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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그로피우스와 무지개 색

Posted February. 20, 2005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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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화가를 꿈꾸던 나는 고흐와 마티스의 선명한 원색에 반해 중간색, 탁한 색을 경멸했다. 미대에 진학할 용기가 없어 타협책으로 진학한 건축과에서도 원색의 문화만 좇았다. 건물뿐 아니라 설계도면에서도 원색을 즐겨 썼던 르 코르부지에, 선명한 이념만큼이나 강렬한 원색을 선호했던 모더니즘 시각문화의 선구자들, 이들의 영향을 받아선지 그 시대 우리나라의 금성 선풍기, 새나라 자동차, 새마을운동이 바꿔 놓은 농촌 가옥의 색깔은 모두 빨갛고 파란 원색이었다.

원색을 선호하던 시대는 지났다. 용사마의 머플러, 신문 참살이(웰빙) 면의 사진, 강남 아파트의 인테리어, 심지어 거리의 꽃 장식에서도 강렬한 원색은 사라지고 부드럽고 몽롱한 파스텔 색이 주조를 이룬다. 원색은 어쩐지 촌스럽고 설익어 보인다. 마치 북한의 홍보물처럼 말이다. 제도용 색연필조차도 파스텔 톤으로 제작되는 시대가 되었다.

중간색과 함께 회색도 소생했다. 흑백이 분명했던 모더니스트들에게 회색은 정체가 아리송한 회색분자의 색이었다. 그러나 요즘 멋쟁이들은 다양한 톤의 회색을 즐긴다. 사실 이분법의 굴레를 넘어버리면 회색은 이것과 저것을 동시에 포괄하는 속 깊은 색이다. 사르트르의 지성인의 변명에서 회색은 계급 갈등을 내면화해서 그 극복을 갈구하도록 운명 지어진 지성인의 삶의 색깔이었다.

스푼에서 도시까지 새로운 미학으로 생활세계를 재창조하고자 했던 바우하우스의 창시자 그로피우스는 좋아하는 색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색색 가지 모두입니다라고. 하나의 색을 주장하기에 앞서 여러 색의 조화를 귀하게 여겼던 그였기에 클레, 칸딘스키 같은 개성 강한 여러 거장을 한 지붕 아래 모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기는 한두 색 만으로는 무지개도, 색동저고리도 만들 수가 없다. 이분법과 편 가르기, 선명성과 색깔논쟁이 난무하는 우리의 정치권, 문화권에서는 이 평범한 진리를 잊고 있는 것 같다.

강 홍 빈 객원논설위원서울시립대 교수

도시계획 hbkang@uo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