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12월 31일

중국인의 노예 신세나 다름없었던 간도 우리 농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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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땅을 일궈 먹던 그녀는 어느 날 날벼락을 맞습니다. 지주와 자경단이 있는 곳에 갔던 남편이 총 맞아 숨진 채 아들 봉식에게 업혀온 겁니다. 아버지의 비명횡사에 아들은 집을 나가버리고 ‘내 땅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던 그녀는 어린 딸 봉염을 이끌고 아들을 찾아 헤맵니다. 그러다 용정에서 지주를 만나 딸과 함께 식모살이로 들어가죠. 한숨 돌릴 무렵 지주는 아내가 친정 간 사이 그녀에게 덤벼듭니다. 공산당이 된 봉식이가 공개처형 되자 지주의 아내는 임신한 그녀를 쫓아내죠. 함께 있다간 공산당 혐의를 받는다나요. 그녀는 비 새는 헛간에서 몸을 푼 뒤 남의 집 젖어미로 갑니다. 돌보지 못한 딸과 갓난아이는 열병으로 숨지고 혼자 된 그녀는 목숨을 이으려고 소금 밀거래에 나섰다가 단속반에 걸려듭니다.



일제강점기 작가 강경애가 1934년 발표한 ‘소금’의 줄거리입니다. 1920년대 간도로 밀려난 우리 소작인의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했죠.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 기적 같’고 ‘지독하게 마음먹고 땅을 파보지만 남는 것은 불행과 궁핍’뿐입니다. ‘소금’은 동아일보 1923년 12월 31일자 3면에 실린 ‘간도농촌 우리 동포의 비참한 정경’과 겹칠 정도로 똑같습니다. 우리 농민은 수확의 60%를 중국인 지주에게 내줘야 했죠. 남은 쌀도 봄에 빌린 양식에 이자를 붙여 갚고 나면 바닥났습니다. 세금과 땔감까지 대신 바치고 겨울에는 손발이 얼어가며 지주의 집안일을 돕지만 돌아오는 건 욕설과 몽둥이찜질이었습니다. 부모의 병은커녕 자식 교육도 챙기지 못한 채 빚만 지고 결국 노예가 돼 처자식까지 팔아먹는 신세들이었죠.



자작농이더라도 고달프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경찰은 조사를 나오면 쌀밥에 닭고기부터 내놓으라고 하고 소송을 제기하면 경위야 어떻든 양쪽에서 벌금과 밥값을 달라며 손을 벌렸죠. 문턱을 넘었다고 문턱세를 뜯어갔다니 할 말이 없습니다. 세무직원들은 소에 확인증을 내주면서 이 꼬투리 저 꼬투리를 붙여가며 돈을 우려먹었죠. 송아지 한 마리에 확인증을 다섯 번 만들다보니 그만 송아지가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소금 거래를 관이 독점한 결과 단속반은 무조건 밀거래를 한다고 트집을 잡아 벌금을 거둬갔죠. 이밖에도 빼앗아가는 돈은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 농민의 이런 원통한 현실은 지난해 12월 1일자 ‘붉은 간도땅과 푸른 해란강은 우리 동포의 피와 눈물’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간도는 우리에게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일제와 청이 경쟁하듯 장악하려 했지만 그래도 숨 쉴 공간이었거든요. 서전서숙과 명동학교 같은 교육기관을 세웠고 신흥강습소 같은 독립군 양성기관도 운영했습니다. 일제의 통제가 상대적으로 느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의 대승은 그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일제가 무차별 학살로 보복에 나서면서 우리 농민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죠. 경신참변입니다. 이후 일제는 간도의 불온한 분위기를 가라앉히려고 간도시찰단을 구성해 경성의 달라진 모습을 구경시키기도 했습니다. 총독부 경성우편국 조선은행 연초전매공장 동양척식회사 등을 둘러보게 했죠.



동아일보 1923년 9월 20~21일자 ‘잊어버려진 계급’ 2회 연재는 소작농민이 직접 쓴 기고문입니다. 17년 간 서간도에 개간한 논 7000정보, 즉 2100만 평은 모두 우리 농민이 피와 땀을 흘려 일궜다고 했죠. 이렇게 넓은 땅을 논으로 바꿔놓았지만 결국 중국인이 차지할 뿐 우리 농민은 아침저녁으로 끼니 걱정만 한다고 했습니다. 간도의 우리 농민에게 일상의 권력자는 중국인 지주였습니다. 지주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 목숨이 오락가락했기 때문이었죠. 그렇지만 우리 농민은 해가 갈수록 정든 고향을 떠나 간도를 향해 길을 나섰습니다. 고향에서는 일제가 불러들인 일본 농민에게 밀려 갈아먹을 땅조차 없었기 때문이었죠.

이진 기자 leej@donga.com기사입력일 : 2021년 02월 02일
間島農村(간도농촌)
우리 同胞(동포)의 慘憺(참담)한 情境(정경)


一(1)

살아오든 집간이나마 갈아먹든 밧날갈이나마- 그것조차 남에게 빼앗기고 秋風(추풍)에 날니는 가랑입 모양으로 날마다 달마다 散之四方(산지사방)하는 朝鮮兄弟(조선형제)의 可憐(가련)한 身勢(신세)에 그 生活(생활)의 安定(안정)을 어느 곳에 엇으리오. 간데족々 貧者(빈자)의 苦痛(고통)을 맛볼 뿐이오 다닷는 곳마다 弱者(약자)의 서름을 늑길 따름입니다. 米洲(미주)에도 그러할 것이오 西伯利亞(서백리아)에나 西間島(서간도)에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間島(간도)에 移住(이주)한 우리 農民(농민)의 情境(정경)처럼 그러케 苦窮(고궁)하고 抑寃(억원)하고 不安(불안)하고 悽慘(처참)한 것은 다시 다른데 업스리라 함니다.


二(2)

『지팡』사리(中人(중인)의 田地(전지)에서 小作生活(소작생활))하는 農村(농촌)이 아마 全間島(전간도)의 三分一(3분1)은 될 듯합니다. 그 農村(농촌)을 지나가며 爲先(위선) 그들의 사는 貌樣(모양)만 보아도 情(정)잇는 사람으로는 熱淚(열루)를 흘리지 아니치 못할 것입니다. 거진 頹落(퇴락)되는 새ㅅ감안 二間草屋(이간초옥)에 老少(노소)가 긔여들고 긔여나며 어린 兒孩(아해)들은 鶉衣菜色(순의채색)으로 벌々 떨고 안저 飢(기)를 呼(호)하고 寒(한)에 泣(읍)합니다. 壯丁(장정)들은 北風寒雪(북풍한설)에 손발을 얼리며 地主(지주)의 집 압뒤 뜰의 눈을 쓸기도 하고 打穀(타곡)마당에서 打穀(타곡)을 하야 庫間(고간)에 너허 주기도 합니다. 한 十年前(10년전)만하여도 小作料(소작료)는 三割(3할)과 四割(4할)에 不過(불과)하든 것이 至今(지금)은 대개 四六(46)(地主(지주)가 六割(6할)을 차지하고 少作人(소작인)이 四割(4할)을 取(취)함)이 되얏슴니다. 그나 그뿐입닛가. 地稅(지세)까지 擔負(담부)하고 柴火(시화)까지 當(당)하여 줍니다. 그러고도 地主(지주)의 脾胃(비위)를 조금만 맛추지 못하면 『왕바두즈』(王八肚子(왕팔두자))、『까오리방즈』(高麗蚪子(고려두자))의 辱說(욕설)이 馬棒子(마봉자)와 함께 이름니다. 그들은 苦生(고생)은 할대로 하고 侮辱(모욕)은 밧을대로 밧슴니다. 秋收(추수)하여 들인만치 못한 米穀(미곡) 中(중)에서 봄에 꾸어 먹은 糧食(양식)을 長利(장리)로 報償(보상)하고 난즉 剩餘(잉여)가 몃섬이 안됨니다. 또 地主(지주)가 술(酒(주))을 갓다 노코 小作人(소작인)의 剩穀(잉곡) 몃 섬까지도 모다 빼아스려 합니다. 이러케 搾取(착취)를 被(피)한 그들은 父母(부모)의 病(병)을 爲(위)하야 藥(약)한 貼(첩) 다려 드리지 못하고 子女(자녀)의 將來(장래)를 爲(위)하야 글 한 字(자) 가르처 주지 못하매 그 心理上(심리상) 悲痛(비통)인들 엇더하오릿가. 먹을 것 업고 갈 데 업는 그들은 또 꾸어 먹고 또 빗을 저서 맛참내 一生(일생)의 奴隷(노예)가 되고 妻子(처자)까지 팔아 밧치게 됨이 엇지 一二(일이)로써만 算(산)하오릿가. 아! 이것이 얼마나 慘澹(참담)한 現狀(현상)입닛가.


三(3)

『自(자)지팡』(自地方(자지방))은 自(자)지팡이라고 해도 完全(완전)한 自作農(자작농)은 全村(전촌)의 四分一(4분1)에 넘지 안슴니다. 그러고 그 남아는 小作農(소작농) 自作兼小作農(자작겸소작농)으로서 제 사람의 밧을 半作(반작)이를 함니다. 적으나 만흐나 제 밧을 짓고 또 남의 밧을 짓더라도 勞働力作(노동역작)하는 까닭에 食之衣之用之(식지의지용지)에 그다지 窮乏(궁핍)하지 안으리만한 農産(농산)을 收入(수입)함니다. 그러나 그들은 먹을 것 업고 입을 것 업고 쓸 것 업슴을 叫呼(규호)합니다. 웨요? 官帽(관모)쓴 盜賊(도적) 때문입니다. 첫재 巡警(순경)들은 村里(촌리)로 무슨 調査(조사)를 오면 調査(조사)는 열둣재로 하고 精米飯(정미반)과 鷄肉湯(계육탕)이 第一要求件(제일요구건)임니다. 萬一(만일) 여긔에 抗議(항의)를 提出(제출)하면 銃(총)대를 들이 最後通牒(최후통첩)을 發(발)함니다. 如何(여하)한 訴訟(소송)이 巡警局(순경국)에 드러오면 올코 그르고 兩便(양편)에 모도 罰金(벌금)을 밧아냄니다. 거긔서 一朝一夕(일조일석)이라도 지내게 되면 밥이야 먹엇든지 안 먹엇든지 間(간)에 飯錢(반전)을 밧아냄니다. 門(문)턱을 넘엇다 하야 門(문)턱稅(세)를 밧아냄니다.

둘재 統稅局員(통세국원)들은 달마다 或(혹)은 두 달에 한 番式(번식) 村里(촌리)로 巡廻(순회)하면서 牛票(우표)를 檢査(검사)하고 新築家屋(신축가옥)을 調査(조사)함니다. 去月(거월)에 自己(자기)네 出給(출급)한 牛票(우표)를 무엇이 맛지 안는다 하야 다시 다른 票(표)를 出給(출급)함니다. 前番(전번) 出給(출급)할 時(시)에는 腹部(복부)에 白點(백점) 或(혹)은 黑點(흑점)을 쓰지 아니하엿다가 다음 番(번)에는 他人(타인)의 牛票(우표)로써 官吏(관리)를 속인다 하야 秋霜(추상) 갓흔 號令(호령)에 엇절 수 업시 또다시 票(표)를 내게 됨니다. 송아지 하나에 票(표) 다섯 번을 내고 보니 票錢(표전)에 송아지가 다 들엇다고 痛歎(통탄)하는 이가 잇슴니다. 소나 집이나 實價(실가)의 百分之四(100분지4)를 밧는 章程(장정)이어늘 彼等(피등)의 입이 곳 章程(장정)임니다. 實價(실가) 百元(100원)이면 八元(8원)도 可(가)하고 十元(10원)도 可(가)함니다. 彼等(피등)이 錢囊(전낭)을 채워 가지고 馬上(마상)에 올너 안저 意氣揚々(의기양양)히 갈 제 우리 農村(농촌) 兄弟(형제)들은 눈물로써 相吊(상적)할 뿐입니다.

셋재 緝私隊(집사대)는 國境方面(국경방면)에 巡行(순행)하면서 私鹽密輸入(사염밀수입)을 禁止(금지)할 것이어늘 坊々谷々(방방곡곡)의 各村(각촌)으로 도라다니면서 別(별)에別(별) 弊(폐)를 다 냄니다. 官鹽(관염)도 私鹽(사염)이라 하야 罰金(벌금)을 强徵(강징)하는 일이 적지 아니함니다. 이 村(촌)을 搜索(수색)하면 必然(필연) 私鹽(사염)이 잇스리니 搜索(수색)이 願(원)이냐 돈 내기가 願(원)이냐 하야 돈 十圓(10원)씩이나 어더갑니다. 彼等(피등)도 그저 强奪(강탈)하기는 그래도 좀 未安(미안)한지? 二錢(2전)짜리 燒餠(소병)을 二百個(200개) 或(혹)은 三百個(300개) 式(식) 各村(각촌)에 맛기고 每個(매개)에 十錢(10전) 式(식) 求乞(구걸)함니다. 村民(촌민)은 後患(후환)을 念慮(염려)하야 이것을 拒絶(거절)치 못함니다. 歲時佳節(세시가절)이면 白米(백미)와 닭을 要求(요구)함니다. 이것도 拒逆(거역)치 못함니다. 주는 者(자)가 밧는 者(자)에게 밧아주니 感謝(감사)하다는 人事(인사)를 하게 됨니다. 吸血鬼(흡혈귀) 가튼 彼等(피등)의 心術(심술)을 아는 까닭에-.


四(4)

이밧게도 陸軍(육군) 火木(화목)이니 警備隊(경비대) 馬草(마초)이니 保衛團錢(보위단전)이니 비렁방이錢(전)이니 무엇이니 무엇이니 하는 苛斂誅求(가렴주구)가 枚擧(매거)치 못하리만치 만슴니다. 自衛(자위)하는 덩어리가 업고 呼訴(호소)할 곳이 업는 白衣兄弟(백의형제)는 白豆(백두)를 팔고 黃太(황태)를 팔고 米麥(미맥)을 팔아 이에 應(응)함니다. 一年(1년)동안 애써 벌어 노흔 農産(농산)-피땀의 結晶(결정)은 임의 貪官汚吏(탐관오리)에게 빼앗기고 겨을 한동안 牛車運賃(우차운임)으로 若干(약간)의 收入(수입)을 어든 그것조차 間島(간도)를 開發(개발)한다는 天圖輕鐵(천도경철)이 빼아섯슴니다. 間島(간도)의 들을 울리는 저 汽笛(기적)소리는 우리 가난한 兄弟(형제)의 生存(생존)을 威脅(위협)하는 資本主義(자본주의)의 소리가 안일가요.

그들은 맛츰내 唯一(유일)의 財源(재원)으로 밋든 소와 밧흘 또 팔게 됨니다. 이 慘境(참경)에 陷(함)한 우리 農村(농촌) 兄弟(형제)는 엇더케 살 것입닛가. 어느 村(촌)에 가서 듯든지 말인즉 『못 살아』、『죽을 것은 그저 朝鮮(조선)사람이야-』의 슬푼 소리뿐임니다. 이곳에서 安定(안정)을 엇지 못한 그들은 또 떠나가려 함니다. 그들은 또 떠나가려 함니다. 그들의 갈 곳은 어듸릿가. 安圖縣(안도현)의 深山(심산)이 아니면 敦化縣(돈화현)의 荒野(황야)일 것임니다. 政治的(정치적)으로나 經濟的(경제적)으로나에 함께 滅亡(멸망)을 當(당)하는 百姓(백성)의 慘狀(참상)! 아! 그들을 救援(구원)할 道(도)가 무엇인가!
(間島(간도)가보生(생))

간도농촌
우리 동포의 참담한 정경



1.
살아오던 집칸이나마 갈아먹던 밭뙈기나마 그것조차 남에게 빼앗기고 가을바람에 날리는 가랑잎처럼 날마다 달마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조선형제의 가련한 신세에 생활의 안정을 어디서 얻겠는가. 가는 곳마다 가난한 자의 고통을 맛볼 뿐이고 닿는 곳마다 약자를 설움을 느낄 따름입니다. 미국에서도 그럴 것이고  시베리아나 서간도에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간도에 이주한 우리 농민의 처지처럼 그렇게 쓰라리게 가난하고 분하고 불안하고 처참한 것은 다른 곳에는 다시 없을 듯합니다.


2.
‘지팡살이’(중국인 농경지에서의 소작생활) 하는 농촌이 아마 전체 간도의 30%는 될 듯합니다. 그 농촌을 지나가며 우선 그들이 사는 모습만 봐도 감정 있는 사람으로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거의 무너져가는 새카만 두 칸짜리 초가집에 어른과 아이가 기어들어가고 기어나가며 어린 아이들은 누더기 옷에 굶주려 시퍼런 얼굴로 벌벌 떨며 배고프다고 소리치고 추위에 울고 있습니다. 장정들은 북풍한설에 손발이 얼어가며 지주 집의 앞뒤 뜰 눈을 쓸기도 하고 타작마당에서 타작을 해 곳간에 넣어주기도 합니다. 한 10년 전만 해도 소작료는 30%와 40%에 불과하던 것이 지금은 대개 4·6제(지주가 60%를 차지하고 소작인이 40%를 가져감)가 됐습니다. 그뿐입니까. 지세까지 부담하고 땔감까지 대줍니다. 그러고도 지주의 비위를 조금만 맞추지 못하면 ‘개자식’ ‘조선놈’ 같은 욕설이 몽둥이와 함께 날아듭니다. 그들은 고생은 할대로 하고 모욕은 받을대로 받습니다. 추수해 들인 양만도 못한 쌀 중에서 봄에 꾸어먹은 양식의 절반을 이자로 갚고 나면 남은 것은 몇 가마가 되지 않습니다. 또 지주가 술을 갖다 놓고 소작인의 남은 쌀 몇 가마까지도 모두 빼앗으려 합니다. 이렇게 착취를 당한 그들은 부모가 걸린 병을 고치기 위해 약 한 첩 달여 드리지 못하고 자녀의 장래를 위해 글 한 자 가르쳐 주지 못하니 그 마음의 비통함은 어떠하겠습니까. 먹을 것 없고 갈 곳 없는 그들은 또 꾸어 먹고 또 빚을 져서 마침내 일생의 노예가 되고 처자까지 팔아 바치게 되는 일이 어찌 한두 사례로만 수를 헤아리겠습니다. 아! 이것이 얼마나 참담한 현상입니까.


3.
‘자지팡’(완전한 자작농)은 전체 농촌의 25%를 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소작농과 자작 겸 소작농으로서 여러 사람의 밭을 절반 경작합니다. 적으나 많으나 제 밭을 갈고 또 남의 밭을 갈더라도 열심히 일하는 까닭에 먹을 것 입을 것 쓸 것에 그다지 궁핍하지 않을 만한 농산물을 거둬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먹을 것 없고 입을 것 없고 쓸 것 없다고 외칩니다. 왜일까요? 제복 입은 도적 때문입니다. 첫째 순경들은 마을로 무슨 조사를 오면 조사는 뒤로 미루고 흰쌀밥과 육계장을 가장 먼저 요구합니다. 만약 여기에 항의를 하면 총대를 들이대며 최후통첩을 내놓습니다. 어떤 소송이 순경국에 접수되면 옳고 그른 양쪽에서 모두 벌금을 받아냅니다. 거기서 아침저녁이라도 지내게 되면 밥이야 먹었든지 안 먹었든지 간에 밥값을 받아냅니다. 문턱을 넘었다고 해서 문턱세를 받아냅니다.

둘째 물품세 직원들은 달마다 또는 두 달에 한 번씩 마을을 돌면서 소표를 검사하고 새로 지은 집을 조사합니다. 지난달에 자기들이 내준 소표가 뭐가 맞지 않는다며 다시 다른 표를 내줍니다. 지난번에 내줄 때는 배에 흰점 또는 검은점이 있다고 쓰지 않았다가 다음번에는 다른 사람의 소표로 관리를 속인다며 추상같이 호령해 어쩔 수 없이 또다시 표를 만들게 됩니다. 송아지 하나에 표 다섯 번을 내고 보니 표값에 송아지 한 마리가 다 들었다고 통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나 집이나 실제 가격의 4%를 받는 규정이 있지만 그들의 입이 곧 규정입니다. 실제 가격이 100원이면 8원도 되고 10원도 됩니다. 그들이 돈주머니를 채워 가지고 말 위에 올라 앉아 의기양양하게 갈 때 우리 농촌 형제들은 눈물로 서로를 위안할 뿐입니다.

셋째 사염(私鹽) 단속반은 국경방면을 돌아다니며 사염 밀수입을 금지해야 하지만 방방곡곡의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별의별 민폐를 다 끼칩니다. 관염(官鹽)도 사염이라며 벌금을 강제로 거두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이 마을을 수색하면 분명히 사염이 있을 테니 수색을 당할래, 돈을 낼래 하며 돈을 10원씩이나 뜯어갑니다. 그들도 그저 빼앗아가기는 그래도 좀 미안한지 2전짜리 구운 떡을 200개 또는 300개씩 각 마을에 맡기고 한 개에 10전씩 구걸합니다. 마을사람들은 후환을 두려워해 거절하지 못합니다. 명절이면 흰쌀과 닭을 요구합니다. 이것도 거부하지 못합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에게 받아주니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게 됩니다. 흡혈귀 같은 그들의 심술을 아는 까닭에···.


4.
이밖에도 육군 땔감이니 경비대 말먹이니 보위단 돈이니 비렁뱅이 돈이니 무엇이니 무엇이니 하는 가렴주구가 일일이 들지 못할 만큼 많습니다. 자위하는 집단이 없고 호소할 곳이 없는 백의형제는 흰콩을 팔고 황태를 팔고 쌀보리를 팔아 여기에 응대합니다. 1년 동안 애써 벌어 놓은 농산물-피땀의 결정은 이미 탐관오리에게 빼앗기고 겨울 한동안 소달구지 운임으로 약간의 수입을 얻던 그것마저 간도를 개발한다는 뎬토경철 회사가 빼앗았습니다. 간도의 들판을 울리는 저 기적소리는 우리 가난한 형제의 생존을 위협하는 자본주의의 소리가 아닐까요?

그들은 마침내 유일한 재산으로 믿던 소와 밭을 또 팔게 됩니다. 이 참담한 지경에 빠진 우리 농촌 형제는 어떻게 살겠습니까? 어느 마을에 가서 말을 듣든지 ‘못 살아’, ‘죽을 것은 그저 조선사람이야-’ 같은 슬픈 소리뿐입니다. 이곳에서 안정을 얻지 못한 그들은 또 떠나가려 합니다. 그들은 또 떠나가려 합니다. 그들이 갈 곳은 어디일까요? 안투현의 깊은 산 아니면 둔화현의 황야일 것입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함께 멸망당하는 백성의 참상! 아! 그들을 구원할 길은 무엇일까!

간도가보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