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6월 8일

중국 위폐 압수 현장의 삐라 한 장이 가리킨 방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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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찰부에서 경성 종로경찰서로 협조요청이 왔습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적발된 대규모 중국 지폐 위조사건 용의자 3명이 경성에 잠입했으니 잡아달라고 했죠. 종로서 경찰이 종로구 도렴동의 한 주택을 덮쳤습니다. 용의자 1명을 붙잡고 숨겨둔 위조지폐도 찾아냈죠. 그런데 경찰은 재떨이에 구겨진 채 있던 삐라(전단) 한 장을 놓치지 않았죠. 1926년 6월 5일이었으니 순종 인산일을 앞두고 경찰이 최고로 긴장돼 있었던 때였죠. 삐라를 펼쳐본 형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이를 위해 싸우자는 본문 아래에 ‘혁명적 민족운동자 단결 만세!’ ‘대한 독립 만세’ 구호가 선명했거든요. 곧바로 비상이 걸렸습니다. 붙잡아온 용의자를 혹독하게 몰아쳐 삐라가 나온 곳을 캐물었죠.


일제 경찰은 1926년 6월 5일 이후 조선공산당 색출 체포 조사과정 일체를 극비리에 진행했고 언론보도를 차단했다. 동아일보는 조각조각 취재한 사실을 한데 모아 1926년 6월 19일자부터 '6월사건의 진상 경개' 문패로 5회 연재했다. 취재 제약 탓에 지금 보면 일부 오류도 보이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신속하게 보도한 열정이 전해진다.
위폐범은 양말제조업자 이름을, 양말제조업자는 천도교 신자 부부의 이름을 댔죠. 부인의 자백으로 경운동 천도교 본부가 떠올랐고요. 경기도 경찰부와 종로서가 합동으로 본부를 급습해 그 안에 있던 손재기의 집을 뒤졌습니다. 손재기는 천도교 제3세 교주 손병희의 종손이죠. 그 집에서 5종류, 5만 장이 넘는 전단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때만 해도 일제 경찰은 3‧1운동을 주도했던 천도교가 제2의 만세운동을 일으키려 하는구나, 생각했죠. 그러나 고등계가 취조의 고삐를 바짝 조이자 뜻밖의 이름이 흘러나왔습니다. 권오설, 그가 전단 내용과 제작비를 건넸다고 했죠. 권오설은 전해인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적발 때 지하로 숨어 7개월째 암약 중이었죠. 이번엔 권오설 체포까지 3일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신의주 회식사건’으로 꼬리가 밟혀 타격을 받았던 조선공산당은 1925년 12월 즉시 조직 재건에 나섰습니다. 강달영을 책임비서로 5인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했죠. 권오설은 이듬해 3월 중앙집행위원회에 보선되면서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겸했죠. 제2차 조선공산당으로 불립니다. 이 시기 조선공산당은 ‘임시상하이부’를 지휘하며 세력 확대에 나섰습니다. 임시상하이부에는 일제의 검거를 피해 달아난 1차 조선공산당 간부들이 있었지만 상하관계를 분명히 했죠. 국내 조직도 확충했고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으로부터 조선지부로 승인을 얻기도 했습니다. 정통성을 인정받은 것이죠. 무엇보다 1차 때에 비해 운동의 통일을 위해 유연한 태도를 보였던 점이 두드러졌습니다.


일제 경찰의 제2차 조선공산당 수사는 검거->고문->단서 확보-> 추가 검거->고문->단서 확보->추가 검거의 과정을 반복했다. 동아일보 1926년 7월 24일자 2면은 새로운 단서를 얻은 일제 경찰이 23일 새벽 일제히 출동해 검거에 돌입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왼쪽은 7월 26일자에 실린 '기사 게재 금지' 제목이다.



소설 ‘상록수’의 작가 심훈을 아시죠? 심훈이 이런 시를 썼습니다.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여보게 박군,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알코올 병에 담가놓은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여기서 박군은 박헌영입니다. 1927년 병보석으로 풀려난 박헌영의 얼굴을 본 심훈의 마음이 담겼죠. 심훈은 박헌영, 무정부주의자 박열과 경성고등보통학교 동창이었죠. 일제는 조선공산당 뿌리를 뽑으려고 가혹한 고문을 저질렀습니다. 박순병과 박길양이 조사 도중에, 백광흠이 고문 후유증으로, 권오상은 병보석 후, 권오설은 감옥에서 숨졌습니다. 자백이 유일한 증거이다시피 한 상황에서 일제가 줄잡아 3000명을 붙잡아 이렇게 다뤘으니 2차 조선공산당은 풍비박산 났죠. 기자의 접근과 언론 보도는 철저하게 차단당했습니다.


①1차 조선공산당 관련자로 신의주에서 조사받던 박헌영(오른쪽)과 윤덕병(가운데)이 1926년 7월 압송돼 경성역에 도착한 모습. 이때만 해도 박헌영의 얼굴에는 여유가 보였다. ②1927년 11월 병보석으로 풀려난 박헌영(가운데). 왼쪽은 부인 주세죽이고 오른쪽은 누구인지 알 수없다. 이때의 박헌영은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넋이 나간 얼굴이다. 오른쪽은 일제 경찰의 혹독한 고문으로 조사 도중이나 보석 후 또는 수감 중 숨진 조선공산당 관련자들이다.



앞서 2차 조선공산당은 3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민족, 사회 양 운동자를 통일하는 국민당’을 조직하기로 결의했죠. 손을 맞잡을 민족주의 파트너는 천도교 구파였고요. 강달영과 이종린 두 사람의 신뢰와 친분도 밑거름이었죠. 1926년 4월 순종의 승하는 조선공산당이 국민당 논의를 잠깐 뒤로 하고 만세운동을 펼칠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조선공산당은 ‘대한독립당’ 간판을 앞세워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천도교 청년 학생 등을 모아나갔죠. ‘민족해방이 곧 계급해방’이라는 구호가 2차 조선공산당의 지향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비록 중국 위조지폐 탓에 6‧10만세운동은 경성에서 일어나는데 그쳤지만 통일‧단결의 흐름은 국외의 민족유일당 운동과 국내 신간회 성립의 든든한 토대가 됐습니다.


기사입력일 : 2021년 11월 19일








己未(기미) 以後(이후) 民族的(민족적) 重大計劃(중대계획) 發覺(발각)
自動車隊(자동차대)로 檄文(격문)、宣言書(선전서) 六(6) 七萬張(7만장) 沒收(몰수)

텬도교(天道敎) 외 각죵 단톄를 중심으로 뎨이차 모 중대한 사건을 가장 조직뎍으로 계획하엿다가 사실이 미연에 발각되야 재작 륙일 오후 네시반 경부터 시내 종로경찰서에서는 대활동을 개시하야 시내 모처에서 가장 중대한 격문(檄文) 선언서 오만여장을 압수하는 동시에 텬도교 간부들과 잡지 개벽사(開闢社)원들 외에 각(各) 게통(系統)의 관게자를 팔방에서 검거하엿는데 사건의 자세한 내용에 대하야는 총독부 당국으로부터 졀대로 보도치 못하게 함으로 당국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위선 대략을 보도하노라.


數十(수십) 刑事(형사)가 自動車(자동차) 五臺(5대)로
敎堂(교당)과 賞春園(상춘원)을 搜索(수색)
경긔도경찰부와 종로서원의 련합 활동
가택을 수색하고 다수한 증거품을 압수
木机(목궤)、洋鐵桶(양철통)、箱子(상자) 等(등)을 沒收(몰수)



재작 륙일에 경찰 당국에서 시내에 모 중대한 게획이 잇는 단서를 알어가지고 동일 오후 네시 경에 경긔도경찰부 고등게에서와 종로경찰서 고등게에서 형사 수십여명이 돌연히 자동차 다섯 대에 난호아 타고 경운동(慶雲洞) 텬도교당(天道敎堂)에 급행하야 동 교당을 전부 포위한 후 교당 안과 종리원(宗理院)과 개벽사와 기타 여터 곳을 일제히 수색하는 동시에 그 교당 구내에 거주하는 고(故) 손병희(孫秉熙)씨의 종손 되는 손모(孫某)(三八‧38)의 가택을 수색하야 그 집 방 안에 감초아 두엇던 커다란 궤싹 한 개와 버들상자 한 개를 압수하고 다시 검거에 착수하야 전긔 손모 외에 텬도교 간부 최모(崔某) 최모(崔某) 최모(崔某) 라모(羅某) 김모(金某) 홍모(洪某) 량모(梁某) 리모(李某) 등과 또한 개벽사원 김모(金某) 방모(方某) 리모(李某) 민모(𨳐某) 차모(車某) 리모(李某) 리모의 안해 전긔 손모의 안해 김씨(金氏)(三六‧36) 등 유수한 사람들을 비롯하야 그때 그 교당 구내에서 『테니쓰』를 하며 놀고 잇든 학생들까지 전부 약 삼십여명을 검거하엿고 또한 그 한편으로는 동대문 밧 텬도교 뎨사세 교주 박인호(朴寅浩)씨의 거주하는 상춘원(賞春園)을 수색하고 그 집에서 박모(朴某)(三三‧33) 박모(朴某)(二三‧23) 박모(朴某) 등을 또 검거하엿다. 전긔 궤짝 안에는 격문 인쇄에 사용한 다수한 활자(活字)가 들어잇섯고 버들상자 속에는 격문서 약 륙만여장이 들어 잇든 것이라 한다.


二十餘名(2십여명) 放免(방면)
일부는 취조 후 방면


칠일 오후 령시경에 텬도교로부터 다려온 혐의자들 중에서 리을(李乙) 씨 외 이십명은 취조를 마치고 사법게 취조실로 모하놋코 금뢰(今瀨)사법게 주임이 일장 훈시와 밋 몃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서 모다 방환하얏다더라.


印刷機械(인쇄기계) 押收(압수)
시내 ○○동 ○○번디를 수색
세 명을 검거하고 중거품 압수


전긔 사건에 대하야 종로서 고등게에서는 재작 륙일 밤 아홉시경에 또한 십여명의 형사대가 자동차로 시내 ○○동(○○洞) 모처를 수색하고 그 집 주인의 아우 되는 경성일보사 인쇄직공으로 모 단톄의 간부 민모(閔某)(二八‧28)와 또한 그 집에서 가치 무엇들을 의론하고 잇든 역시 인쇄직공 리모(李某)(二一‧21) 양모(楊某)(二八‧28) 등 삼인을 검거하는 동시에 그 집의 가택을 수색하야 큰 궤짝에 감조아 너흔 인쇄긔게(印刷機械) 두 대와 또한 궤장자 속에 갓득 너허둔 조희(그중에는 격문서 수만장과 격문서를 박희다 남은 조희도 잇다함) 등을 압수하여 갓는데 이번 사건 중에 그 집은 가장 중요한 디대에 잇슨 모양이라더라.


戒嚴狀態(계엄상태)의
鍾路警察署(종로경찰서)
일변으로 검거하며 일변 취조
전장가치 혼잡한 종로경찰서
東奔西走(동분서주)의 自動車(자동차) 刑事隊(형사대)



종로서에서는 재작 륙일 오후 네시경 별항과 가튼 검거가 개시된 이래로 밤을 새여가며 검거와 취조로 고등 사법 등 형사는 물론이요 다수한 외근순사를 사복을 식히어 검거에 응원을 하게 하며 사법게 취조원들은 전부 고등게 숙직실 식당 응접실 긔타 방방이 들어안저서 혐의자들을 취조하야 그 중범죄사실이 들어난 사람은 모다 유치장으로 구금하고 일변으로 자동차 세 대를 가지고 취조에 딸하 발각되는 사실에 의지하야 형사들이 대를 난호어 시내 각처로 활동을 하는 중 사건의 내용이 큰이만콤 오십여명 경관을 풀어 전연 그 사건에만 한하야 활동하게 하고 음식장사며 출입긔자들까지도 웃칭 칭게 압헤는 얼신을 하지 못하게 하는 등 비밀리에서 종로서는 안비막개의 상태로 대혼잡 중에 잇다더라.


東大門(동대문) 外(외) 賞春園(상춘원)
刑事隊(형사대)가 宿直(숙직)



종로서 고등게 길야(吉野)경부보는 칠일 오후 한시 경에 부하 오륙명을 다리고 자동차로 동대문 외 상춘원(常春園)에 재차 출동하엿다는대 부하들은 모다 그곳에 잠복하야 잇도록 하얏다더라.


市街(시가)에 軍隊行列(군대행렬)
룡산에 잇는 보병대 이쳔명
시내의 거리를 행렬로 지어



별항과 가치 대사건이 돌발한 작 칠일 아츰에 돌연히 룡산 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에서는 약 이천여명의 군대들을 출동식히여 경성역 압흘 지내 시내에 드러와서 행렬을 지어 행군하엿더라.


箱子(상자)와 木机(목궤)는
四(4) 五日(5일) 前(전) 任置(임치)
그러나 무엇인지는 몰랏서요
종로서에 잡히엿다가 방면된
孫某(손모)의 妻(처) 金(김)氏(씨)의 談(담)



별항 사건에 대하야 재작 륙일 오후에 텬도교당 안에서 종로서에 검거되엿다가 작 칠일 아츰에 겨우 방면된 전긔 손모의 안해 김씨(金氏)는 말하되 『나는 지금으로부터 한 사 오일전에 엇던 사람이 큰 궤짝 한 개와 버들상자 한 개를 가저다가 나더러 그것을 잘 보관하여 두라기에 나는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대로 밧어 두엇섯슬 뿐입니다. 그러다가 재작 륙일에 경찰서에 붓들니어 가서 여러 가지로 심문을 당하엿슴니다마는 나는 처음부터 무엇인지 몰랏섯기 때문에 몰랏섯노라고 대답하엿슴니다. 그랫더니 오늘(칠일) 아츰에 나가라고 하여 나왓는데 륙일 저녁 때에 본교당을 수색할 때에는 형사들이 밧그로 죽 둘러싸고 대문을 다다건 후 누구나 이 안에 잇는 사람이면 하나도 남기지 안코 모조리 잡아갓스며 또한 밧게서 드러오는 사람도 드러오는대로 잡아갓슴니다』 하더라.


號外(호외) 發行禁止(발행금지)
당국으로부터



별항 중대사건이 발생되자 그 즉시로 본사에서는 호외(號外)를 발행하야 사건의 발생을 만텬하 독자에게 신속히 보도하랴고 이미 만단의 준비까지 다 되엿던 바 총독부 당국으로부터 호외 발행은 절대로 금지한다 하야 부득이 발행치 못하엿슴니다.

檢束者(검속자) 二百名(2백명)
재작일 밤부터 작일 정오까지
닥치는대로 이백여명을 검거


경찰 당국에서는 또한 그 한편으로 밤을 새여가며 시내 모모 각 단톄를 전부 수색하야 각(各) 방면(方面)과 각(各) 계통(系統)으로부터 다수한 관계자들을 검거하야 그 이튼날인 작 칠일 오전 여섯시까지 약 구십여인이 종로서에 검거되엿더니 활동은 의연히 계속되야 작 칠일 오후 한시 경에는 약 이백여인을 동서에 인치하고 류치장이 차고 넘치어 동서의 연무장(演武塲)과 이층 광실(廣室) 등을 림시류치장으로 대용하며 그들을 전부 그 안에 잡어너코 일변 취조를 개시하야 한편으로는 그들을 서대문형무소로 보내며 또 한편으로 사실이 업는 사람이면 그날로 방환하는 중이엇는데 활동의 손은 의연히 시내 각 방면에 미치여 그날 오전에 전긔 박모와 함께 이번 사건의 가장 주요 인물인 시내 황금뎡 백모(白某) 외 다수한 인쇄직공들이 다수히 검거되엿고 동시에 각종 단톄의 주요 인물들은 별로히 남기지 안코 거위 전부가 검거된 모양이엇다.


密議本部(밀의본부) 署長官舍(서장관사)


종로서에서는 별항 검거를 개시한 이래로 검거에 대한 것이 조곰이라도 루설될까 하는 념려로 륙일 오후부터는 탑동공원 뒤 삼서댱의 관사에다가 밀의본부를 두고 동서 간부서원들이 모다 그곳에 모히어 밀의를 하며 또는 모든 사령을 발하엿다더라.


首謀者(수모자) 六名(6명)은
刑務所(형무소)에 收監(수감)
다른 관게자도 형무소로 이송



종로서에 검거된 사람들 중 수모자 여섯명은 자동차로 직시 서대문형무소에 압송하고 범인 일부는 동서 류치장 하나로만은 모다 용납할 수가 업서 서대문서로 보내어 검속을 의뢰하얏다더라.


引致(인치)한 關係者(관계자)
一一(일일) 寫眞(사진) 撮影(촬영)



경긔도경찰부로부터서는 사진반이 종로서에 출동하야 취조에 딸하 범죄사실이 들어난 범인들을 류치장으로부터 두 사람식을 짝을 지어 류치장 압흐로 끌어내어서 번호를 부처 가지고 사진을 박느라고 역시 종일토록 분망한 모양이엇다더라.


海外(해외)와도 連絡(련락)?
發覺(발각) 端緖(단서)는 女子(여자)
여자들의 이야기가 경찰의 귀에



병항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약 일개월 전에 해외와 비밀한 련락을 맷고 조선 안의 각종 단톄가 한 뭉텅이가 되야 이미 조직뎍으로 계획하여 온 모양이라는데 사건이 처음 발각되기는 모 녀자들이 무심코 하는 이약이가 경찰의 귀에 들어가 그러케 단서를 엇은 듯하다 하며 이에 대하야 당일 텬도교당에서 검거되든 광경을 목격한 모 학생은 『형사들이 교인들을 다 잡아간 뒤에 오륙명은 텬도교당에서 밤을 새여서 잠을 자며 직히고 잇다가 그 이튼날 아츰(칠일)에도 또다시 다른 형사들까지 와서 전부 잡어갓슴으로 지금 교당에는 아모도 업고 텡 비엿슴니다』 하고말하더라.




3‧1운동 이후 민족적 중대계획 발각
기동차량으로 격문 선전문 6만, 7만장 압수



천도교 외 각종 단체를 중심으로 제2차 모 중대 사건을 가장 조직적으로 계획했다가 사실이 사전에 발각돼 6월 6일 오후 4시반 경부터 시내 종로경찰서에서는 대대적 활동을 시작해 시내 모처에서 가장 중대한 격문 선언서 5만여 장을 압수하는 동시에 천도교 간부들과 개벽사 사원들 외에 각 계통의 관계자를 각처에서 검거하였다. 사건의 자세한 내용은 총독부 당국이 절대로 보도하지 못하게 하므로 당국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우선 대강을 보도한다.


수십명 형사가 자동차 5대로
교당과 상춘원을 수색
경기도경찰부와 종로서 경찰의 연합 작전
집을 수색하고 많은 증거품을 압수
나무상자, 양철통, 상자 등을 압수



6월 6일에 경찰 당국에서 시내에 모 중대한 계획이 있는 단서를 알아내 같은 날 오후 4시 경에 경기도경찰부 고등계와 종로경찰서 고등계에서 형사 수십여 명이 갑자기 자동차 5대를 나눠 타고 경운동 천도교당에 급하게 달려갔다. 교당을 모두 포위한 뒤 교당 안과 종리원과 개벽사와 기타 여러 곳을 일제히 수색하는 동시에 그 교당 구내에 거주하는 고 손병희 씨의 종손 되는 손모(38)의 집을 뒤져 그 집 방안에 감춰두었던 커다란 궤짝 한 개와 버들상자 한 개를 압수했다. 이어 검거에 착수해 앞서 손모 외에 천도교 간부 최모와 다른 최모, 또 다른 최모, 나모, 김모, 홍모, 양모, 이모 등과 개벽사원 김모. 방모, 이모, 민모, 차모, 이모, 이모의 아내, 앞서 손모의 아내 김 씨(36) 등 많은 사람들을 비롯해 그때 그 교당 구내에서 테니스를 하며 놀고 있던 학생들까지 모두 약 30여명을 검거했다. 한편으로는 동대문 밖 천도교 제4대 교주 박인호 씨가 거주하는 상춘원을 수색하고 그 집에서 박모(33), 다른 박모(23), 또 다른 박모 등을 또 붙잡았다. 앞서 궤짝 안에는 격문 인쇄에 사용한 많은 활자가 들어 있었고 버들상자 속에는 격문서 약 6만여 장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20여 명 방면
일부는 취조 후 방면


7일 오후 0시 경에 천도교에서 데려온 혐의자들 중에서 이을 씨 외 20명은 취조를 마치소 사법계 취조실에 모아놓고 이마세 사법계 주임이 일장 훈시와 몇 가지 주의사항을 말하고 모두 돌려보냈다고 한다.


인쇄기계 압수
시내 ○○동 ○○번지를 수색
3명을 검거하고 증거품 압수


앞의 사건에 대해서 종로서 고등계에서는 6일 밤 9시 경에 또 10여 명의 형사대가 자동차로 시내 ○○동 모처를 수색하고 그 집 주인의 동생 되는 경성일보사 인쇄직공으로 모 단체의 간부 민모(28)와 그 집에서 같이 무슨 일을 의논하고 있던 역시 인쇄직공 이모(21) 양모(28) 등 3명을 검거하는 동시에 그 집을 수색해 큰 궤짝에 감춰놓은 인쇄기계 두 대와 궤상자 속에 가득 넣어둔 종이(그중에는 격문서 수만 장과 격문서를 찍다 남은 종이도 있다고 함) 등을 압수해 갔는데 이번 사건 중에 그 집은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모양이라고 한다.


계엄상태의
종로경찰서
한편으로 검거하며 한편 취조
전쟁터같이 혼잡한 종로경찰서
동분서주하는 자동차 형사대

종로서에서는 6일 오후 4시 경 별도 기사 같은 검거가 시작된 이래로 밤을 새워가며 검거와 취조로 고등 사법 등 형사는 물론이고 많은 외근순사를 사복을 입혀 검거에 지원을 하게 했고 사법계 조사원들은 모두 고등계 숙직실 식당 응접실 기타 방마다 들어앉아 혐의자들을 취조했다. 중범죄 사실이 드러난 사람은 모두 유치장에 가두고 한편으로 자동차 3대를 동원에 취조에 따라 발각되는 사실을 좇아 형사들이 편을 나눠 시내 각지로 활동을 하는 중 사건의 내용이 큰 만큼 50여 명 경찰을 풀어 오로지 그 사건만 집중해 활동하게 하고 음식장수며 출입기자들까지 2층 계단 앞에는 얼씬을 하지 못하게 하는 등 비밀 속에서 종로서는 눈코 뜰 새 없는 상태로 일대 혼잡 중에 있다고 한다.


동대문 밖 상춘원
형사대가 숙직


종로서 고등계 요시노 경부보는 7일 오후 1시 경에 부하 5, 6명을 데리고 자동차로 동대문 밖 상춘원에 다시 출동했는데 부하들은 모두 그곳에 잠복해 있도록 했다고 한다.


시가에 있는 군대행렬
용산에 있는 보병대 2000명
시내 거리를 행진

별도 기사와 같이 대사건이 터진 7일 아침에 갑자기 용산 조선군사령부에서는 약 2000여 명의 군대를 출동시켜 경성역 앞을 지나 시내로 들어와서 행렬을 지어 행군하였다고 한다.


상자와 나무상자는
4, 5일 전에 맡겨놓아
그러나 무엇인지는 몰랐어요
종로서에 잡혔다가 풀려난
손모의 처 김씨의 말

별도 기사에 대해 6일 오후에 천도교당 안에서 종로서에 검거됐다가 7일 아침에 간신히 풀려난 앞서 손모의 아내 김씨는 말하길 “나는 지금으로부터 한 4, 5일 전에 어떤 사람이 큰 궤짝 한 개와 버들상자 한 개를 가져다가 나더러 잘 보관해 두라기에 나는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대로 받아 두었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6일에 경찰서에 붙들려 가 여러 가지로 심문을 당했습니다마는 나는 처음부터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몰랐었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오늘(7일) 아침에 나가라고 해서 나왔는데 6일 저녁 때에 교당을 수색할 때는 형사들이 밖으로 죽 둘러싸고 대문을 닫아 건 후 누구나 이 안에 있는 사람이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잡아갔으며 또 밖에서 들어오는 사람도 들어오는대로 잡아갔습니다”라고 말했다.


호외 발행금지
당국으로부터

별도의 중대사건이 일어나자 그 즉시로 본사에서는 호외를 발행해 사건의 발생을 만천하 독자에게 신속히 보도하려고 이미 만반의 준비까지 해놓았으나 총독부 당국에서 호외 발행은 절대로 금지한다고 해서 부득이 발행하지 못했습니다.


검속자 200명
그저께 밤부터 어제 정오까지
닥치는대로 200여 명 검거


경찰 당국에서는 또 한편으로 밤을 새워가며 시내 모모 각 단체를 모두 수색해 각 방면과 각 계통으로부터 많은 관계자들을 붙잡아 그 이튿날인 7일 오전 6시까지 약 90여 명이 종로서에 검거됐다. 활동을 그대로 계속해 7일 오후 1시 경에는 약 200여 명을 서에 붙들어둬 유치장이 차고 넘쳐서 서의 연무장과 2층 창고 등을 임시유치장으로 대신 쓰며 그들을 전부 그 안에 잡아넣고 한편으로 취조를 시작하고 한편으로는 그들을 서대문형무소로 보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실이 없는 사람이며 그날로 풀어주는 중이었다. 활동의 손길을 그대로 시내 각 방면에 미쳐서 그날 오전에 앞서 박모와 함께 이번 사건의 가장 주요 인물이 시내 을지로 백모 외 많은 인쇄직공들이 많이 검거되었고 동시에 각종 단체의 주요 인물들은 별로 남김없이 거의 전부가 검거된 모양이었다.


비밀본부 서장관사

종로서에서는 위의 검거를 시작한 이후로 검거에 관한 사실이 조금이라도 새어나갈까 하는 염려로 6일 오후부터는 탑동공원 뒤 모리 서장의 관사에다 비밀본부를 두고 간부서원들이 모두 그곳에 모여 비밀회의를 하며 또는 모든 지시를 발령했더라.


주모자 6명은
형무소에 수감
다른 관계자도 형무소로 이송


종로서에 검거된 사람들 중 주모자 6명은 자동차로 즉시 서대문형무소로 압송하고 범인 일부는 경찰서 유치장 하나로만은 모두 수용할 수가 없어서 서대문서로 보내 검속을 의뢰하였다고 한다.


끌고 온 관계자
일일이 사진 촬영

경기도경찰부에서는 사진반이 종로서로 출동해 취조에 따라 범죄사실이 드러난 범인들을 유치장에서부터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유치장 앞으로 끌어내어 번호를 붙여서 사진을 찍느라고 역시 하루종일 분주한 모양이었다고 한다.


해외와도 연락?
발각 단서는 여자
여자들의 이야기가 경찰의 귀에


위의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약 한 달 전에 해외와 비밀 연락을 맺고 조선 안의 각종 단체가 하나가 돼 이미 조직적으로 계획해 온 모양이라고 하며 사건이 처음 발각되기는 어떤 여자들이 무심코 하는 이야기가 경찰의 귀에 들어가 그렇게 단서를 얻는 듯하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당일 천도교당에서 검거되던 광경을 목격한 어떤 학생은 “형사들이 교인들을 다 잡아간 뒤에 또다시 다른 형사들까지 와서 전부 잡아갔으므로 지금 교당에는 아무도 없고 텅 비었습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