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12월 11일

하필이면 저 자리에…‘목에 가시’ 같은 동아일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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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년 5개월의 공사가 끝났습니다. 1926년 12월 10일이었죠. 이튿날 이삿짐을 경성부 화동 138번지에서 광화문통 139번지로 옮겼습니다. 그곳엔 르네상스식 3층 건물이 우뚝 서 있었죠. 동아일보 광화문사옥입니다. 당시로서는 손에 꼽을 정도의 고층건물이었죠. 창간 후 7년 가까이 세 들어 지내던 화동의 옛 한옥과는 작별했습니다. 예전 셋집은 전보가 바로바로 도착하지 않는 외진 곳이어서 신문 제작에 지장이 컸습니다. 비좁은데다 비가 새고 무더위와 강추위에도 무방비였죠. 오죽했으면 사원들이 1924년 1월초 사옥을 새로 지어달라고 중역회의에 건의문을 내기까지 했겠습니까. ‘통신이 낙후한 치명적 불편이 있고 건강을 해쳐 능률을 떨어뜨리는 점은 말로 다 할 수 없다’면서요.

①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16년 6월 27일자 3면에 실린 총독부 청사진 ②매일신보 1923년 5월 16일자 3면에 실린 총독부 청사 상량식 모습 ③총독부 청사 건설에 뒤질세라 1925년 9월 27일 오전 10시 광화문통 네거리에서 열린 동아일보 신사옥 기공식

입주는 조선총독부가 낙성식을 한 지 2개월 지난 때였습니다. 광화문우편국이 이웃이었고 북으로는 총독부, 남으로는 경성부청이 있었죠. 일제 최고 권력기관을 감시할 맞춤한 위치였습니다. 괜히 총독부 심기를 건드리는 거 아닐까라는 우려에 이곳을 낙점한 인촌 김성수는 ‘피해서 싸우기보다 맞서 싸우는 것이 더 유리하고 우리 땅에서 우리가 피할 것은 없소’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하루는 총독부 경무국장이 들러서는 현장에 있던 인촌에게 ‘서울 장안엔 좋은 곳이 얼마든지 있는데 하필이면 여기다 짓기로 했소?’라고 언짢은 듯 말했죠. 인촌은 ‘경무국을 위해서죠’라고 답했습니다. 어리둥절해 하는 경무국장에게 인촌은 ‘화동 같은 구석바지에 있으면 모셔갈 때 불편하니까요’라고 했죠. 농담 속에 뼈가 있었습니다.

자금난과 제2차 무기정간, 주필 송진우 등의 재판 및 수감 등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동아일보 신사옥 공사는 꾸준히 진행됐다. ①동아일보 1926년 1월 1일자 1면에 실린 공사 현장 ②같은해 4월 21일자 2면에 실린 공사 장면 ③역시 같은해 9월 16일자 2면에 실린 외장공사 모습
1924년 창간기념일에 사옥 건축을 약속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역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자금이었죠. 주주들이 1주당 12원50전을 내기로 했으나 약속을 지킨 주주는 별로 없었습니다. 1925년 2월 미납 주주들에게 2차 독촉장을 보내야 했죠. 총 공사비 14만여 원에 막판까지 7만 원이 비었습니다. 이 판국에 1926년 3월 총독부가 내린 2차 무기정간은 결정타였고요. 결국 인촌이 나서야 했습니다. 동생 김연수에게 3만 원을 얻어 쓰고도 모자라 양아버지 김기중에게 편지를 올렸죠. ‘이 일로 밤이면 잠이 오지 않고 심신이 피로해 있을 뿐입니다.···백번 생각해도 다른 계책이 없으므로···2만5000원만 하송(下送)하여 주시면 지장이 없겠습니다.’ 가까스로 준공은 했지만 1927년까지 주주들에게 계속 독촉해야 했죠.

①1년 5개월의 공사 끝에 마침내 준공한 동아일보 신사옥의 웅장한 모습. 1926년 12월 11일자 1면에 실렸다. ②옛 화동 사옥에서 동아일보 신사옥으로 이사를 마친 뒤 새사옥 앞에서 동아일보 등불을 들고 만세를 외치는 임직원들. 1926년 12월 13일자 2면 게재

새 사옥으로 옮긴 1926년 12월 11일자 순한글 사설은 새 출발의 다짐이었습니다. ‘이런 것(옛 사옥의 불편)과 싸우던 힘을 모아 정의를 위하여 불의와 싸우고, 자유를 위하여 압박과 싸우고, 진리를 위하여 허위와 싸우고, 이천만 조선 민중의 의와 복을 위하여 큰 싸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했죠. 12월 16일자부터는 ‘옥상에서 본 경성의 팔방’을 8회 연재했습니다. 사통팔달한 황토현 네거리를 빙 둘러보면 조선총독부 조선신궁 경성부청 조선호텔 광화문우편국 조선은행 식산은행 같은 위압적인 신식 건물이 있었습니다. 그 사이사이에 경복궁 경희궁 덕수궁 환구단 창덕궁이 퇴락한 듯 숨죽이고 있어 대조가 됐죠. 오직 기대할 것은 배화여자고보 이화학당 배재학당 등에서 자라나는 젊은이들뿐이었습니다.

1926년 12월 16일자부터 23일자까지 8회 연재한 '옥상에서 본 경성의 팔방' 기사 속 사진을 각각의 위치에 따라 배치했다. 1926년 3층 건물 옥상에서 둘러본 광화문 네거리 주변의 경성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해를 거듭해 깨진 창과 무너진 벽만 남은 낡은 집에서 고생을 하다가, 아름답고 깨끗하고 튼튼하고 쓸모 좋은 새집으로 옮아간 쾌감과 기분이 과연 어떠합니까.’ 이 무렵 2차 무기정간과 함께 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주필 송진우가 인촌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입니다. 새 사옥 입주의 기쁨에 함께 하진 못하지만 ‘기꺼운 웃음을 웃게’ 된다고 마음을 전했죠. 광화문 사옥 입주 때는 사원들 중심으로 조촐한 자축행사만 가졌습니다. 엄동설한의 12월이어서 많은 이들이 참석하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한 듯합니다. 낙성기념식과 기념사업은 이듬해 늦봄인 4월 30일 거행했습니다. 5월 3일까지 푸짐한 볼거리를 마련했고 지방 지국과 분국에서도 각종 기념행사를 치러 그야말로 ‘민족의 대잔치’가 벌어졌습니다.기사입력일 : 2021년 12월 31일
새집이 일다
이천만 민중의 집

一(1)
오늘 우리 동아일보는 낡은 집을 떠나 새집으로 옴김니다. 우리 신문이 창립된 지 칠년 동안 매삭 일백이십원자리 구석지고 조고마한 세ㅅ집에서 협착과 싸호고 불편과 싸호고 구석진 것과 싸호고 녀름이면 지글지글 끌히는 더위와 싸호고 겨울이면 벽틈과 마루 밋흐로 들어쏘는 찬바람과 싸호고 게다가 발매금지며 발행뎡지의 액운과 싸호고 가초가초 신산한 싸홈을 하다가 오늘 서울의 한복판 경복궁 압히오 녯날 륙조 압힌 황토마루 네거리에 하늘을 찌를뜨시 둥두렷이 놉고 텰근 콘크릿으로 불에도 아니타고 지진에도 아니문허지고 바람비에도 아니깍길 굉장한 새집으로 옴겨감니다.

二(2)
그러나 새집으로 왓다고 우리의 싸홈은 끈치는 것이 아님니다. 우리는 이제 서울의 복판에 안젓스니 불편과 싸홀 필요가 업고 넓고 놉고 큰집에 들엇스니 협착과 싸홀 필요가 업고 증긔날로가 왼 집안을 덥히니 치위와 싸홀 필요가 업고、문명의 모든 리긔를 가초앗스니 시간과 정력의 허비와 싸홀 필요가 업고 또 외국손님이 참관을 오더라도 이천만 민중의 표현긔관이라는 대신문의 톄면에 붓그러옴과 싸홀 필요도 업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들과 싸호던 힘을 모도아 정의를 위하야 불의와 싸호고 자유를 의하야 압박과 싸호고 진리를 위하야 허위와 싸호고 이천만 조선민중의 의와 복을 위하야 싸호는 큰 싸홈은 여전히 남어잇고、그러할 뿐더러 더욱 힘잇고 더욱 맹렬할 것입니다. 이에 우리 새집의 뜻이 잇는 것입니다.

三(3)
우리 동아일보가 이 새집을 가지게 된 것이 뉘 힘인가. 이것은 동아일보를 나코、길우고 소중히 녀기고 직히고 『내 것이라』하는 이천만 우리 동포 민중의 힘입니다. 동아일보가 이천만 민중의 심문인 것처럼 이 새집도 이천만 민중의 집입니다. 이천만 민중이 정의와 자유와 진리의 창명을 위하야、또 그네의 의사를 표현하기 의하야 힘과 정신을 모도아 일우어 노흔 귀한 일터요 긔념비입니다. 여긔 이 집의 뜻이 잇고 갑시 잇고 권위가 잇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아직 우리 일의 첫걸음에 지나지 못하는 것을 밋습니다. 우리는 전조선 오백만호에 대문마다 동아일보가 들어갈 날이 멀지 아니할 것을 미듬으로 반드시 이 새집이 협착하고 불편하야 뎨이차、뎨삼차의 증축 개축이 잇슬 날이 멀지 아니할 것을 밋습니다. 우리 민중의 지력과 부력과 민족뎍 운동력이 날로 더욱 커짐을 따라 우리 동아일보의 사명과 실력이 더욱 커질 것은 필연한 일인 까닭입니다.

四(4)
이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더욱 동포에게 바든 부탁이 크고 맛튼 임무가 무거운 것을 깨달아 자못 전전긍긍함을 금치 못함니다. 그러나 우리는 맘과 뜻과 힘을 다하야 동포의 부탁하고 바라는 바를 지어버리지 아니하고 녯 뜻과 새 힘으로 목슴을 내어 노코 나아가기를 한 번 더 맹세하고 아울러 한 번 더 이천만 민중의 전보다 더 한층 애호와 편달이 잇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압헤 잇는 깃븜이 잇고 희망이 잇고 그것을 달하기 위한 현재의 정성과 노력이 잇습니다. 이 깃븜과 이 희망과 이 노력의 결심을 동포와 함께 이날을 축하려 하옵니다.

五(5)
끗혜 우리에게 한 가지 슯픔이 잇습니다. 그것은 우리 동아일보를 시작할 때 가치 일하든 동지 몃 분이 불행히 이미 세상을 떠나 우리와 함께 이 깃븜을 가치하지 못하고 또 본보 주필 송진우 씨가 이 치운 때 텰창 중에 잇서 우리와 가치 새집의 깃븜을 난호지 못하는 것입니다. 원컨댄 디하의 영령들이 우리를 위하야 빌고 옥중의 동지가 건강을 보전하야 속히 가치 일할 날이 오도록 하소서.

새집이 일어서다
이천만 민중의 집

1.
오늘 우리 동아일보는 낡은 집을 떠나 새집으로 옮깁니다. 우리 신문이 창립된 지 7년 동안 매달 120원짜리 구석지고 조그마한 셋집에서 비좁음과 싸우고 불편과 싸우고 구석진 것과 싸우고 여름이면 지글지글 끓이는 더위와 싸우고 겨울이면 벽틈과 마루 밑으로 들이치는 찬바람과 싸우고 게다가 발매금지며 발행정지의 액운과 싸우고 가지가지 신산한 싸움을 하다가 오늘 서울 한복판 경복궁 앞이요 옛날 6조 앞인 황토마루 네거리에 하늘을 찌를 듯이 둥두렷이 높고 철근콘크리트로 불에도 타지 않고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고 비바람에도 깎이지 않을 굉장한 새집으로 옮겨갑니다.

2.
그러나 새집으로 왔다고 우리의 싸움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서울의 복판에 앉았으니 불편과 싸울 필요가 없고 넓고 높고 큰집에 들었으니 비좁음과 싸울 필요가 없고 증기난로가 온 집안을 덥히니 추위와 싸울 필요가 없고 문명의 모든 이기를 갖추었으니 시간과 정력의 허비와 싸울 필요가 없고 또 외국손님이 참관을 오더라도 이천만 민중의 표현기관이라는 대신문의 체면에 부끄러움과 싸울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들과 싸우던 힘을 모아 정의를 위하여 불의와 싸우고 자유를 위하여 압박과 싸우고 진리를 위하여 허위와 싸우고 이천만 조선민중의 의와 복을 위하여 싸우는 큰 싸움은 여전이 남아 있고 그러할뿐더러 더욱 힘있고 더욱 맹렬할 것입니다. 이에 우리 새집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3.
우리 동아일보가 이 새집을 가지게 된 것이 누구의 힘인가. 이것은 동아일보를 낳고 기르고 소중히 여기고 지키고 ‘내 것이라’하는 이천만 우리 동포 민중의 힘입니다. 동아일보가 이천만 민중의 신문인 것처럼 이 새집도 이천만 민중의 집입니다. 이천만 민중이 정의와 자유와 진리의 창명을 위하여 또 그들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하여 힘과 정신을 모아 일구어 놓은 귀한 일터요 기념비입니다. 여기 이 집의 뜻이 있고 값이 있고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아직 우리 일의 첫걸음에 지나지 못하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전조선 오백만호의 대문마다 동아일보가 들어갈 날이 멀지 아니할 것을 믿음으로 반드시 이 새집이 비좁고 불편하여 제2차, 제3차의 증축 개축을 할 날이 멀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 우리 민중의 지력과 부력과 민족적 운동력이 날로 더욱 커짐을 따라 우리 동아일보의 사명과 실력이 더욱 커질 것은 필연한 일인 까닭입니다.

4.
이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더욱 동포에게 받은 부탁이 크고 맡은 임무가 무거운 것을 깨달아 다만 전전긍긍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과 뜻을 다하여 동포가 부탁하고 바라는 바를 지어버리지 않고 옛 뜻과 새 힘으로 목숨을 내놓고 나아가기를 한 번 더 맹세하고 아울로 한 번 더 이천만 민중이 전보다 더 한층 애호와 편달을 해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앞에 기쁨이 있고 희망이 있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현재의 정성과 노력이 있습니다. 이 기쁨과 이 희망과 이 노력의 결심을 동포와 함께 이날을 축하하려 합니다.

5.
끝으로 우리에게 한 가지 슬픔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동아일보를 시작할 때 같이 일하던 동지 몇 분이 불행하게도 이미 세상을 떠나 우리와 더불어 이 기쁨을 같이하지 못하고 또 본보 주필 송진우 씨가 이 추운 때 철창에 갇혀 있어 우리와 같이 새집의 기쁨을 나누지 못하는 것입니다. 원하건대 지하의 영령들이 우리를 위하여 빌고 옥중의 동지가 건강을 보전하여 하루속히 같이 일할 날이 오도록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