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5월 2일

“단군은 가짜다!” “무슨 소리? 진짜다!” 불꽃 튄 역사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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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교의 조선’이라는 월간잡지가 있었습니다. 조선총독부 산하 교사단체인 조선교육회가 1925년 9월 창간했죠. 일본어로 찍어냈고 식민교육 보급을 주목적으로 했습니다. 1926년 2월호에 ‘이른바 단군전설에 대하여’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경성제국대학 예과부장인 오다 쇼고(小田省吾)가 썼죠. 한 줄로 요약하면 ‘삼국유사에만 나오는 단군 개국전설은 기껏해야 고려 중기 이후부터나 통용됐다’ 정도가 됩니다. 단군이 기원전 2000년이 넘는 중국 고대 요임금과 맞먹는 존재라는 우리 인식을 깔아뭉개는 주장이었죠. 3년 전 총독부가 펴낸 ‘보통학교 국사 교수 참고서 조선사력 교재’에 나오는 내용과 같았습니다. 대신 한반도에서 제일 먼저 나라를 세운 이는 기자(箕子)라고 했죠. ‘기자조선’의 그 기자입니다.

조선교육회가 발행한 월간 교육잡지 '문교의 조선' 1926년 1월호 표지와 경성제국대학 예과부장 오다 쇼고가 쓴 '이른바 단군전설에 대하여'의 첫 3쪽. 오다의 글은 총 모두 9쪽 분량이었다.


고조선 개국시점을 절반 이상 깎아내리는 일제의 이런 주장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청일전쟁이 일어났던 1894년 나카 미치요(那珂通世)가 단군은 한반도에 불교가 들어온 뒤 승려가 지어냈다고 했죠. 병합 때가 되면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평양 옛 지명이던 왕험(王險)이 고려 초에 인명인 선인왕검(仙人王儉)이 됐고 고려 중기에 단군이라는 존칭이 붙었다고 했고요. 어느 주장이든 한민족의 활동시기와 공간을 크게 줄여놓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죠. 기자조선으로 첫걸음을 떼었건, 위만조선으로 시작했건 우리 역사가 출발부터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 그 틀이 이어졌다는 ‘타율성론’은 공통요소였습니다. 우리 밑바탕에는 식민통치 요소가 원래부터 있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죠.

동아일보 촉탁기자로 활약한 최남선이 쓴 사설 '단군 부인의 망' 상, 하. 상은 1926년 2월 11일자, 하는 2월 12일자에 각각 실렸다. 단군을 부정한 일제 학자들은 거의 도쿄제국대학 출신이었으나 이에 맞선 최남선은 유학 갔던 와세다대에서 퇴학당해 졸업장이 없는 대신 독학으로 자신의 이론을 세웠다.


일찍이 단군을 건국시조 또는 민족시조로 가르쳤고 1909년부터 개천절을 지키면서 민족의 구심점을 형성해왔던 우리 선조들은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화를 낸 사람이 육당 최남선이었죠. 직접 ‘단군절’ 창가를 짓기도 했고 단군을 섬기는 대종교 2대 교주 김교헌의 가르침을 깊이 받아들였던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기미독립선언서를 지은 죄(?)로 감옥에 갇혀 있을 때부터 단군 연구에 몰두했던 최남선은 일제가 걸어온 역사전쟁에 정면으로 맞섰죠. 동아일보가 지면을 제공했습니다. 최남선은 조선광문회, 시대일보를 거쳐 1925년 8월부터 동아일보 촉탁기자로 일하고 있었죠. 동아일보는 창간 직후인 1920년 4월 11일자부터 ‘단군영정 현상모집’에 나설 정도로 단군 수호에 적극적이었고요.

①최남선의 단군론 연재를 알린 동아일보 1926년 2월 17일자 1면 알림 ②1926년 3월 3일자 1면에 실린 단군론 1회 ③단군이 왕험성(평양)의 토착신이라는 일제 학자의 주장을 반박하기 시작한 1926년 5월 25일자 1면의 단군론 29회 ④1926년 7월 25일자 1면의 단군론 77회이자 최종회. 하지만 이 단군론은 서론에 불과했다.


먼저 최남선은 사설 ‘단군 부인의 망(妄)’ 상, 하를 썼습니다. 망(妄)은 ‘망령되다’는 뜻입니다. 문교의 조선에 실린 오다의 글을 ‘망론패설(妄論悖說)’이라고 했고 저네들의 단군말삭론(檀君抹削論)은 근시안적이고 천박하다고 비판했죠. 말삭(抹削)은 지워 없앤다는 의미입니다. 그 방법론도 눈 감고 지팡이를 휘두르며 독설을 나불거린 것에 불과했다고 맹공격했죠. 그래도 모자랐는지 1926년 3월 3일자부터 ‘단군론’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최남선은 일제 학자들의 망령된 주장은 우리의 혈(血)과 심(心)을 모욕하는 것이기에 묵과할 수 없다고 했죠. 이 연재는 무려 77회나 이어졌습니다. 그는 연재를 시작하면서 ‘글을 쓴 뒤에 붓대를 내어던져도 좋다’는 필사의 각오를 밝히기도 했죠.

①서대문감옥에 수감됐을 때 최남선 ②1928년 서재에서 한문 서적을 읽고 있는 모습 ③1934년부터 살기 시작한 효제동 시절의 가족사진. 뒷줄 왼쪽부터 사위 강건하, 장남 한인, 차남 한웅, 삼남 한검. 앞줄 왼쪽부터 딸 한옥, 최남선, 부인 현영채. 외손녀 강옥임, 외손자 강호.


최남선은 불교 발상지 인도의 백향목인 ‘우두전단(牛頭旃檀)’에서 단군(檀君)이 나왔다는 주장에 삼국유사를 들이댔습니다. 거기엔 ‘나무 목’ 단군이 아니라 ‘흙 토’ 단군(壇君)으로 돼 있죠. 승려 날조설을 가볍게 물리친 근거였습니다. 그래봐야 단군은 왕험(평양)의 토착신일 뿐이라는 주장은 선인왕검의 왕검은 상경(上京)을 뜻하는 ‘엄검’이고 선인은 산악도(山岳道)의 실존하는 단군이라고 맞섰죠. 중국 서적엔 그 오래됐다는 단군이 왜 없냐는 일제의 문헌학에 민속학과 언어학으로 대응한 획기적 시도였습니다. 그 바탕엔 인도문화와 중국문화를 넘어선다는 그의 불함문화가 있었죠. 최남선의 이론은 민족주의에 불타는 대중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죠. 단군론은 시작에 불과했고 그가 그린 단군 모습은 계속 바뀌어나갔습니다.


기사입력일 : 2021년 12월 13일
壇(단) 君(군) 論(론) (十四‧14)
朝鮮(조선)을 中心(중심)으로 한
東方文化(동방문화) 淵源(연원) 硏究(연구)

崔(최) 南(남) 善(선)

十四(14)、日本人(일본인) 諸說(제설)의 槪觀(개관) (上‧상)

以上(이상)에서 우리는 日本學者(일본학자) 及(급) 日本人(일본인)의 壇君論(단군론)에 對(대)한 一般的(일반적) 態度(태도)와 傳統的(전통적) 精神(정신)을 보고 또 그 歷史的(역사적) 發展(발전)이 어떠케 만히 政治的(정치적) 事情(사정)과 손목 잡앗는지를 알 수 잇다. 日本人(일본인)의 事大精神(사대정신)이 明治(명치) 以後(이후)로 本尊(본존)을 西洋(서양)으로 옴기면서 支那(지나) 侮蔑(모멸) 朝鮮(조선) 輕視(경시)의 風(풍)이 날로 增長(증장)하고 이 時代精神(시대정신)이 學術的(학술적) 探査(탐사)의 上(상)에도 微妙(미묘)한 影響(영향)을 미친 點(점)은 번거로우니까 이제 姑舍(고사)하고서 훗츠로 壇君古傳(단군고전)의 本文批評(본문비평) 及(급) 本質(본질) 審明(심명)에 對(대)한 그네 共通(공통)의 學的(학적) 論理的(논리적) 虛漏(허루)에 對(대)하야 一瞥(일별)을 주어보자.

日本人(일본인)의 壇君論(단군론)은 대개 文獻(문헌) 偏重(편중)의 弊(폐)에 빠젓다 할 것이니 그 一(일)은 記錄(기록) 本位(본위)로 나타나서 三國遺事(삼국유사)의 資料(자료)를 壇君(단군)의 全生命(전생명)으로 보게 되엿고 또 一(일)은 字面(자면) 本位(본위)로 나타나서 三國遺事(삼국유사) 所傳(소전)의 本文(본문) 批評(비평)에도 表面(표면)의 句語(구어)(量‧양으로나 質‧질로나)에 넘어 얽매어서 도로혀 記錄(기록) 그것의 性質(성질) 곳 그 本地(본지)와 背景(배경)과 成立(성립) 來歷(내력) 等(등) 必須條件(필수조건)을 檢覈(검핵)하는 用意(용의)가 缺如(결여)하고 甚(심)하면 古意(고의)와 私注(사주)를 混同(혼동)하야 닥치는 것 업는 팔을 내두르기도 하얏다. 아모 것보담도 이것이 그 잘못된 出發點(출발점) 又(우) 行相(행상)이라 할 것이다.

그 다음 그네의 壇君論(단군론)에는 거의 民族學的(민족학적) 又(우) 民俗學的(민속학적) 觀察(관찰)이 빠젓슴을 指摘(지적)할지니 朝鮮人(조선인)에게도 그네 相應(상응)의 民族的(민족적) 來歷(내력)도 잇고 民族文化(민족문화)의 展開相(전개상)도 잇고 그 時間的(시간적) 産物(산물)의 空間的(공간적) 徵驗(징험)도 잇슬 것이오 또 有(유) 民史(민사) 以來(이래)로 許多(허다)한 異民族(이민족)과의 挨拶(애찰) 交錯(교착)이 끈히지 아니한 만콤 文化的(문화적) 交涉(교섭)의 映像(영상)도 넘나들어 잇슬 것이 母論(모론)이언마는 不可思議(불가사의)라 할만치 이 方面(방면)의 일은 도모지 閑却(한각)되여 버렷다. 世界(세계)도 어떠한 未開部族(미개부족) 單純社會(단순사회)에라도 다 잇는─古古原古的(고고원고적)으로 잇는 天地開闢(천지개벽)、人文起原(인문기원)、氏族本源(씨족본원)에 關(관)한 神話(신화)、傳說(전설)、乃至(내지) 그것을 背景(배경)으로 하는 原始宗敎(원시종교)、原始法制(원시법제)가 일즉부터 開明(개명)도 하고 오래고 깁흔 社會的(사회적) 過去(과거) 生命(생명)을 가진 朝鮮(조선) 及(급) 朝鮮人(조선인)에게만 홀로 이것이 缺如(결여)하엿다고 보아버리는 奇現象(기현상)이 생기게 되고 이 때문에 몃千(천) 年前(년전)의 國祖說話(국조설화)、極(극)히 幼稚(유치)하다고도 하고 素樸(소박)하다고도 할 建國神話(건국신화)가 몃千(천) 年(년)뒤 다 밝은 世上(세상)에 忽然(홀연)히 特殊(특수)한 作者(작자)의 손에 現出(현출)하야 금시에 一般民衆(일반민중)의 示唆的(시사적) 盲從(맹종)을 사게 되엿다는 奇說(기설)이 成立(성립)되는 줄로 알게 됨이 신긔하다면 신긔한 일이다. 朝鮮(조선)에 오랜 神話(신화)와 묵은 宗敎(종교)와 남다른 文化的(문화적) 事實(사실)이 것헤 얼픗 눈 띄우지 아니함이 아마 外國人(외국인)인 그네로 하야곰 업나니라는 速斷(속단)을 가지게 한 一原因(일원인)도 되겟지마는 理論上(논리상) 應有(응유)할 것이 實際上(실제상) 不有(불유)한 境遇(경우)에는 考察(고찰)과 論究(논구)가 다 詳審(상심)을 要(요)할 것이오 뜨 그 그러함이 社會的(사회적)으로 늙어서 만히 古物(고물)의 衰讃(쇠찬)을 지내엇기 때문인 만콤 累積(누적)된 밋희 古層(고층)을 堀入(굴입)하고 蒙蔽(몽폐)된 속의 原相(원상)을 發明(발명)하기에 全的(전적) 又(우) 根本的(근본적)의 誠意(성의)와 努力(노력)이 잇슬 것이어늘 그러치 아니하고 노닥노닥한 시방만 보고 비단적 처음을 믁삭한다든지 늙어 골골하고 잣바진 것을 보고 호랑이 잡든 젊엇슬 적 잇섯슴을 모르는 체하고 만다든지 함은 줄잡아도 稽古闡幽(계고천유)의 誠(성)이 잇는 學者(학자)의 일은 아닐 것이다. 가령 壇君(단군) 古傳(고전)으로 말하건대 그것이 설사 中年(중년)의 무슨 必要(필요)에 因(인)한 創作(창작)으로 칠지라도 白地(백지)의 孟浪(맹랑)한 말이 開明(개명)한 社會(사회)에서 全民衆(전민중)의 信仰(신앙)을 살 수 업슴애 鑑(감)하야 그 臺本(대본) 혹 依據(의거) 骨子(골자)로의 그 本生的(본생적) 前事的(전사적) 方面(방면)에 엔만한 注意(주의)를 더함이 우리 良心(양심)의 命令(명령)이 아닐 수 업슬 것이다. 그러나 덥허노코 업새버리는 그네에게는 傳說的(전설적) 生命(생명)까지 제갑슬 찻지 못하는 터이니까 壇君(단군)이 얼만콤이라도 事實(사실)의 背景(배경)을 가젓다 함 가틈은 당초에 問題(문제)도 될 리 업슴이 母論(모론)이엇다.

요사이 몃칠 동안은 校正上(교정상) 叙說文(서설문)과 引用文(인용문)이며 本文(본문)과 注記(주기)가 混濟(혼제)되어 文意(문의)를 거느리기에 어렵게 되엇슴을 謝告(사고)함니다.

단군론 (14)
조선을 중심으로 한 동방문화 연원 연구
최남선
14. 일본인 제설의 개관(상)

이상에서 우리는 일본학자와 일본인의 단군론에 대한 일반적 태도와 전통적 정신을 보고 또 그 역사적 발전이 어떻게 정치적 사정과 많이 손잡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일본인의 사대정신이 메이지 이후로 기둥을 서양으로 옮기면서 중국 모멸, 조선 경시의 바람이 날로 늘어나고 이 시대정신이 학술적 탐사에도 미묘한 영향을 미친 점은 번거로우니까 이제 그만두고 하나로 단군 고전의 본문 비평과 본질 파악에 대한 그들 공통의 학문적 논리적 허점에 대하여 잠깐 살펴보자.

일본인의 단군론은 대체로 문헌 편중의 폐단에 빠졌다고 할 것이니 하나는 기록 본위로 나타나서 삼국유사의 자료를 단군의 모든 생명으로 보게 되었고 또 하나는 글자 본위로 나타나서 삼국유사에 전해 내려오는 본문 비평에도 겉의 구절(양으로나 질로나)에 너무 얽매어 도리어 기록 그 자체의 성질 곧 그 본모습과 배경과 성립 내력 등 필수조건을 조사하는 뜻이 없고 심하면 옛 뜻과 개인의 주석을 혼동해 닥치는 것 없이 팔을 내두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잘못된 출발점 또는 주관적 태도라 할 것이다.

그 다음 그들의 단군론에는 거의 민족학적 또는 민속학적 관찰이 빠진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조선인에게도 그들과 걸맞은 민족적 내력도 있고 민족문화의 전개양상도 있고 시간적 산물의 공간적 경험 사실도 있을 것이오 또 민족사 이래로 수많은 이민족과의 교류 교착이 끊이지 않은 만큼 문화적 교섭의 영상도 넘나들어 있을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불가사의라고 할만큼 이 방면의 일은 도무지 등한히 여겼다. 세계도, 어떠한 미개부족 단순사회에라도 다 있는─태곳적에 있던 천기개벽, 인문기원, 씨족본원에 관한 신화, 전설 내지 그것을 배경으로 하는 원시종교, 원시법제가 일찍부터 개명도 하고 오래되고 깊이 있는 사회적 과거 생명을 지닌 조선과 조선인에게만 홀로 없다고 보아버리는 기현상이 생기게 되고 이 때문에 몇 천 년 전의 국조설화, 극히 유치하다고도 하고 소박하다고도 할 건국신화가 몇 천 년 뒤 다 밝은 세상에 느닷없이 특수한 작성자의 손으로 나타나 일반 민중에게 미리 일러주어 이내 눈감고 따르게 되었다는 기이한 주장이 성립되는 줄로 알게 된 것이 신기하다면 신기한 일이다. 조선에 있는 오랜 신화와 묵은 종교와 남다른 문화적 사실이 겉으로 얼핏 눈에 띄지 않은 것이 아마 외국인인 그들로 하여금 ‘없구나’라는 속단을 품게 한 하나의 원인도 되겠지만 논리상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실제로는 없는 경우에는 고찰과 연구가 모두 속속들이 살펴야 할 필요가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늙어서 옛 것이 크게 쇠하거나 기림을 받거나 했기 때문인 만큼 그 아래의 오랜 지층을 파들어 가고 감추어진 속의 원래 모습을 환하게 드러내기에 전적으로 또는 근본적인 성의와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노닥노닥한 현재만 보고 단지 처음을 지워버린다든지 늙어 골골하고 자빠진 것을 보고 호랑이 잡던 젊었을 시절이 있었음을 모르는 체하고 만다든지 하는 것은 줄잡아도 과거를 상고하고 아득한 사실을 밝히는 성실함이 있는 학자의 일은 아닐 것이다. 가령 단군 고전으로 말하면 그것이 설사 중세의 어떤 필요에 의한 창작으로 치더라도 생판으로 딱한 말이 개명한 사회에서 온민중의 신앙을 살 수 없음에 비추어 그 대본 또는 의거한 골자의 본래적인, 지나간 방면에 웬만한 주의를 더하는 것이 우리 양심의 명령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덮어놓고 없애버리는 그들에게는 전설상의 생명까지 제값을 찾지 못하는 터이므로 단군이 얼마만큼이라도 사실의 배경을 지녔다는 점 같은 것은 애초에 문제도 될 리 없음이 물론이었다.

요사이 며칠 동안은 교정상 서술문과 인용문이며 본문과 주석이 뒤섞여 글의 뜻을 파악하기에 어렵게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