝 달 표면을 뛰어다녔다. 당시 사령선에 타고 있던 마이클 콜린스 선장은 착륙선보다 60마일(약 96.5km) 상공에 떠 이들이 무사히 귀환하기를 기다렸다. 이들은 2시간 10분 동안 달 표면을 밟으면서 TV 카메라와 과학장비를 설치하고 암석조각을 채집했다. 이때부터 1972년까지 미국은 아폴로 17호까지 발사했고 12명의 우주인이 달을 밟을 수 있었다.
암스트롱의 달 착륙은 이전까지 우주개척 분야에서 옛 소련에 뒤졌던 미국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계기가 됐다. 또 인류에게 우주에 대한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가정에선 어른과 아이들이 넋을 잃고 TV를 지켜봤다.
암스트롱은 1930년 8월 5일 오하이오 주의 조그만 마을인 위퍼코네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스티븐 암스트롱은 주 회계감사원이어서 암스트롱은 어렸을 때 오하이오 주의 소도시를 여러 곳 옮겨 다녀야 했다. 암스트롱은 6세 때 아버지와 함께 틴 구스로 알려진 포드 비행기를 타보면서 비행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고교 시절 이글 스카우트에 가입해 활동했고 퍼듀대에서 해군 장학금을 받고 항공공학을 전공했다.
대학 재학 중 해군에 입대해 전투기 조종사로 활동했으며 625전쟁에 참전해 78차례 전투비행 임무를 수행하고 1952년 8월 제대했다. 당시 그는 서울 수복에 큰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으며 625전쟁에서 임무를 마친 뒤에는 다시 퍼듀대로 돌아와 1955년 졸업장을 받고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우주비행사의 길을 걷는다.
1962년 제2기 우주비행사로 선발돼 1966년 제미니 8호의 지휘조종사로 첫 우주비행을 했다. 아폴로 11호 선장으로 무사히 달에 착륙하고 지구로 돌아온 그는 이후 연구개발 분야에서 주로 활동했다. 신시내티대에서 공학교수로 강단에 서기도 했다. 우주인으로서의 명예에 집착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그는 공식석상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올해 5월 호주의 공인회계사 모임에서 생애 마지막 인터뷰를 했다. 그는 당시 달 착륙에 성공할 확률은 50% 정도, 달 탐사 이후 지구로 무사히 돌아올 확률은 90%라고 믿었다고 말했다. 암스트롱은 1960년대에 비해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NASA의 야망을 급격히 줄인 것은 아주 서글픈 일이라며 NASA는 학생들의 야망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고무하는 가장 성공적인 공공기관으로 활동해왔다고 강조했다. 달 착륙이 조작됐다는 음모론에 대해선 사람들은 음모론을 좋아하지만 언젠가는 누군가가 달에 가서 내가 남겨두고 온 카메라를 가져올 것으로 확신하기 때문에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영해 손택균 yhchoi65@donga.com sohn@dong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