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11월 06일

며느리 빈자리 채운 어머니 “우리 뼈 고향에 묻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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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로는 사진 한 장이 긴 글보다 더 많은 사연을 전달하기도 합니다. 할머니와 손자가 나란히 찍은 이 사진이 그렇습니다. 동아일보 1925년 11월 6일자 2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손자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할머니의 손은 그 어떤 보호막보다 안전하게 아이를 지켜줄 듯한 느낌을 생생하게 전해줍니다. 할머니는 백범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이고 아이는 김구의 큰아들, 그러니까 곽낙원의 맏손자인 김인입니다. 이 무렵 곽낙원은 큰 결단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아들이 있는 중국 상하이를 떠나 고향 황해도로 돌아가겠다고 마음먹었죠. 그것도 67세의 할머니가 두 살짜리 둘째 손자를 데리고 먼 길을 떠나겠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물론 주위에서도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왼쪽은 동아일보 1925년 11월 6일자 2면에 실린 곽낙원과 맏손자 김신의 사진. 오른쪽은 1936년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 사진이다. 앞줄은 엄항섭-연미당 부부의 자녀로 엄기순 엄기선 엄기동이고 가운뎃줄은 송병조 이동녕 김구 이시영 조성환. 뒷줄은 연미당 엄항섭 조완구 차리석 이숙진이다.

동아일보 기사는 곽낙원이 고국강산을 너무 그리워한다고 전했지만 속사정은 따로 있었습니다. 손자를 이대로 죽일 수 없다는 절박함이었죠. 1925년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변은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할 정도의 끔찍한 가난이 어른거리고 있었습니다. 청사 임차료를 못 내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임시정부 요인들이 굶는 날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죠. 교통국과 연통제가 일제 단속으로 무너져 국내 자금이 끊겼고 미국 하와이 등지 교포들이 내는 인구세도 제대로 오지 않았습니다. 교포 자금을 도맡아 쓰다시피 하던 이승만의 구미위원부가 해체명령을 받자 크게 반발한 여파가 컸죠. 곽낙원이 쓰레기통을 뒤져 건져낸 배추 껍데기로 찬거리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었습니다.

왼쪽은 1922년 김구가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장이던 시절 찍은 가족사진. 오른쪽이 아내 최준례이고 가운데는 큰아들 김인이다. 가운데 사진은 1924년 상하이 공동묘지에 묻힌 최준례의 묘비 주위에 모인 김구 가족. 왼쪽부터 둘째아들 김신, 김구, 곽낙원, 큰아들 김인이다. 묘비문은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김두봉이 썼다. 오른쪽 사진은 1999년 최준례 유해를 서울 효창공원 김구 묘소로 옮겨 합장하는 모습.

곽낙원은 이미 1년 전에 며느리 최준례를 폐렴으로 잃었습니다. 고향에서는 손녀 세 명을 연이어 떠나보낸 아픔이 가슴에 맺혀 있었죠. 손자의 목숨도 영양실조로 끊어질 위기였습니다. 아들 김구가 7대 독자였던 만큼 대가 끊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절실했을 법합니다. 그래서 무리한 귀향을 강행했겠죠. 하지만 인천에 도착하자 여비가 떨어졌고 마중 나오겠다는 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곽낙원은 당황하지 않고 동아일보 인천지국을 찾아가 사정 이야기를 했다죠. 지국에서는 벌써 신문보도로 귀국하시는 걸 알고 있었다며 경성 갈 여비와 차표를 사드렸습니다. 경성에서도 다시 동아일보를 찾아가자 사리원까지 가는 차표를 사드렸죠. 백범일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왼쪽은 1934년 윤봉길 의거 직후 중국 상하이에서 찍은 김구 가족사진. 앞쪽에 앉아있는 사람이 곽낙원이고 뒷줄 왼쪽부터 김인 김구 김신이다. 오른쪽 사진은 1939년 곽낙원이 별세했을 때 묘지에서 찍은 사진. 왼쪽부터 김신 김인 김구 김홍서.

19세기 말에 태어나 14세에 결혼한 곽낙원은 조선 여인이었고 배움도 적었습니다. 하지만 동학운동에 뛰어들었던 아들을 지켜보면서, 아들이 일본 육군중위를 죽이거나 105인 사건으로 옥에 갇혔을 때 뒷바라지하면서 항일의식이 커졌습니다. 특히 며느리, 손녀와 어렵게 생활하면서는 근대의식도 키웠나갔죠. 며느리 최준례는 안신여학교 교사로 일한 신여성이었지만 봉급이 적어 겨울에는 직접 나무를 해서 방에 불을 때 추위를 면했다고 합니다. 시어머니-며느리-손녀 3대가 서로 의지하며 생활한 이후로 곽낙원은 언제나 며느리 편을 들었죠. 이 때문에 김구는 내외 싸움에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고 푸념했습니다.

왼쪽은 1939년 별세한 곽낙원 장례식에 모인 김구 가족. 왼쪽부터 김신 김인 김구. 김인은 해방을 5개월 앞둔 1945년 3월 충칭에서 숨졌다. 오른쪽 사진은 모친 곽낙원 묘비 앞에 선 김구.

맏손자까지 불러들인 곽낙원은 1934년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손자들과 함께 다시 중국으로 탈출합니다. 76세 때였죠. 김구를 만나서는 “지금부터 ‘자네’라고 하고 잘못이 있더라도 회초리를 쓰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아들의 체면을 살려준 것이죠. 고령이어서 임시정부의 짐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은 기우였습니다. 임시정부 살림살이를 챙겼던 정정화는 ‘그 한 분이 우리 가운데 말없이 앉아 계신 것만 해도 우리에게는 큰 힘이 되었고 정신적으로도 우리의 큰 기둥이 되기에 충분했다’고 말했죠. 어느새 곽낙원은 ‘임시정부의 어머니’가 돼 있었습니다. 그가 1939년 숨질 때 김구에게 당부한 말은 “독립이 되어 귀국하는 날에는 내 유골과 인이 어미의 유골까지 가지고 돌아가서 고향에 묻거라”였습니다.

기사입력일 : 2021년 09월 24일
『죽어도 故國江山(고국강산)』
기박한 생애에 남다른 뜻 가진
上海(상해) 客窓(객창)의 金九(김구) 氏(씨) 母親(모친)


◇······상해림시정부 김구(金九)씨의 모친 곽락원(郭樂園)(六七¤67)녀사는 오늘날까지 아들과 함께 파란중첩한 생활을 하여오며 지금으로부터 약 사년 전에 그의 고향인 황해도 신천군(信川郡)을 떠나 며느리와 손자들을 다리고 아들 김구 씨의 잇는 상해로 건너와서 인정풍물이 모다 생소한 이역 타관에서 하로 가튼 분투의 생활을 하여 오든 중 지금으로 약 이년 전에는 가치 고생사리를 하여 오든 그의 자부(子婦)인 김구 씨의 안해가 불행히 병마에 걸리어 이역강산에서 황천의 길을 먼저 떠나가게 되매 곽 씨 부인은 타관에서 현숙하든 며느리를 일허버리고 눈물 마를 날이 업시 오즉 죽은 며느리의 소생인 여섯 살 된 손자와 두 살 된 손자를 다리고 눈물로 세월을 지내다가

◇······근일에는 다시 고국 생각이 간절하다고 그 아들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도라가고저 준비 중이라는데 상해에 잇는 여러 사람들이 고국에는 갓가운 친척도 한사람 업는데 늙으신 이가 그대로 나아가면 엇더케 하느냐고 만류하나 도모지 듯지 아니하고 백골이나 고국강산에 뭇치겟다고 하며 아조 상해를 떠나기로 작뎡하엿다는데 아들의 만류함도 듯지 아니하야 할 수가 업다 하며 그 부인은 조선에 나간대도 갈 곳이 업슴으로 그의 압길이 매우 암담하다고 일반은 매우 근심하는 중이라¤사진은 곽 씨 부인과 그의 맛손자

(상해특신)


“죽어도 고국강산”
기구한 생애에 남다른 뜻 가진
상하이 객지의 김구 씨 모친


◇······상하이 임시정부 김구 씨의 모친 곽낙원 여사(67)는 오늘날까지 아들과 함께 파란중첩한 생활을 하여오며 지금으로부터 약 4년 전에 그의 고향인 황해도 신천군을 떠나 며느리와 손자들을 데리고 아들 김구 씨가 있는 상하이로 건너왔다. 인정과 풍물이 모두 생소한 이역 타관에서 하루 같은 분투의 생활을 하여 오던 중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에는 같이 고생살이를 하여 오던 그의 며느리인 김구 씨의 아내가 불행에 병에 걸려 이역 강산에서 황천의 길을 먼저 떠나가게 되었다. 곽 씨 부인은 타관에서 현숙하던 며느리를 잃어버리고 눈물 마를 날이 없이 오직 죽은 며느리의 소생인 여섯 살 된 손자와 두 살 된 손자를 데리고 눈물로 세월을 지내다가

◇······최근에는 다시 고국 생각이 간절하다고 그 아들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준비 중이라고 한다. 상하이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 고국에는 가까운 친척도 한사람 없는데 늙으신 이가 그대로 돌아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만류하였다. 그러나 도무지 듣지 않고 백골이나 고국강산에 묻히겠다고 하며 아주 상하이를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아들의 만류도 듣지 않아 할 수가 없다고 하며 그 부인은 조선으로 돌아간다고 하여도 갈 곳이 없으므로 그의 앞길이 매우 암담하다고 주변 사람들은 매우 근심하고 있다. 사진은 곽 씨 부인과 그의 맏손자

(상하이 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