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12월 1일

극심한 경기침체에 맞서려면…제대로 아는 것이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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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는 공황의 연속이었습니다. 특히 일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이었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20년 일본에 ‘반동공황’이 밀어닥쳤습니다. 1차 대전 동안 유럽은 전쟁터가 됐지만 상품을 수출했던 일본에는 벼락경기가 일어났죠. 저녁 연회가 끝나 신발을 내주려던 게이샤가 어두워 찾지 못하겠다고 하자 신흥갑부가 100엔 지폐에 불을 붙이고는 ‘어때, 이제 잘 보이지?’라고 하던 시기였습니다. 수출이 곤두박질치면서 과잉설비와 물가폭등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됐죠. 이제 좀 한숨 돌리나 싶었던 1923년에는 10만 명 넘는 희생자를 낳은 간토(關東)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지진공황’이 곧바로 뒤를 이었죠. 그 다음에는 쇼와공황과 대공황이 기다렸다는 듯이 차례차례 들이닥쳤습니다.


일본 경제의 영향권 아래 있던 한반도에도 심각한 타격이 몰려 왔습니다. 한눈에 볼 수 있는 지표로 보통학교 학생들의 중도탈락을 들 수 있죠. 동아일보 1923년 12월 1일자 2면에 실린 ‘금융군색의 영향으로 비참한 보통학생의 퇴학’ 기사가 실상을 알려줍니다. 금융군색은 요즘 말로 금융경색이 되겠죠. 돈줄이 말라서 학비를 마련하지 못하게 되자 어렵게 입학한 보통학교를 중도에 그만두는 어린이들이 1921~1923년에 갈수록 늘었다는 내용입니다. 가난한 가정의 어린이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일수록 자퇴율이 더 높은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점일 겁니다. 어쨌든 이런 시기일수록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아는 일이 중요한 과제가 되겠죠.


창간 때부터 민중의 표현기관을 자임한 동아일보는 시대의 동향에 발맞춰 지면을 대대적으로 개편했습니다. 1923년 12월 1일자 1면 사설로 이 사실을 알렸죠.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1면의 변화였습니다. 지면혁신 전까지 동아일보 1면은 주장과 의견만 담았습니다. 사설과 논설 기고 외에는 싣지 않았거든요. 1910년 나라를 빼앗긴 뒤 할 말이 있어도 말할 곳이 없던 세월만 10년이었습니다. 1920년 동아일보가 창간돼 표현수단이 생기자 1면은 우리 목소리를 싣는 고정면이 됐죠. 그러던 것이 약 4년 만에 바뀐 겁니다. 사설은 놓아두고 논설이나 기고는 가급적 뒤로 돌리는 대신 기사를 실었죠. 그것도 외신기사를요. 세계의 움직임을 비중 있게 전달하려는 의도였죠.


과거 3면에 있던 사회기사와 4면의 지방기사는 2면으로 당겼고 종전에 2면 일부를 채웠던 경제기사에는 4면 전체를 내줬습니다. 경제면을 늘리는 한편 정경부를 정치부와 경제부로 나눴죠. 경제의 중요성을 감안한 조직 개편이었죠. 지면 변화와 더불어 눈에 띄는 특징은 독자들이 만드는 지면을 크게 늘린 점이었습니다. 1면에 ‘자유종’과 ‘독자만화’를 실었고 2면에는 ‘불평’을, 3면에는 ‘질의응답’을 각각 배치했죠. 모두 독자들의 원고를 받아 만들었습니다. ‘자유종’과 ‘불평’ ‘질의응답’은 지령 100호 무렵에 도입했던 형식을 지령 1000호를 넘은 이 시점에 새롭게 다듬어 내놓았죠.


우리 형편을 세계인에게 전하는 ‘영문란’을 만든 점도 색달랐습니다. 쉽게 말해 ‘영어 사설’이라고 보면 됩니다. 맨 위에는 ‘2000만의 목소리(Voice of The Twenty Million)’라는 구절을 넣어 성격을 분명히 했죠. 3면에 배치한 영문란은 초기 필자로 윤치호와 변영로가 들어 있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당시에 ‘영어 도사’로 손꼽히던 인물이었죠. 영문란은 횡설수설을 번역해 싣기도 하고 간간이 외국과 관련된 원고를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6개월 전 주 1회 증면형식으로 만들었던 일요호 4개면은 지면혁신으로 사라졌습니다. 일요호에 실었던 독자문단은 매주 월요일 ‘월요란’에 ‘독자문예’를 신설해 소화했죠.


이진 기자 leej@donga.com기사입력일 : 2021년 01월 26일
本報(본보)의 紙面革新(지면혁신)에 對(대)하야


一(1)

新聞(신문)은 時代(시대)의 嚮導(향도)이며 또 社會(사회)의 反映(반영)이다. 事實(사실)을 事實(사실)대로 忠實(충실)히 報道(보도)하는 同時(동시)에 善(선)히 時代精神(시대정신)의 指導(지도)를 使命(사명)으로 아니할 수 업다. 적어도 時代(시대)의 進運(진운)과 그 步調(보조)를 一致(일치)치 아니하면 아니된다. 이것이 곳 本報(본보) 紙面(지면)의 革新(혁신)을 斷行(단행)케 한 所以(소이)이다.

二(2)

本報(본보)의 綱領(강령)은 이미 天下(천하)에 闡明(천명)한 바와 가치 朝鮮民衆(조선민중)의 忠實(충실)한 表現機關(표현기관)인 것과 新文化(신문화) 建設(건설)의 指導(지도)를 目的(목적)하는 것이다. 이와 갓흔 主義(주의)와 主張(주장) 下(하)에 戰々兢々(전전긍긍)하며 勤々孜々(근근자자)하야 오늘날까지 이르럿스며 이제 다시 紙面(지면)을 革新(혁신)하야 滿天下(만천하) 讀者(독자)에게 뵈이는 것은 全(전)혀 以上(이상)의 本報(본보) 使命(사명)을 더욱 擴充(확충)하며 敷衍(부연)하는데 不過(불과)하다. 卽(즉) 本報(본보) 紙面(지면) 革新(혁신)의 根本義(근본의)는 時代(시대)의 進運(진운)에 應(응)코자 하는데 잇고 따라 紙面(지면)의 民衆化(민중화) 實生活化(실생활화) 世界化(세계화)를 計劃(계획)하는 것이다.

三(3)

第一(제1)의 民衆化(민중화)는 新聞(신문)은 讀者(독자)와 가치 맹길 것이라는 本報(본보)의 信念(신념) 下(하)에 本報(본보) 紙面(지면)을 될 수 잇는대로 一般讀者(일반독자)에게 公開(공개)코자 하는 것이다. 第二(제2)의 實生活化(실생활화)는 우리의 切實(절실)한 活路(활로)가 實生活(실생활)의 基礎(기초)를 確立(확립)치 안하면 아니되겟다는 意味(의미)에서 本報(본보)에 經濟欄(경제란)을 一層(일층) 豊富(풍부)히 하야 우리의 生活意識(생활의식)을 擴充(확충)코자 하는 것이다. 第三(제3)의 世界化(세계화)는 本報(본보)의 生命(생명)이 朝鮮民族(조선민족)의 表現機關(표현기관)이라는 最高使命(최고사명) 下(하)에서 朝鮮民衆(조선민중)의 生活基盤(생활기반)이 漸々(점점) 世界化(세계화)함을 따라 本報(본보)의 소리도 卽今(즉금)부터는 世界的(세계적)으로 立論(입론)치 안하면 아니 되얏다는 意味(의미)에서 그 第一步(제일보)로 英文欄(영문란)을 새로 創設(창설)하얏다. 要(요)컨내 本報(본보)는 朝鮮民衆(조선민중)의 生活史(생활사)이요 우리의 生活(생활)이 漸々(점점) 나어감을 따라 本報(본보)의 號齡(호령)이 一千一百九十號(1천1백9십호)에 達(달)한 今日(금일)부터 紙面(지면)의 革新(혁신)을 斷行(단행)케 한 것이다. 바라건대 滿天下(만천하) 讀者(독자)와 一千七百萬(1천7백만) 우리 民衆(민중)은 本報(본보)의 微哀(미애)을 察(찰)하야 만흔 鞭韃(편달)을 加(가)하여지이다.

世界(세계)에게 一言(일언)
(英文欄(영문란)의 譯文(역문))


世界(세계)는 朝鮮人民(조선인민)에게서 오는 소리를 기다렷슬 것이다. 그러나 世界(세계)는 이 孤立(고립)한 一民族(일민족)의 眞情(진정)에 接觸(접촉)할 아모 機關(기관)도 업섯섯다. 우리편으로 보더라도 世界(세계)에 말하고 십흔 數(수)업는 우리 自身(자신)의 生活(생활)이 잇섯고 또 人類(인류)의 良心(양심)과 同情(동정)의 法廷(법정)에 提出(제출)할 數(수)업는 悲痛(비통)한 事件(사건)이 잇섯다. 이 人子(인자)의 生活(생활)의 一隅(일우)에도 모든 事件(사건)이 닐어나는 것은 世界(세계)의 다른 모든 部分(부분)과 다름이 업다. 우리는 얼마나 懇切(간절)히 이 모든 것을 世界(세계)에 알리고 십헛스랴. 그러나 周圍(주위)의 모든 事情(사정)은 우리로 하여금 이 모든 일을 못하고 잇게 하엿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新聞(신문) 東亞日報(동아일보)에 英文欄(영문란)을 두게 한 까닭이다. 비록 이것이 우리의 要求(요구)를 滿足(만족)하기에 不充分(불충분)하다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잇는 것은 아조 업는 것보다 나은 것이라. 우리는 世界(세계)의 모든 人民(인민)들이 우리의 이 조고마한 計劃(계획)에 對(대)하야 眞情(진정)의 賛意(찬의)를 表(표)할 줄을 밋고 또 全世界(전세계)의 그것을 한데 모흔 것보다도 더 적지 아니한 再生(재생)의 苦痛(고통)을 一身(일신)에 가진 一民族(일민족)의 悲痛(비통)한 絶呌(절규)를 眞心(진심)으로 傾聽(경청)할 줄을 밋는다. 우리는 决(결)코 失望(실망)도 아니하얏고 또 勇氣(용기)도 일치 아니하얏다。 한 理想(이상)은 確立(확립)되얏고 한 計劃(계획)은 完定(완정)되얏다。 우리는 希望(희망)과 勇力(용력)이 充滿(충만)하야 우리가 차즌 新原理(신원리)를 따라 새로운 民族的(민족적) 事業(사업)을 開拓(개척)하려 한다. 우리는 이 英文欄(영문란)이 第一囘(제일회)를 이러한 幸福(행복)된 消息(소식)을 世界(세계)에 傳(전)하는데 使用(사용)하게 된 것을 榮光(영광)으로 안다.

最後(최후)에 우리는 우리 自身(자신)을 紹介(소개)하려 한다. 우리 新聞(신문) 東亞日報(동아일보)는 밸사이유會議(회의)와 朝鮮(조선)의 獨立運動(독립운동)으로 有名(유명)한 一九一九年(1919년)의 翌年(익년)에 誕生(탄생)하고 發育(발육)하얏다. 本紙(본지)는 朝鮮民族運動(조선민족운동)의 唯一(유일)한 機關(기관)으로 이 人民(인민) 中(중)에 最大(최대)한 信用(신용)과 發行部數(발행부수)를 享有(향유)한다. 그것은 全(전)혀 本紙(본지)의 意見(의견)의 公平(공평)과 報道(보도)의 信實(신실)로 因(인)한 것이다. 우리는 大膽(대담)히 民族主義者(민족주의자)인 것을 宣言(선언)한다. 그러나 우리는 决(결)코 쏘비니스트는 아니다. 民主主義(민주주의) 自由主義(자유주의) 正義(정의)는 本紙(본지)의 三個(3개) 標語(표어)다. 世界(세계)는 반다시 自身(자신)의 判斷(판단)으로 우리가 엇더한 者(자)임을 알 것이다. 오, 全世界(전세계)의 모든 人民(인민)들이어, 우리의 眞情(진정)의 人事(인사)를 밧고,우리에게 扶助(부조)의 팔을 내밀라.
본보의 지면혁신에 대하여



1.
신문은 시대의 인도자이며 또 사회의 반영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충실히 보도하는 동시에 올바른 시대정신의 지도를 사명으로 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시대의 진운과 그 보조를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곧 본보 지면의 혁신을 단행하게 한 이유이다.

2.
본보의 강령은 이미 천하에 천명한 것과 같이 조선민중의 충실한 표현기관인 것과 신문화 건설의 지도를 목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의와 주장 아래 조심스럽고 부지런하게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며 이제 다시 지면을 혁신하여 만천하 독자에게 보이는 것은 전적으로 위의 본보 사명을 더욱 넓게, 자세하게 하는데 불과하다. 즉 본보 지면 혁신의 근본 뜻은 시대의 진운에 맞추고자 하는데 있고 따라서 지면의 민중화 실생활화 세계화를 계획하는 것이다.

3.
제1의 민중화는 신문은 독자와 같이 만들 것이라는 본보의 신념 아래 본보 지면을 될 수 있는 대로 일반 독자에게 공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제2의 실생활화는 우리의 절실한 살 길이 실생활의 기초를 굳게 세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뜻에서 본보에 경제란을 한층 풍부하게 해 우리의 생활의식을 넓히려는 것이다. 제3의 세계화는 본보의 생명이 조선민족의 표현기관이라는 최고 사명 아래 조선민중의 생활기반이 점점 세계화함에 따라 본보의 소리도 이제부터는 세계적으로 주장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에서 그 첫 걸음으로 영문란을 새로 만들었다.
요컨대 본보는 조선민중의 생활사이고 우리의 생활이 점점 나아감에 따라 본보의 지령(紙齡)이 1190호에 이른 오늘부터 지면의 혁신을 단행하게 한 것이다. 바라건대 만천하 독자와 1700만 우리 민중은 본보의 작은 뜻을 살펴서 많은 격려와 꾸지람을 해주시기 바란다.

세계에 한마디
(영문란 번역문)


세계는 조선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소리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이 고립한 민족의 참된 마음에 닿을 아무런 매체도 없었다. 우리 편에서 보더라도 세계에 말하고 싶은 수많은 우리 자신의 생활이 있었고 또 인류의 양심과 동정의 법정에 제출할 수많은 비통한 사건이 있었다. 우리 생활의 한 귀퉁이에도 온갖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세계의 다른 모든 부분과 다름이 없다. 우리는 얼마나 간절하게 이 모든 것을 세계에 알리고 싶었으랴. 그러나 주위의 모든 사정은 우리로 하여금 이 모든 일을 못하고 있게 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신문 동아일보에 영문란을 두게 한 까닭이다. 비록 이것이 우리의 요구를 만족하기에는 불충분하다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있는 것은 아주 없는 것보다는 나은 것이다. 우리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이 자그마한 계획에 대해 진정으로 찬성의 뜻을 나타낼 줄을 믿고 또 전 세계의 그것을 한데 모은 것보다도 더 적지 않은 재생의 고통을 한 몸에 지닌 한 민족의 비통한 외침을 진심으로 경청할 줄로 믿는다. 우리는 결코 실망도 하지 않았고 또 용기도 잃지 않았다. 하나의 이상은 굳게 세워졌고 하나의 계획은 완전히 자리 잡았다. 우리는 희망과 역량이 충만해 우리가 찾은 새로운 원리를 따라 새로운 민족적 사업을 개척하려 한다. 우리는 이 영문란의 제1회를 이러한 행복한 소식을 세계에 전하는데 사용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개하려 한다. 우리 신문 동아일보는 베르사이유회의와 조선의 독립운동으로 유명한 1919년 이듬해에 창간했고 성장했다. 본지는 조선민족운동의 유일한 기관으로 이 민족 가운데 최대의 신용과 발행부수를 누리고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본지의 공정한 의견과 믿음직한 기사에 따른 것이다. 우리는 담대하게 민족주의자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맹목적 애국주의자는 아니다. 민주주의 자유주의 정의는 본지의 3대 표어이다. 세계는 반드시 자신의 판단으로 우리가 어떠한 매체인가를 알 것이다. 아,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여, 우리의 참된 인사를 받고 우리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