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12월 11일

조선의 천재 파일럿을 짝사랑한 일본의 속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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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12월 5일 밤 남대문 역 광장은 현해탄을 건너오는 한 조선 청년을 먼발치에서라도 보려는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학생, 직장인, 종교인, 기생들까지 몰려 발 떼기조차 힘들었죠. 그런데 이들 가운데엔 일본 보수단체 국수회 회원 1000여 명도 있었습니다. 이틀 뒤 장곡천정 공회당. 60여 명의 일본인을 포함한 유지 200여 명이 누군가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주인공이 나타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고, 일본계 신문인 조선신문의 아키야마 사장과 경성부윤 요시마쓰는 축사를 통해 그의 성공을 기원했습니다. 9일엔 사이토 조선총독이 관저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기도 했고요.

1922년 12월 고국방문 비행 때의 패기만만한 안창남. 오쿠리 비행학교 교수로, 2등 비행사였던 그는 이듬해 7월 일본 항공국으로부터 1등 비행사 면허를 받았는데 당시 일본에서 1등 비행사 면허증을 보유한 사람은 7명에 불과했다.
이처럼 국적과 계급, 정파를 가리지 않고 대대적 환영을 받은 청년은 바로 21세의 천재 비행가 안창남이었습니다. 휘문고보에 다니던 1917년 미국인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보고 비행사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오쿠리 비행학교에서 비행술을 배워 1921년 3등, 이듬해 2등 비행사 면허를 땁니다. 그때마다 콧대 높은 일본인 경쟁자들을 제치고 1, 2등을 차지해 일약 스타로 떠오르죠.

역사적인 고국방문 비행을 앞두고 정비를 마친 뒤 여의도 격납고에서 대기 중인 안창남의 애기, ‘금강호’. 안창남은 이 영국제 단발 복엽기의 몸체 양쪽에 조선 13도 지도를 그려 남다른 애국심을 보였다.
당시로선 최첨단 기술을 보유한 안창남은 부와 명예가 보장된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조선 형제’, ‘조국’을 잊지 않고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의 꿈은 조선 청년들에게 비행술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첫걸음으로 고국방문 비행을 추진해 1922년 12월 10일을 디데이로 잡았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열광하는 것은 당연한데, 일본은 무슨 까닭이었을까요?

고국방문 비행을 위해 1922년 12월 5일 남대문 역에 도착한 안창남을 환영하는 수많은 군중. 이들이 외친 환호에 대해 당시 동아일보는 ‘남산이 울리는 만세소리’라고 보도했다.
일제의 속셈은 일본 땅에서 비행기술을 배운 안창남을 이용해 자기네의 선진 항공 및 군사기술을 홍보하고 식민통치를 미화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 항공국, 조선총독부, 조선군사령부, 평양항공대 등은 안창남의 고국 비행을 적극 지원했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도 안창남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하며 조선인이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죠.

1922년 12월 7일 밤 열린 안창남 환영회에 참석한 유지들. 경성부윤, 조선신문사 사장과 같은 일인들도 축사를 하는 등 안창남은 국적, 종교, 계급을 가리지 않는 환영을 받았다. 원 안은 답사하는 안창남.
하지만 안창남은 당하지 않았습니다. 동아일보에 수기를 보내 ‘이번 비행으로 우리도 하면 된다, 남보다 낫다는 신념을 두텁게···’라고 호소하는가 하면 비행 당일엔 여의도를 날아올라 순종이 칩거하던 창덕궁 상공을 선회하며 예를 표하다 ‘세계에서 가장 앞서 비행기를 발명했던 선조의 피가 혈관에 흐르니 우리도 노력하면···’이라는 요지의 삐라를 뿌리기도 했습니다.

일제는 배신감을 느꼈을 법합니다. 당초 평양, 진남포, 개성, 대구, 부산, 신의주, 만주의 안동현까지 계획했던 고국방문 비행이 경성과 인천에 국한됐고, 그에게 비행기를 마련해주기 위해 모금에 나섰던 ‘고국방문 비행 후원회’가 결실 없이 흐지부지 끝나버린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고국방문 비행에서 창덕궁 위를 배회하며 순종에 예를 표하는 안창남의 금강호. 일제는 안창남을 첨단 과학기술의 아이콘으로 선전하며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수단으로 활용하려 했지만 안창남은 전혀 부응하지 않았다.
일본 비행학교 졸업 때부터 안창남을 눈여겨보던 동아일보는 그의 고국방문 비행을 주최합니다. 12월 11일자 3면을 통째로 할애하는 등 보도에 충실하기도 했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이 역사적인 광경을 직접 볼 수 있도록 당국과 협의해 행사장 교통편을 늘리기도 했습니다. 모두 민족의식과 함께 ‘과학을 통한 신조선의 건설’이라는 희망을 불어넣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고국방문 비행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 1923년 1등 비행사 면허를 딴 안창남은 그 해 9월 관동대지진 때 아무 이유 없이 학살당하는 조선 동포들을 지켜보면서 누가 조선민중의 적인지 확실히 깨닫고는 ‘항공 독립운동’에 투신합니다. 중국으로 망명해 중국 군벌 밑에서 힘을 기르던 그는 1928년 비밀결사 대한독립공명단 조직을 주도하며 항일투쟁을 본격화했습니다.

중국으로 건너가 산시성 타이위안 비행학교에서 비행사들을 길러내던 안창남(왼쪽). 그는 이즈음 비밀 독립결사인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지만 1930년 비행기 추락으로 29세의 꽃다운 나이에 순국하고 말았다.
안창남은 1930년 4월 비행연습 도중 추락해 29세의 꽃다운 나이에 순국했지만, 그의 항공 독립운동 정신은 1920년대 중반부터 그의 뒤를 따라 중국에서 항일 무장투쟁에 뛰어든 후배 조선 비행사들에게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기사입력일 : 2021년 01월 22일
半島(반도)의 天空(천공)에 最初(최초)의 歡喜(환희)
酷寒(혹한)을 征服(정복)한 同胞(동포)의 熱誠(열성)

安昌男(안창남) 君(군) 故國訪問(고국방문) 飛行(비행)의 日(일)
觀衆(관중) 五萬(오만) 京城(경성) 空前(공전)의 大盛况(대성황)
고대하든 한양에 죽기를 무릅쓰고 방문 비행
오만 관즁을 렬광케 한 안창남 씨의 고등비행



기다리든 날이 왓다. 조선의 비행가가 조선의 하늘에서 처음으로 날느는 날이 왓다. 여의도(汝矣島·여의도) 넓으나 넓은 마당은 만여 명의 학생과 수만의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엇다. 그러나 불행히 아츰부터 바람이 몹시 불어 공중은 고사하고 평디에서도 넓은 벌판에서 모라오는 찬바람이 얼골을 따리어 이로 정신을 차릴 수 업슴으로 여러 사람들은 안창남 군을 만류하야 바람이 적이 자기를 기다리엿스나 바람은 용이히 그치지 아니하고 수만 군중은 찬바람을 쏘히며 기다리엇섯다.

열두 시가 되매 안창남 군의 말이 이와 가치 치운 날 수만 군중을 풍세로 인하야 기다리게 함은 심히 죄송한 일이라고 가치 온 일행의 만류도 듯지 아니하고 격납고 안에서 비행긔를 끄러내이니 벌서부터 군중 사이에는 환호 소리가 새여나온다. 그러나 날이 너무 칩기 때문에 긔계 운뎐에 사용하는 『카스톨』이란 기름이 어러서 푸로펠라가 돌지 아니하야 고교 기사 이외 여러 사람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힘을 드린 결과 령시 이십이분경부터 긔계가 돌기 시작하야 용장한 『푸로펠라』 소래를 내이며 서서히 뜨기 시작하야 령시 이십오분경에는 누르고 푸른 점이 석겨 박히고 량편으로 거륵한 조선 디도를 그린 금강호(金剛號·금강호)는 맑고 맑은 공중으로 웅장하게 나라오르니 수만 군중의 환호하는 소래는 여의도 넓은 마당이 떠나가는 듯하고 만여 명 학생이 들고 섯는 환영 긔발은 봄 동산에 나비 날 듯 깃분 긔운이 하늘을 찌르는 듯하엿다.

안 군은 차차 놉히 떠서 일쳔 미돌 이상에 놉히로 뜨니 한업시 맑은 하늘에 장쾌한 소래만 은은히 들니고 비행긔는 아믈〈하게 떠서 한강을 지나 남산 가으로 좃차 동대문 편으로 도라 창덕궁에 례를 하고 경성을 한번 돈 후 비행긔는 공중에서 가을에 떨어지는 나무 입새 가치 세로 핑핑 도라 안 군의 독특한 재조를 보히니 관중은 꿈인 듯 취한 듯 박수갈채가 텬디를 진동하엿다.

이어서 비행긔가 걱구로 내리박히다가 다시 두어 번 가로 재조를 넘으매 관중은 그의 신묘한 재조에 너무 감격이 되여 엇절 줄을 모르고 환호하엿다. 비행긔는 다시 가든 길을 곳치어 동편으로부터 서편으로 손에 잡힐 듯이 얏게 떠서 부인석 잇는 편으로 내리닥치니 일반 관중이 비행긔에 차이지나 아니할가 의심할 만하엿다.

비행긔는 일반 래빈과 부인석의 머리를 싯치며 남편으로 섯는 학생 등의 머리 위를 가비엽게 지나서 령시 사십분에 십오분간 비행을 맛치고 서서히 내리니 학생의 환영 긔발이 수업시 번득이며 갈채가 성대하엿더라.


五萬(오만) 觀衆(관중)의 歡呼(환호)
여의도 벌판에 모힌 군즁
조선에 처음 보는 대셩황


안 군의 고국방문 비행을 손곱아 고대하든 삼십만의 경성부 인민은 너나 할 것 업시 모다 그 장쾌하고 의미 잇는 비행을 구경하기 위하야 혹은 뎐차로, 흑은 긔차로, 혹은 자동차로, 혹은 도보로 여의도 넓은 벌판으로 향하엿는대 오전 열시가 지나고 동 열한시가 되매 사면에서 구름가치 모혀드는 군중은 그 수효가 무려 오만 명에 달하야 광막한 여의도 벌판에는 사람으로 성을 싸코 사람으로 바다를 일우게 되엿다.

총독부(總督府·총독부)에서는 재등(齋藤·재등) 총독을 위시하야 기타 여러 관리가 출석하엿스며, 부텽(府廳·부청)에서도 다수한 사람이 구경을 왓스며 기타 경성 안에 잇는 각 신문긔자와 통신긔자는 몰론이오, 각 은행 회사에서도 다수한 래빈이 잇서서 경성 안에 잇는 단톄로는 별로히 빠진 곳이 업셧고, 또 학교 칙으로는 휘문고보(徽文·휘문) 중앙고보(中央·중앙) 협셩(協成·협성) 보성고보(普高·보고) 중동(中東·중동) 동광(東光·동광) 경신(儆新·경신) 동덕(同德·동덕)녀학교로 위시하야 인천(仁川·인천)에서 온 박문(博文·박문)학교와 동소문 밧게서 온 숭정(崇正·숭정)학교와 또 고양(高陽·고양)에서 온 삼산학교(三山·삼산)와 기타 남녀 소학교를 합하야 학생으로만 하여도 그 수효가 무려 만 명에 달하엿스며, 또 그 외 개인으로 혹은 청년회에서 수만흔 사람이 래장하야 그 성황으로 말하면 조선에서 임의 보지 못하든 대성황을 일우엇다.

이로 인하야 현장은 매우 복잡하엿는대 룡산 경찰서에서 출장한 다수한 경관과 소년군(少年軍·소년군)과 기타 위원들이 극력으로 질서유지에 로력하엿다. 시간이 차차 갓가워오매 일반 군중들은 얼골에 긴장한 빗을 띄고 호주머니에서 연방 시계를 끄내 보며 비행긔의 『푸로폐라』 소래가 한분이라도 속히 들니기를 간절히 고대하엿더라.


奏樂(주악)과 爆竹(폭죽)으로 開會(개회)
비행하기 전의 간단한 식사


오전 열시 반이 지나고 동 열한시가 되자 안 군을 태운 자동차가 여의도에 도착하매 일반 군중의 태도는 매우 긴장하엿다.

즉시 비행은 시작하게 되야 군중은 그의 성공을 정성것 축원하엿스며, 본사에서는 사댱 송진우(宋鎭禹·송진우) 씨의 이번 비행으로 말하면 조선 민족의 광영인 동시에 안 군의 큰 성공이며 따라서 오늘 일긔가 치움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여러분이 만히 래림하신 것은 대단히 감사하는 바이올시다』하는 의미의 인사가 잇섯고, 그 뒤를 따라 안 군의 『매우 감사함니다』하는 간단한 답사가 잇셧스며, 다시 재등 총독의 권사(勸辭·권사)가 잇셧다.

다시 그 뒤를 이어 본사를 위시하야 동명사(東明社·동명사) 조선신문사 국수회(國粹會·국수회) 후원회(後援會·후원회) 광영동우회(光榮同友會·광영동우회)에서는 사람의 눈이 부실 듯이 광채 나는 화환(花環·화환) 한 개식을 주엇스며, 그 다음 룡산 군사령부(軍司令部·군사령부)에서 보낸 긔념품(紀念品·기념품) 증정이 잇슨 후에 안 군은 만족과 깃붐을 늣기면서 비행장으로 향하엿는대, 경성악대(京城樂隊·경성악대)에서는 웅장한 주악을 하고 한편에서는 폭죽을 터치며 따라서 군중은 손이 깨여저라 하고 손벽을 첫는대, 이 모든 소래는 한 데 모히어 안 군의 긔운을 도두엇스며 그와 동시에 이 소래는 여의도 전부가 떠나갈 듯이 요란하엿더라.


汝矣島(여의도)에, 鷺梁津(노량진)에
열 채의 객차를 련결한 림시 차
어졔 아츰 남대문 역의 대 복잡


어제 아츰의 남대문 뎡거장은 엇더하얏는가. 뎨일차 림시렬차(臨時列車·임시열차)를 운뎐하려는 아홉시 삼십분이 각 일각으로 가까워짐을 따라 날뛰는 학생들과 밀니는 군중이 일장의 대 복잡을 이루엇다. 학생을 뎡돈하는 선생의 호각소리, 동무를 부르는 어린 생도들의 휘두루는 긔빨, 단톄를 지휘하는 인도자(引導者·인도자)의 웨치는 소리가 실로 물 끌틋 하얏다.

구내(構內·구내) 대합실 할 것 업시 잔득 들어찬 군중은 가만히 서잇는 사람 收(수)이라고는 하나도 업다. 안 군의 신묘한 재조를 맨 몬저 보려고 너도나도 뎨일 첫차를 놋치지 말려는 군중은 차표 사기에, 동무 찻기에 이리 달리고 저리 달리는 모양이 오즉 마음속에 안 군이 잇고, 여의도만 잇는 듯하얏다.

예뎡한 시각이 이르매 전부 객차 열 채를 련결한 장사(長蛇·장사) 갓흔 림시렬차는 수쳔 군중을 실코 한 소리 고동에 로량진을 향하고 떠낫다. 이만 하면 훤하여지리라고 생각한 남문 역 널분 마당에는 여전히 사람의 물결이 남아 잇다. 한 줄에 이은 듯한 룡산행(龍山行·용산행) 뎐차는 모조리 만원이오, 넓은 길에 걸어가는 사람이 뒤를 이어 련락부절(連絡不絕·연락부절)함도 불구하고 뎡거장에는 갈사록 사람이 밀리엇다.

첫차를 놋친 군중은 다소간 실망의 빗을 띄엿스나 싸늘한 아침 바람에 붉어진 얼골에는 그래도 희망(希望·희망)의 새로운 빗과 민족뎍으로 뜻 잇는 사업을 기리는 깃붐의 빗치 넘치엇다. 열시 십오분에 떠나는 인천행(仁川行·인천행) 렬차가 군중의 일부분을 태워가지고 떠난 뒤를 이어 열시 삼십분에 뎨이차(第二次·제이차) 림시렬차가 또다시 조급한 마음에 날뛰는 천여 명 군중을 담어가지고 공중의 주인 우리 안 군이 어루만질 여의도의 하늘을 향하야 급한 박퀴를 굴리엇다.


電車(전차)로만
近(근) 萬名(만명)
나도 가자 너도 가자
여의도에 여의도에


십일 경성시가는 전부 비행긔 구경군으로 덥히엿스며 더욱 뎐차는 아참 일곱시부터 동대문에서는 뒤를 이어 신룡산 행의 뎐차가 떠나고 뎐차마다 남녀로소가 가득하며 더욱 학생들은 어느 뎐차든지 승객의 대부분을 점령하얏고 특히 중동학교(中東學校·중동학교) 생도 일천오백 명은 긴 행렬을 지어 도보로 비행장까지 가는대 그 행렬의 기리가 삼백여 간을 느러서서 광경이 굉장하엿고 각 신문사와 잡지사에는 자동차 우에 선명한 긔발을 아참 해빗에 날니며 뒤를 이어 나가고 혹 꼿도 실고 혹 화려하게 장식한 자동차가 사이〈 끼어 길 가는 사람의 눈을 황홀케 하얏다.

오전 열두시까지만 나간 뎐차가 일백오십여 대로 근 륙천 명의 사람을 운전하고 오후에도 수천 명을 운뎐하얏스며 그 외에 거러간 사람은 몃 쳔 명이나 되는지 이로 헤아릴 수 업스며 뎐차 종점부터 비행장까지 사람이 뒤를 이어 실로 전에 업든 장관을 이루엇더라.


祝電(축전) 踏至(답지)
간도에서까지
백여 장의 축하 뎐보


십일의 안창남 군 고국방문 뎨일회 비행에 대하야 각 디방의 청년단톄와 본사 지국, 기타 유지로부터 축하 뎐보가 답지하얏는대 그 수효는 백여 장에 달함으로 일일이 방명을 발표할 수는 업스나 멀니는 간도(間島·간도)에서도 다수한 축뎐이 왓는대 간도에서는 대종교회(大倧敎會·대종교회) 동흥중학(東興中學校·동흥중학교) 청구서뎜(靑邱書店·청구서점) 등 여덜 곳 축뎐이 잇섯더라.


仁川(인천) 訪問(방문)은 中止(중지)
풍세로 인쳔 비행을 중지한 안 군
관람셕을 일일이 순회하며 사례


바람과 치위 관계로 경성 인쳔 사이의 비행은 심히 위험하나 안창남 군은 임의 뎡한 계획이요, 수천 군중이 기다리는 터이라 엇지 그대로 고만둘 수가 인느냐고 떠나고자 하얏스나 여러 사람들은 안 군의 신상을 념려하야 굿이 만류한 결과 인천 가는 것은 부득이 중지하고 안 군은 즉시 자동차를 타고 장내를 일주하며 여러 학교 학생단에게 사례하는 뜻을 표하니 학생들은 오즉 깃붐에 못익이어 환호 소래가 요란하고 무수한 긔발이 편편히 날리더라.


五彩玲瓏(오채영롱)한 紙花(지화) 中(중)의 妙技(묘기)
만여 장의 오색 션젼지가 날니는 곳에
위태하고도 어려운 가지가지의 재조
第二次(제이차)의 高等(고등) 冒險飛行(모험비행)


만분 위험을 무릅쓰고 뎨일회 비행의 경성 방문을 마친 안창남 씨는 격납고에서 간단히 오찬을 지내인 후에 다시 용긔를 도도아서 오후 두시부터 뎨이회 비행을 하기로 착수하얏다. 본래 예뎡은 뎨이회에 경성 인천 련락 왕복비행을 하랴 하얏스나 텬후의 격변으로 인하야 유감이나마 이 계획은 중지하게 되얏슴으로 뎨삼회에 행할 예뎡이든 고등비행(高等飛行·고등비행)을 닥아서 하게 되얏다.

오후 두시 이십분 웅장한 『푸로펠라』의 소리, 비행장을 진동하는 만세 소리, 벽공을 찌르는 폭죽의 소리, 매운 바람을 온화케 하는 음악, 안 씨 성공을 비는 큰 교향악(交響樂·교향악) 중에 날내이고 경쾌하게 금강호(金剛號·금강호)는 비행장을 떠서 서남편 공중으로 차차 놉히 돌아서 약 팔백 미돌의 놉히를 보전하야 가지고 비행장의 주위를 돌고 또 돌며 한번 돌 때마다 고등비행의 교묘한 재조는 신묘하고 또 더욱 신묘하다.

처음에는 일반 시민의게 공중으로부터 인사를 하고 겸하야 과학의 발달에 힘쓰기를 바라는 의미를 긔록한 조희를 일만 장 가량이나 세 차례에 난호아 공중으로부터 뿌렷는대 오색 지질로 박인 조희는 청랑한 태양 빗테 비치여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업시 령롱 찬란하게 번적번적하며 바람에 펄펄 날리는 광경에는 관중은 진실로 비행장의 전톄가 떠나려갈 듯한 갈채가 이러낫다.

그 다음에는 참새 떼 가튼 오색 조희가 번득이는 속으로 올라갓다 나려갓다 하면서 엇더한 때에는 련겁후 세 번식 네 번식 비행긔를 가로 뒤집어 둘러 가장 위태한 횡전비행(橫轉飛行·횡전비행)도 하고, 엇더한 때에는 평탄한 바닥에 일등 선수가 땅 재조를 넘는 것보다도 용이하게 머리로부터 꼬리로 뒤집는 재조를 계속하야 갈채를 더욱 성대히 바닷고, 별안간 공중에서 비행긔를 걱구로 세여가지고 쏜살가치 떠러지다가 다시 소사 나가기도 하고 혹은 긔관의 운전을 일시 중지하고 자연의 바람만 리용하야 압흐로 나가는 등 온 비행장을 밋칠 듯하게 하얏고, 나종에는 륙백 미돌의 놉히로부터 삼십 미돌쯤 되는 나진 곳에 발동긔의 운전을 중지하고 쏜살가치 나려와 회장 안의 오만 관중으로 하야금 간담을 서늘케 한 후에 교묘히 륙디에 나리는 등 여러 가지 재조를 다하야 고등비행으로도 조선의 공중에서 처음 되는 긔록을 끼치고 두시 삼십오분에 다시 박수와 주악이 서로 응하는 중에 이날의 비행을 맞추엇더라.


空中(공중)에서 京城市民(경성시민)에게 깁흔 敬意(경의)와 謝意(사의)를 表(표)합니다

(안 군의 뿌린 선전서 원문)


汽車(기차)와 汽船(기선)이 發明(발명)됨으로 世界人類(세계인류)의 生活(생활)이 얼마나 變化(변화)가 되고 發達(발달)이 되엇슴니까.

飛行機(비행기)의 發明(발명), 航空術(항공술)의 發達(발달)은 이제 世界(세계) 모든 人類(인류)의 生活(생활)을 根本的(근본적)으로 變化(변화)케 하고 또 向上(향상)케 함니다.

이 文明(문명)의 進運(진운), 利器(이기)의 發達(발달)에 先覺(선각)하는 者(자)는 興(흥)하고 落伍(낙오)하는 者(자)는 亡(망)함니다. 朝鮮(조선) 사람도 이 世界的(세계적) 文明(문명) 回轉運動(회전운동)에 參加(참가)하야 우리의 生榮(생영)을 保持(보지)할 道理(도리)를 講究(강구)하여야 할 것이 아님니까.

發明(발명)과 創作(창작)에 獨特(독특)한 天才(천재)를 發揮(발휘)하야 人類史上(인류사상)에 大書特筆(대서특필)할 幾多(기다)의 記錄(기록)을 끼친 우리의 祖先(조선)은 飛行機(비행기)의 發明(발명)에 잇서서도 世界(세계)에 가장 압섯든 일은 文獻(문헌)이 昭證(소증)하는 바이라.

그러나 우리의 現在(현재)가 果然(과연) 엇더함니까. 凋殘(조잔)이 아니면 衰退(쇠퇴)가 잇슬 뿐이올시다. 이 엇지 先人(선인)에 對(대)한 罪過(죄과)가 아니며 世界(세계)에 對(대)한 羞恥(수치)가 아니오리까. 偉大(위대)한 祖先(조선)의 피는 우리의 血管(혈관)에 흐르나니 우리도 努力(노력)만 하면 徃時(왕시)의 榮光(영광)을 重輝(중휘)하야 人類(인류) 共同(공동)의 幸福(행복) 增進(증진)에 큰 貢獻(공헌)을 寄與(기여)할 수 잇슬 것이올시다.

우리는 이 뜻으로 故國訪問(고국방문)의 이번 飛行(비행)을 實行(실행)하는 同時(동시)에 朝鮮(조선)이 科學(과학)의 朝鮮(조선)이 되고, 아울러 多數(다수)한 飛行家(비행가)의 輩出(배출)과 航空術(항공술)의 迅速(신속)한 發達(발달)을 要望(요망)하야 마지아니함니다.

空中(공중)에서 京城市民(경성시민)에게 健康(건강)을 빌고 다시 今般(금반) 歡迎(환영)에 對(대)하야 깁흔 謝意(사의)를 表(표)함니다.

大正(대정) 十一年(십일년) 十二月(십이월) 十日(십일)
東亞日報社(동아일보사)
故國訪問(고국방문) 飛行(비행)
後援會(후원회)
安昌男(안창남)


冒險飛行(모험비행)을 終了(종료) 後(후)
안 군의 간곡한 인사가 잇고
셰시 이십분에 무사히 폐회


험악한 텬후는 동포의 뜨거운 정성으로 항거하고, 허술한 긔계는 안 씨의 능난한 기술로 어거하야 도뎌히 성공하기 어려운 두 차례의 모험비행을 다행히 대 성공으로 마친 후에 안창남 씨는 다시 만장의 환호성 중에 싸여서 비행긔를 나린 후에 승전고 압헤 천리마 가튼 금강호는 주악성 중에 서서히 격납고(格納庫·격납고)로 들어왓다.

안 씨는 비행복을 입은 대로 격납고 압헤 모혀든 수만 명의 관중에 향하야 경성에 도착하든 날 여러분이 남대문 역에서 성대한 환영을 주심은 무상한 영광이나 당일에 일일히 인사를 엿줍지 못하얏슴은 지금까지 불안히 생각하오며 금일에는 텬후가 불순함을 불계하고 위험한 중에 두 번의 비행을 무사히 마치게 되얏슴은 치운 일긔, 모진 바람에 이 가치 여러분이 다수히 오서서 열성으로 원조하야주신 덕택이라고 깁히 감사한 뜻을 표함니다. 그러나 오늘 일긔의 관계로 금일에 예뎡하얏든 경성 인천 사이의 왕복비행을 중지하게 되얏슴은 큰 유감으로 공연히 기다리시게 한 인천부민 여러분께 대하야는 무엇이라고 미안한 마음을 형상할 수 업슴니다. 그러나 타일에 반드시 여러분의 긔대를 밧드러 응할 때가 잇슬 것을 밋슴니다

하는 의미의 인사를 베풀고 관중으로부터 다시 이러나는 안창남 군 만세, 동아일보 만세의 텬디를 진동하는 환호성 중에 오후 세시 이십분에 비행대회를 마치고 십오리 길에 널녀 잇는 사람의 갈채 중에 안창남 군은 즉시 자동차로 려관에 도라오고 사람의 행렬은 날이 어둡기까지 한강 통의 대로를 가득히 덥헛더라.


苦侍(고대)하든 市民(시민)의 歡呼(환호)
시가의 우에 안 군이 방문할 때
만세와 박수로써 환호한 시민


여의도 비행장의 성황은 별항 보도와 갓거니와 작일의 경성 시중은 엇더하얏는가. 수만 명의 군중이 여의도로 몰려나가고 시중은 거의 뷔인 듯하얏스나 오히려 사정이 잇서 비행장에 나아가지 못한 시민은 여의도에서 뜬 비행긔가 언제나 시중을 방문하는가 하야 길에 걸어가는 사람이나 집에 잇는 사람이나 볼 일을 잠착하야 보지 못하고 모다 하늘만 치어다보며 이제나 뜰가 저제나 뜰가 하야 고대하며, 한편으로는 바람이 심하닛가 뜨지 못하는가 하야 매우 궁금할 지음에 멀니 『푸로펠라』 소리가 은은히 들니며 하오 령시 삼십분경에 안 군의 비행긔는 시가의 중앙에 와서 시민을 향하야 경의를 표함을 본 시민들은 혹은 박수, 혹은 만세로 그 신묘한 재조에 감탄하는 뜻을 표하얏더라.


必死(필사)의 危(위)를 冐(모)하고
재조껏 정성껏 비행을 햇다는
安昌男(안창남) 君(군)의 感想(감상)


본래 금일의 비행가가 십일의 풍세 만한 일긔를 그닥지 끄릴 것은 아니나 때가 마침 엄동일 뿐 아니라 경성에는 세 편에 산악이 잇서 평시라도 비행하기가 극히 곤난한 중에 십일의 풍력에는 일초에 십이 미돌이라는 강력이오, 더욱이 비행긔가 극히 적고 허술한 이외에 비행긔의 긔관은 따뜻한 나라에서 사용하게 만든 것이오, 조선의 겨을과 가치 치운 곳에서 비행할 만콤 긔계 축에 너흔 기름이 얼지 안토록 방비한 것이 업슴으로 대톄로 말하면 비행을 못할 것이올시다.

그러나 고국 동포의 긔대가 실로 간곡하야 이 가치 험악한 텬후에 교통이 불편한 원로임을 불고하고 로인 소아까지 수만 명이나 모히신 일을 생각하면 약간의 위험을 돌아볼 때가 아님으로 드듸여 모험을 하기로 결단하얏는데, 공중에 놉히 올나갈수록 한긔가 더욱더욱 심하더니 남산을 넘어서 경성 시중에 드러와서는 긔계 전면의 『푸로폐라』를 둘리는 박휘 츅에 너흔 기름이 얼어서 『까소린』의 발동긔는 아모리 얼지 안터라도 『푸로폐라』 박휘의 돌아가는 수효가 매우 주러서 비행긔는 몸을 지탱할 힘을 일케 되고 북악산 인왕산에서 나리 밀리는 모진 바람은 비행긔를 나무닙 흔들 듯 하야서 창덕궁에 경의를 표하고 동대문 방면으로 향하며 몃 장의 『인사말슴』 박인 조희를 던질 때에는 비행긔가 거의 떨어지는가 하얏슴니다.

그 다음 둘재 번의 비행에도 일긔가 조금이라도 온화하면 긔어코 인쳔을 가보랴 하얏스나 한긔는 여전히 『푸로폐라』의 기름을 얼게 하야서 비상한 유감이나 할 일 업시 뜻을 일우지 못하얏스며, 그 때에 행한 여러 가지 고등비행으로 말하면 본래 천 미돌 이상의 공중에서 하는 법인데 이것은 혹시 실수를 하야서 떠러지더라도 원톄 놉흔 공중이면 떨어지는 동안에 중간에서 다시 바로잡는 수가 잇지마는 야튼 곳은 미처 것잡을 사이가 업시 따에 떨어지는 까닭이라 그러치마는 놉히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치위가 점점 심하야저서 비행을 계속할 수가 업슴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팔구백 미돌밧게 아니 되는 곳에서 고등비행의 재조를 부린 것이올시다.

이 가치 두 번 비행의 성적으로 보면 여러분끠 충분히 만족을 드리지 못한 일이 매우 미안하며 다만 이 사람으로 말하면 당일의 텬후가 비행긔의 능력이 허락하는 데까지는 정성을 다한 줄로 생각함니다.


劉(유) 醫師(의사)의 救護(구호)와
조선극장 악대 출장


이 성대한 비행을 위하야 조선극장(朝鮮劇場·조선극장)에서는 악대를 파송하야 주악을 하고 의사 류홍종(劉洪鍾·유홍종) 씨는 수 명의 간호부와 함께 구호반을 조직하야 장내에 부상하는 사람이 잇스면 구호하여 각각 정성을 다하엿더라.


謝告(사고)

昨(작) 十日(십일) 鷺梁津(노량진) 汝矣島(여의도)에서 擧行(거행)한 安昌南(안창남) 君(군) 故國訪問(고국방문) 第一會(제일회) 大(대) 飛行(비행) 中(중) 風勢(풍세)와 氣流(기류), 其他(기타) 發動機(발동기)의 關係(관계)로 不得已(부득이) 仁川(인천) 往復(왕복) 飛行(비행)을 中止(중지)케 됨은 비록 不可抗力(불가항력)의 事(사)이나 甚(심)히 遺憾(유감)으로 思(사)하는 바이며, 尤(우)히 長時間(장시간) 熱誠(열성)으로 安(안) 君(군)의 來訪(내방)을 苦待(고대)하시든 仁川市民(인천시민) 諸位(제위)끠 極(극)히 未安(미안)하오며 且(차) 當日(당일) 烈風(열풍) 酷寒(혹한)임을 不拘(불구)하고 汝矣島(여의도) 飛行場(비행장)에 多數(다수)히 參觀(참관)하신 盛意(성의)는 感荷(감하)를 不勝(불승)이오나 凡百(범백) 設備(설비)가 充分(충분)치 못하야 禮(예)를 失(실)한 바 만사옵기 略儀(약의)이오나 玆(자)에 紙上(지상)으로 謝意(사의)를 謹表(근표)함.

東亞日報社(동아일보사)
安昌南(안창남) 君(군) 故國訪問(고국방문) 飛行(비행) 後援會(후원회)


謝告(사고)

十日(십일) 安昌南(안창남) 君(군) 故國訪問(고국방문) 大(대) 飛行(비행) 中(중) 天候(천후)와 發動機(발동기)의 關係(관계)로 仁川(인천) 訪問飛行(방문비행)을 不得已(부득이) 中止(중지)케 됨은 비록 不可抗力(불가항력)의 事(사)라 하나 苦待(고대)하시든 市民(시민) 諸位(제위)끠 未安(미안)을 不勝(불승)하옵기 略儀(약의)이오나 紙上(지상)으로 謝意(사의)를 謹表(근표)함.

東亞日報(동아일보) 仁川支局(인천지국) 白(백)

반도의 하늘에 최초의 환희
혹한을 정복한 동포의 열성

안창남 군 고국방문 비행의 날
5만 관중···경성 공전의 대성황
고대하던 한양에 죽기를 무릅쓰고 방문 비행
5만 관중을 열광하게 한 안창남 씨의 고등 비행



기다리던 날이 왔다. 조선의 비행가가 노선의 하늘에서 처음으로 나는 날이 왔다. 여의도 넓디넓은 마당은 1만여 명의 학생과 수만의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침부터 바람이 몹시 불어 공중은 고사하고 평지에서도 넓은 벌판에서 몰아닥친 찬바람이 얼굴을 때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정도여서 여러 사람들은 안창남 군을 만류해 바람이 어지간히 자기를 기다렸으나, 바람은 쉽게 그치지 않고 수만 군중은 찬바람을 쐬며 기다렸다.

12시가 되자 안창남 군은 “이와 같이 추운 날 수만 군중을 바람 때문에 기다리게 하는 건 심히 죄송스러운 일”이라고 말하며 같이 온 일행의 만류도 듣지 않고 격납고에서 비행기를 끌어내니 벌써부터 군중 사이에서는 환호가 새어나온다. 그러나 날이 너무 춥기 때문에 기계 운전에 사용하는 ‘카스톨’이란 기름이 어는 바람에 프로펠러가 돌지 않아 기사 고교 외 여러 사람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힘을 쓴 결과 0시 20분경부터 기계가 돌기 시작해 씩씩한 프로펠러 소리를 내며 서서히 뜨기 시작했다. 0시 25분경 노랗고 푸른 점이 섞여 박히고 양쪽으로 거룩한 조선 지도를 그린 금강호는 맑고 맑은 공중으로 웅장하게 날아오르니 수만 군중의 환호성은 여의도 넓은 마당이 떠나갈 듯하고, 1만여 학생이 들고 서있는 환영 깃발은 봄 동산에 나비가 날 듯 기쁜 기운이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안 군이 차차 높이 날아 1000m 이상 고도로 뜨니 한없이 맑은 하늘에 장쾌한 소리만 은은하게 들리고 비행기는 아물아물하게 떠서 한강을 지나 남산 가를 따라 동대문 쪽으로 돌아 창덕궁에 예를 표하고 경성을 한번 돈 뒤 공중에서 가을에 떨어지는 나뭇잎 같이 세로로 핑핑 돌아 안 군의 독특한 재주를 보이니 관중은 꿈인 듯 취한 듯 박수갈채가 천지를 진동했다.

이어 비행기가 거꾸로 내리박히다 다시 두어 번 가로로 재주를 넘으니 관중은 그 신묘한 재주에 너무 감격해 어쩔 줄 모르고 환호했다. 비행기는 다시 가던 길을 고쳐 동쪽에서 서쪽으로 손에 잡힐 듯 얕게 떠서 부인석 있는 쪽으로 내리 닥치니 일반 관중들은 비행기에 차이지는 않을까 의심할 만한 정도였다.

비행기가 일반 내빈과 부인석의 머리를 스치며 남쪽에 서있는 학생 등의 머리 위를 가볍게 지나 0시 40분에 15분간의 비행을 마치고 서서히 내리니 학생들의 환영 깃발이 수없이 번득이며 갈채가 성대했다.


5만 관중의 환호
여의도 벌판에 모인 군중
조선에서 처음 보는 대성황


안 군의 고국방문 비행을 손꼽아 고대하던 30만 경성부 인민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그 장쾌하고 의미 있는 비행을 구경하기 위해 혹은 전차로, 혹은 기차로, 혹은 자동차로, 혹은 걸어서 여의도 넓은 벌판으로 향했는데 오전 10시가 지나고 11시가 되자 4면에서 구름 같이 모여드는 관중은 그 수효가 무려 5만 명에 달해 아득히 넓은 여의도 벌판은 사람으로 성을 쌓고, 사람으로 바다를 이루게 됐다.

총독부에서는 사이토 총독을 위시해 여러 관리가 출석했으며, 경성부 관청에서도 다수가 구경을 왔으며 기타 경성의 각 신문기자와 통신기자는 물론 각 은행과 회사에서도 많은 내빈이 있어서 경성 내 단체로는 별로 빠진 곳이 없었다. 또 학교 측으로는 휘문고보, 중앙고보, 협성고보, 보성고보, 동덕여학교를 위시해 인천에서 온 박문학교와 동대문 밖에서 온 숭정학교, 또 고양에서 온 삼산학교, 기타 남녀 소학교를 합해 학생만 해도 그 수가 무려 1만 명에 달했다. 또 그밖에 개인으로, 혹은 청년회에서 수많은 사람이 들어와 조선에서 일찍이 보지 못했던 대성황을 이뤘다.

이로 인해 현장은 매우 복잡했는데 용산경찰서에서 출장 나온 많은 경관과 보이스카우트, 기타 위원들이 힘을 다해 질서유지에 노력했다. 시간이 차차 가까워오자 일반 군중들은 얼굴에 긴장한 빛을 띠고 호주머니에서 연방 시계를 꺼내 보며 비행기 프로펠러 소리가 1분이라도 빨리 들리기를 간절히 고대했다.


주악과 폭죽으로 개회
비행하기 전 간단한 의식


오전 10시 반이 지나고 11시가 되어 안 군을 태운 자동차가 여의도에 도착하니 일반 군중은 매우 긴장한 태도를 보였다.

즉시 비행을 시작하게 돼 군중은 그의 성공을 정성껏 축원했으며, 동아일보 본사에서는 송진우 사장이 “이번 비행으로 말하면 조선 민족의 광영인 동시에 안 군의 큰 성공이며, 따라서 오늘 일기가 추운 데도 불구하고 이처럼 여러분이 많이 찾아와주신 것에 대단히 감사하는 바입니다”는 의미의 인사가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안 군의 “매우 감사합니다”하는 간단한 답사가 있었으며, 또 사이토 총독의 발언도 있었다.

다시 그 뒤를 이어 본사를 위시해 동명사, 조선신문사, 국수회, 후원회, 광영동우회에서 사람의 눈이 부실 듯 광채가 나는 화환 한 개씩을 주었으며, 다음으로는 용산 군사령부에서 보낸 기념품 증정이 있은 후 안 군은 만족과 기쁨을 느끼며 비행장으로 향했는데, 경성악대에서는 웅장한 주악을 하고 한편에서는 폭죽을 터뜨렸고, 이에 따라 군중은 손이 깨져라 하고 손뼉을 쳤는데, 이 모든 소리는 한 데 모여 안 군의 기운을 돋우었으며 그와 동시에 이 소리는 여의도 전부가 떠나갈 듯 요란했다.


여의도에, 노량진에
10채의 객차를 연결한 임시 차
어제 아침 남대문 역은 일대 복잡


어제 아침 남대문 역은 어땠는가. 제1차 임시열차를 운전하려는 9시 30분이 시시각각 가까워지자 날뛰는 학생들과 밀리는 군중이 일장의 대 복잡을 이뤘다. 학생들을 정돈하는 선생의 호각소리, 동무를 부르는 어린 생도들이 휘두르는 깃발, 단체를 지휘하는 인도자의 외치는 소리가 실로 물 끓듯 했다.

구내, 대합실 할 것 없이 잔뜩 들어찬 군중은 가만히 서있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안 군의 신묘한 재주를 맨 먼저 보려고 너도나도 제일 첫 차를 놓치지 않으려는 군중은 차표 사기에, 동무 찾기에 이리 달리고 저리 달리는 모양이 오직 마음속에 안 군만 있고, 여의도만 있는 듯했다.

예정한 시각이 되자 전부 객차 10채를 연결한 긴 뱀 같은 임시열차는 수천 군중을 싫고 긴 고동을 울리며 노량진을 향해 출발했다. 이만 하면 환해지리라 생각했던 남대문 역 넓은 마당에는 여전히 사람의 물결이 남아 있다. 한 줄로 이은 것 같은 용산 행 전차는 모조리 만원이요, 넓은 길엔 걸어가는 사람이 뒤를 이어 연결이 끊이지 않았는데도 정거장에는 갈수록 사람들이 밀렸다.

첫 차를 놓친 군중은 다소 실망한 빛을 띠었지만 싸늘한 아침 바람에 붉어진 얼굴엔 그래도 희망의 새로운 빛과 민족적으로 뜻 있는 사업을 기리는 기쁨의 빛이 넘쳤다. 10시 15분 인천 행 열차가 군중 일부를 태워 떠난 뒤를 이어 10시 30분에 제2차 임시열차가 또다시 조급한 마음에 날뛰는 1000여 명의 군중을 실어 공중의 주인 우리 안 군이 어루만질 여의도 하늘을 향해 급한 바퀴를 굴렸다.


전차로만 근 1만 명
나도 가자 너도 가자
여의도에, 여의도에


10일 경성시가는 전부 비행기 구경꾼으로 덮였으며, 더욱 전차는 아침 7시부터 동대문에서는 뒤를 이어 신용산 행 전차가 떠나고 전차마다 남녀노소가 가득했다. 더욱이 학생들은 어느 정차든 승객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특히 중동학교 생도 1500명은 긴 행렬을 지어 걸어서 비행장까지 가는데 그 행렬의 길이가 300여 칸을 늘어서서 광경이 굉장했다. 각 신문사와 잡지사는 자동차 위에 선명한 깃발을 아침 햇빛에 날리며 뒤를 이어 나가고 혹 꽃도 싣고 혹 화려하게 장식한 자동차가 사이사이 끼어 길 가는 사람의 눈을 황홀하게 했다.

오전 12시까지만 나간 전차가 150여 대로, 근 6000명의 사람을 운송하고 오후에도 수천 명을 실어 날랐으며 그 외에 걸어간 사람은 몇 천 명이나 되는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전차 종점부터 비행장까지 사람이 뒤를 이어 실로 전에 없던 장관을 이뤘다.


축전 답지
간도에서까지
100여 장의 축하전보


10일 안창남 군 고국방문 제1회 비행에 대해 각 지방 청년단체와 본사 지국, 기타 유지로부터 축하전보가 답지했는데 그 수효는 100여 장에 달해 일일이 방명을 발표할 수는 없지만 멀리는 간도에서도 많은 축전이 왔다. 간도에서는 대종교회, 동흥중학, 청구서점 등 8곳의 축전이 있었다.


인천 방문은 중지
세찬 바람으로 인천 비행을 중지한 안 군
관람석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사례


바람과 추위로 경성~인천 사이의 비행은 매우 위험했지만 안창남 군은 이미 정한 계획이요, 수천 군중이 기다리는 터라 어찌 그대로 그만둘 수 있느냐며 떠나려 했지만 여러 사람은 안 군의 신상을 염려해 굳이 만류한 결과 인천 가는 것은 부득이 중지하고 안 군은 즉시 자동차를 타고 장내를 일주하며 여러 학교 학생단에 사례하는 뜻을 표하니 학생들은 기쁨에 못 이겨 환호 소리가 요란하고 무수한 깃발이 가볍게 날렸다.


오색영롱한 종이꽃 속의 묘기
1만여 장의 오색 선전지가 날린 곳에
위태롭고도 어려운 가지가지의 재주
제2차의 고등 모험비행


갖은 위험을 무릅쓰고 제1회 경성 방문비행을 마친 안창남 씨는 격납고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은 뒤 다시 용기를 내 오후 2시부터 제2회 비행에 착수했다. 본래 예정은 제2회에는 경성~인천을 잇는 왕복비행을 하려 했으나 날씨의 격변으로 유감이지만 이 계획은 중지하게 됐으므로 제3회에 할 예정이던 고등비행을 당겨 하게 됐다.

오후 2시 20분 웅장한 프로펠러 소리, 비행장을 진동하는 만세 소리, 푸른 하늘을 찌르는 폭죽 소리, 매운바람을 온화하게 하는 음악, 안 씨의 성공을 바라는 큰 교향악이 울리는 가운데 금강호는 날래고 경쾌하게 비행장을 날아올라 서남쪽 공중으로 차차 높이 돌아서 약 800m의 높이를 유지한 채 비행장 주위를 돌고 또 돌며 한번 돌 때마다 고등비행의 교묘한 재주는 신묘하고 또 더욱 신묘했다.

처음엔 일반 시민에게 공중에서 인사하고 이와 함께 과학의 발달에 힘쓰기를 바라는 의미를 적은 종이를 1만 장 가량 세 차례로 나눠 공중으로부터 뿌렸는데, 5색 종이는 청량한 태양 빛에 비추어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이 영롱 찬란하게 번쩍번쩍하며 바람에 펄펄 날리는 광경에 관중석에서는 비행장 전체가 떠내려갈 듯한 갈채가 일어났다.

다음으로 참새 떼 같은 5색 종이가 번뜩이는 속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어떤 때는 연거푸 세 번, 네 번씩 비행기를 가로로 뒤집어 돌려 위태로운 옆 회전 비행도 하고, 어떤 때에는 평탄한 바닥에 1등 선수가 땅재주 넘는 것보다 쉽게 머리부터 꼬리로 뒤집는 재주를 계속 보여 더욱 성대한 갈채를 받았다. 별안간 공중에서 비행기를 거꾸로 세워 쏜살같이 떨어지다 다시 솟아오르기도 하고 혹은 기관의 운전을 일시 중지하고 자연 바람만 이용해 앞으로 나가는 등의 묘기로 온 비행장을 미칠 듯하게 했다. 나중에는 600m 높이에서 30m쯤 되는 낮은 곳에 발동기의 운전을 멈추고 쏜살같이 내려와 회장 안의 5만 관중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뒤 교묘하게 육지에 내리는 등 여러 가지 재주를 다해 고등비행으로도 조선의 공중에서 첫 기록을 남기고 2시 35분에 다시 박수와 주악이 서로 응하는 가운데 이날 비행을 마쳤다.


공중에서 경성 시민에게 깊은 경의와 사의를 표합니다
(안 군이 뿌린 선전서 원문)


기차와 기선이 발명된 덕택에 세계 인류의 생활이 얼마나 변화하고 발달됐습니까.

비행기의 발명, 항공술의 발달은 이제 세계 모든 인류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하고, 또 향상하게 합니다.

이 문명의 진보하는 기운, 이기의 발달에 먼저 깨달은 자는 흥하고 낙오하는 자는 망합니다. 조선 사람도 이 세계적 문명의 회전운동에 참가해 우리가 누리는 삶을 간직할 도리를 강구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발명과 창작에 독특한 선천적 재능을 발휘해 인류사에 대서특필할 수많은 기록을 남긴 우리의 선조는 비행기의 발명에 있어서도 세계에서 가장 앞섰던 일은 문헌이 밝게 증명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재는 과연 어떠합니까. 시들어 떨어지거나 쇠퇴가 있을 뿐입니다. 이 어찌 선인에 대한 허물이 아니며 세계에 대한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위대한 선조의 피가 우리 혈관에 흐르니 우리도 노력만 하면 과거의 영광을 다시 빛내 인류 공동의 행복 증진에 큰 공헌을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뜻으로 고국방문의 이번 비행을 실행하는 동시에 조선이 과학의 조선이 되고, 아울러 많은 비행가의 배출과 항공술의 신속한 발달을 바라 마지않습니다.

공중에서 경성 시민의 건강을 빌고 다시 이번 환영을 보내주신 데 대해 깊은 사의를 표합니다.

1922년 12월 10일
동아일보사 고국방문 비행 후원회
안창남


모험비행을 마친 뒤
안 군의 간곡한 인사가 있고
3시 20분에 무사히 폐회


험악한 일기는 동포의 뜨거운 정성으로 이겨내고, 허술한 기계는 안 씨의 능란한 기술로 바른 길로 나아가게 해 도저히 성공하기 어려운 두 차례의 모험비행을 다행히 대 성공으로 마친 뒤 안창남 씨가 다시 만장의 환호성에 싸여 비행기를 내린 후 승전고 앞에 선 천리마 같은 금강호는 주악이 울리는 가운데 서서히 격납고로 들어왔다.

안 씨는 비행복을 입은 채 격납고 앞에 모여든 수만 관중을 향해 “경성에 도착하던 날 여러분이 남대문 역에서 성대한 환영을 해주신 것은 견줄 데 없는 영광이지만 당일 일일이 인사를 여쭙지 못한 것은 지금까지 편치 않게 생각합니다. 오늘 일기가 불순함에도 위험한 가운데 두 번의 비행을 무사히 마치게 된 것은 추운 날씨, 모진 바람에도 이 같이 여러분이 많이 오셔서 열성으로 응원해주신 덕택입니다.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그러나 오늘 일기 관계로 예정했던 경성~인천 간 왕복비행을 중지하게 된 것은 큰 유감으로, 공연히 기다리시게 한 인천부민 여러분께는 무엇이라고 미안한 마음을 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날 반드시 여러분의 기대를 받들어 응할 때가 있을 것을 믿습니다”하는 뜻의 인사를 했다.

관중에서 다시 일어나는 “안창남 군 만세, 동아일보 만세”하는 천지를 진동하는 환호성 가운데 오후 3시 20분에 비행대회를 마치고 약 6㎞에 널린 사람들의 갈채 속에 안창남 군은 즉시 자동차로 여관에 돌아오고, 사람의 행렬은 날이 어두워지기까지 한강 통 대로를 가득 덮었다.


고대하던 시민의 환호
시가 위에 안 군이 방문할 때
만세와 박수로 환호한 시민


여의도 비행장의 성황은 관련 보도와 같거니와 어제 경성 시중은 어땠는가. 수만 명 군중이 여의도로 몰려 나가고 시중은 거의 빈 듯했지만 오히려 사정 때문에 비행장에 가지 못한 시민들은 여의도에서 뜬 비행기가 언제나 시중을 방문하나 해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나 집에 있는 사람이나 정신을 쏟아 볼 일을 보지 못하고 모두 하늘만 쳐다보며 이제나 뜰까 저제나 뜰까 고대했다.

한편으로는 바람이 심해서 뜨지 못하나 하고 매우 궁금하게 여길 즈음 멀리서 프로펠러 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며 오후 0시 30분경 안 군의 비행기가 시가 중앙에 와서 시민을 향해 경의를 표하는 모습을 본 시민들은 혹은 박수, 혹은 만세로 그 신묘한 재주에 감탄하는 뜻을 표했다.


필사의 위기를 무릅쓰고
재주껏, 정성껏 비행했다는
안창남 군의 감상


본래 오늘의 비행가가 10일의 세찬 바람 부는 일기를 그다지 꺼릴 것은 아니지만, 때가 마침 엄동설한일 뿐 아니라 경성에는 3면에 산악이 있어서 평시에도 비행하기가 극히 곤란한 가운데 10일은 초속 12m라는 강력한 바람이 불었고, 더욱이 비행기가 매우 작고 허술한 외에 비행기 기관은 따뜻한 나라에서 사용하게 만든 것이요, 조선의 겨울 같이 추운 곳에서 비행할 만큼 기계 축에 넣은 기름이 얼지 않도록 대비한 것이 없으므로 대체로 말하면 비행을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고국 동포의 기대가 실로 간곡해 이 같이 험악한 일기에 교통이 불편한 먼 길에도 불구하고 노인, 어린이까지 수만 명이나 모이신 일을 생각하면 약간의 위험을 돌아볼 때가 아니므로 드디어 모험을 하기로 결단했습니다. 공중에 높이 올라갈수록 한기가 더더욱 심하더니 남산을 넘어 경성 시중에 들어와서는 기계 전면의 프로펠러를 돌리는 바퀴 축에 넣은 기름이 얼어서 가솔린 발동기는 아무리 얼지 않더라도 프로펠러 바퀴의 회전수가 매우 줄어서 비행기는 몸을 지탱할 힘을 잃게 되고, 북악산 인왕산에서 내리 밀리는 모진 바람은 비행기를 나뭇잎 흔들 듯해서 창덕궁에 경의를 표하고 동대문 쪽으로 향하며 몇 장의 ‘인사말씀’을 적은 종이를 던질 때에는 비행기가 거의 떨어질 뻔했습니다.

다음 두 번째 비행에도 일기가 조금이라도 온화해지면 기어코 인천을 가보려 했지만 한기는 여전히 프로펠러 기름을 얼게 해서 매우 유감이지만 할 수 없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 때에 행한 여러 가지 고등비행으로 말하면 본래 1000m 이상의 공중에서 하는 법인데, 이것은 혹시 실수를 해 떨어지더라도 원체 높은 공중이면 떨어지는 동안 중간에서 다시 바로잡는 수가 있지만 얕은 곳은 미처 걷잡을 새 없이 땅에 떨어지는 까닭이라 그렇지만,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추위가 점점 심해져 비행을 계속할 수 없으므로 위험을 무릅쓰고 800, 900m밖에 안 되는 곳에서 고등비행의 재주를 부린 것입니다.

이 같이 두 번 비행의 성적으로 보면 여러분께 충분히 만족을 드리지 못한 일이 매우 미안하며, 다만 이 사람으로 말하면 당일의 일기가 비행기 능력이 허락하는 데까지는 정성을 다한 것으로 자부합니다.


유 의사의 구호와
조선극장 악대 출장


이 성대한 비행을 위해 조선극장에서는 악대를 보내 주악을 하고 의사 유홍종 씨는 수 명의 간호사와 함께 구호반을 조직해 장내의 부상자가 있으면 구호해 각각 정성을 다했다.


사고(謝告)

어제 10일 노량진 여의도에서 거행한 안창남 군 고국방문 제1회 대 비행 중 거센 바람과 기류, 기타 엔진 관계로 부득이 인천 왕복비행을 중지하게 됨은 비록 불가항력의 일이지만 심히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며, 더욱 장시간 열성으로 안 군의 내방을 고대하시던 인천시민 제위께 극히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또 당일 맹렬한 바람과 혹한에도 여의도 비행장에 다수 참관하신 성의는 은혜를 이길 수 없으나 온갖 설비가 충분치 못해 예의를 잃은바 많아 간략한 예의이지만 이에 신문지상으로 삼가 사의를 표함.

동아일보사
안창남 군 고국방문 비행 후원회


사고(謝告)

10일 안창남 군 고국방문 대 비행 중 기상상태와 엔진 관계로 인천 방문비행을 부득이 중지하게 됨은 비록 불가항력의 일이라 하나 고대하시던 시민 제위께 미안을 금할 수 없기로 비록 약소한 예의나마 신문지상으로 삼가 사의를 표함.

동아일보 인천지국 아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