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5월 9일

‘63세 러시아 항일투사 최재형’ 일제는 재판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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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 경원의 소작농 아들로 태어나 아홉 살 때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마을 지신허(地新墟)에 정착했던 소년이 있었습니다. 배고픔과 학대를 못 이겨 2년 뒤 무작정 가출하지만 탈진해 쓰러지고 맙니다. 다행히 큰 상선의 선원들에게 발견된 소년은 선장 부부의 도움으로 6년간 배를 타며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합니다. 러시아어를 배우고, 다양한 지식을 쌓고, 세상도 두루 경험했죠. 상사(商社)에 들어가 얼마간 돈을 모은 그는 이후 군납사업으로 큰 부자가 됩니다.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고, 자치단체장 격인 노야(老爺), 도노야(都老爺)에 선출되고, 여러 차례 러시아 훈장도 받았습니다.

러시아 우수리스크 최재형 기념관에 조성된 최재형의 동상.
하지만 ‘뿌리’는 잊지 않았습니다. 이주 한인들이 대거 동원된 공사현장의 통역을 맡아 이들의 고충을 대변했고, 수많은 학교를 세우고 장학생을 선발해 한인 자녀 교육에 앞장섰습니다. 그에겐 선장 부부가 지어준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라는 러시아 이름이 있었지만 한인들은 그를 ‘최 페치카’라 불렀답니다. 페치카는 표트르의 애칭이기도 하지만 그가 따뜻한 벽난로 같은 존재라는 뜻을 담은 겁니다.

최 페치카는 한인사회를 돌보는 데 머물지 않고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합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된 뒤 러시아로 모여든 군인들을 모아 무력전을 벌이고,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돕고, 동의회(同義會) 권업회(勸業會) 같은 항일단체를 조직해 활동했습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선임됐던 그에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습니다.

이쯤이면 짐작되시나요? 맞습니다. 연해주 한인 민족운동의 대부이자 독립운동가인 최재형 선생 얘깁니다. 이처럼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았던 최재형은 63세 때인 1920년 일제에 의해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 해 3월 러시아 적군(赤軍·볼셰비키 혁명군)이 일본 수비대를 공격하자 일본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4월 4일 블라디보스토크,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 등에 진주합니다. 이때 일본군은 러시아 적군에 우호적이었던 한인의 거주지까지 쳐들어가 무차별 살상하는 ‘4월 참변’을 일으킵니다. 그리고는 눈엣가시 같던 최재형 등 무력 항일투쟁의 지도자들을 재판도 하지 않고 총살하지요.

동아일보는 사건 발생 약 한 달 뒤인 5월 8일자로 이 비극을 국내에 전한 데 이어 다음날 해설기사를 통해 최재형의 삶을 상세하게 보도했습니다. 당시 일본 육군성은 이 사건을 발표하면서 ‘과격 문서를 배포’, ‘일본군에 고용된 조선 사람을 살해’, ‘치안을 어지럽히고···’와 같은 표현으로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을 폭도로 매도하고 최재형 등을 ‘그들의 두목’이라 칭해 4월 참변을 정당화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5월 9일자 ‘최재형은 어떤 사람인가?’ 기사에서 그를 ‘인격이 훌륭해 만인의 신망을 받았다’, ‘한 푼이라도 생기면 공익에 쓰고 다른 사람을 사랑해···’ 등으로 묘사해 일제의 발표가 거짓임을 드러냈습니다.

최재형과 함께 흉탄을 맞은 분들로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선생도 있습니다. 연해주 한인민단 단장을 지낸 김이직, 엄주필은 각각 1977년과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 황경섭은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습니다. 동아일보는 이분들도 간략하게 소개했는데, 황경섭에 대해선 정보가 부족했는지 ‘누구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고 돼있습니다. 1920년 6월 22일자 신한민보는 황경섭을 ‘□9세에 도강하여 상업을 경영, 한인계의 대 실업가가 됐다.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러시아인을 교제하는 능력이 있다’고 설명했고, 최재형의 딸 최올가의 회고록을 보면 황경섭은 최재형과 친구이자 사돈지간이었으니 이제라도 황경섭 역시 최재형과 비슷한 길을 걸었던 사업가이자 독립운동가였다는 주석을 달고 싶습니다.

정경준기자 news91@donga.com기사입력일 : 2021년 01월 22일
銃殺(총살) 事件(사건)의 內容(내용)

최재형 외 삼명 총살한 리유

=五月(오월) 五日(오일) 陸軍省(육군성) 發表(발표)=

사월 칠일 『니코리스크』 배일 조선인 총살 사건의 내용은 아래와 갓더라.


로령, 더욱히 신한촌 『니코리스크』 근처에 잇는 배일 조선인들은 로국의 정부가 변경된 후로 현저히 배일의 기세를 놉히여 멸치놋코 과격한 문서를 배포하야 자조 배일사상을 선뎐하며, 또는 일본 군사에게 고용하는 조선 사람을 살해하고 혹은 일본 사람과 친한 조선 사람을 박해하는 등 치안을 어지러이 하고 일본 군사를 모욕하는 태도가 날노 날노 느러갓섯는대 지난달 사일 밤에 일본 군사와 로국 군사의 두 나라 군사가 교젼 상태가 됨애 신한촌과 『니코리스크』에 배일 조선인들은 로군 군사에 참례하야 이러날 긔세를 보이고 더욱 『니코리스크』에서는 일본 군사에게 대하야 현저히 처드러오는 모양이 잇슴으로써 일본 군사는 헌병대와 기타 모든 부대로 하야금 신한촌과 『니코리스크』 두 디방에 잇는 배일 조션인의 검거와 무기를 압수하기를 착수한 지라.

그러나 검거된 조선인의 대부분은 순종하는 모양이 잇고 또 친일(親日·친일)하는 조선인 단톄에서 방송하야 달나는 청원도 잇슴으로써 그 대부분은 수일 후에 방송하고 『니코리스크』 방면에서 련속하야 톄포한 자가 칠십륙 명인대 근일까지 남겨두엇든 자는 엄주필(嚴周必·엄주필) 황경섭(黃景爕·황경섭) 김리박(金利朴·김이박) 최재형(崔在亨·최재형)의 네 사람인대, 이 네 사람은 배일 조선인단의 유력한 자로서 사월 사일, 오일의 사건에도 무기를 가지고 일본 군사에게 반항한 사실이 명료함으로써 이 사실을 조사하든 중 사월 칠일에 일본 헌병대 숙소를 리젼할 때에 압송하든 중 틈을 엿보아 도망하얏슴으로 다시 톄포하려 하나 그 사람들은 저항이 심하얏다 하야 총살하얏다더라.


崔在亨(최재형)은 如何(여하)한 人(인)?

그밧게 세 명은 누구인가

지난 사월 사일에 해삼위(海蔘威·해삼위)에서 로국 군대와 일본 군대가 교젼하게 된 이래로 신한촌(新韓村·신한촌)에 잇든 일본을 배척하는 조선 사람들은 형세가 위태함으로 『니코리스크』로 몸을 피하야 로서아 과격파와 련락을 하야가지고 일본군에게 반항하다가 륙십칠 명이 톄포되야 그 중에 원 상해가정부 재무춍장 최재형(崔在亨·최재형)외 삼 명은 일본군에게 춍살을 당하얏다 함은 작지에 임의 보도하얏거니와

최재형은 근년 륙십삼 세의 로인이오, 함북 경흥(咸北 慶興·함북 경흥) 태생이니 어려서부터 가세가 매우 곤궁하야 그가 열 살 되얏슬 때에 할 일 업시 그 부모를 따라 멀니 두만강(豆滿江·두만강)을 건너 로서아 디방으로 건너가게 되얏다. 그곳으로 건너간 뒤에도 몇 해 동안은 또한 로국인의 고용이 되야 그 주인에게 충실하게 뵈엇슴으로 열다섯 살 되든 해 봄에는 주인의 보조를 바다 소학교를 단이게 되얏고 재학 즁에도 교장의 사랑을 밧어서 졸업 후에는 로국 경무령 통역관이 되얏는대 원래 인격이 잇슴으로 만인이 신망하게 되야 이십오 세 때에는 수백 호를 거나리는 로야(老爺·노야)라는 벼슬을 하게 되얏고, 그는 다시 한 푼 돈이라도 생기기만 하면 공익에 쓰고 사람을 사랑함으로 일반 인민의 신망은 나날이 두터워저서 마츰내 도로야(都老爺·도노야)로 승차하게 되야 수십만 인의 인민 『로국인이 대부분』을 거나리게 되야 로국에 극동정치(極東政治·극동정치)에도 손을 내미러 적지 안이한 권리를 가지고 지냇다.

그리하야 그는 마츰내 로서아에 입적까지 하얏섯고 작년에 과격파의 손에 총살을 당한 『니코라스』 이세가 대관식『戴冠式·대관식』을 거행할 때에 수십 만의 로국 인민을 대표하야 『□트, 테추로그래드』에 가서 황뎨가 하사하시는 화려한 례복까지 바든 일이 잇섯스며, 리태왕 뎐하께서 울미(乙未·을미)년에 로국 령사관으로 파쳔하신 후 널니 로국 국정에 정통한 인재를 가리실 새 최 씨가 뽑히어서 하로 밧비 귀국하야 국사를 도으라시는 조측(詔勅·조칙)이 수삼차나 나리섯스나 무슨 생각이 잇섯던지 긋게 움즉이지 아니하얏스며, 이래로 그 디방에 잇서서 배일사상을 선뎐하고 작년에 상해가정부 재무총장까지 되얏섯는데 이번에 총살을 당한 것이오.

엄주필(嚴周必·엄주필)은 함경북도 사람으로 이제로부터 수십 년 전에 로서아로 건너간 사람인대 죽을 때까지 『니코리스크』 조선인 민단장(民團長·민단장)의 중직을 띄고 일반 인민의 신망이 매우 두터웟스니 금년이 사십오 세이요, 김리박(金利朴·김이박)은 혹 오젼인지 모르겟는대 만일 김리직(金理直·김이직)이고 보면 평양 태생으로 이제로부터 십삼 년 전에 로서아로 건너가 『니코리스크』에 머므러 수십 만 원의 재산을 가진 사람으로 독립운동에 만흔 원조를 한 사람이니 금년이 사십오 세요, 황경섭(黃景爕·황경섭)은 누구인지 자세히 모르겟다더라.
총살 사건의 내용

최재형 외 3명을 총살한 이유

- 5월 5일 육군성 발표


4월 7일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 배일 조선인 총살 사건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러시아령, 특히 신한촌이 있는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 근처의 배일 조선인들은 러시아 혁명으로 정부의 변혁이 일어난 후 현저히 일본을 배척하는 기세를 높여 과격 문서를 배포하며 배일사상을 자주 선전했다. 혹은 일본군에 고용된 조선 사람을 살해하고, 혹은 친일 조선인을 박해하는 등 치안을 어지럽히고 일본군을 모욕하는 태도가 날로 심해졌다.

지난달 4일 밤 일본과 러시아 두 나라 군사가 교전상태가 되자 신한촌과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의 배일 조선인들은 러시아군에 참여해 일어날 기세를 보이고, 특히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에서는 일본군을 침략하려는 조짐이 현저해 일본군은 헌병대, 기타 전 부대로 하여금 신한촌과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 두 지방에 있는 배일 조선인의 검거 및 무기 압수에 착수했다.

그러나 검거된 조선인 대부분은 순종하는 태도를 보였고, 또 친일 조선인 단체에서 이들을 놓아달라는 청원도 해서 며칠 후 대다수를 풀어주고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 방면에서 연속해 체포한 자들이 76명인데, 최근까지 붙잡아둔 자는 엄주필(嚴周必) 황경섭(黃景爕) 김리박(金利朴) 최재형(崔在亨) 4명이다.

이 4명은 배일 조선인 단체의 유력한 자로서, 4월 4~5일 사건 때도 무기를 들고 일본군에 반항한 사실이 명백해 이 사실을 조사하던 중 4월 7일 일본 헌병대 숙소를 옮길 때에 압송하던 중 틈을 엿보아 도주했으므로 다시 체포하려 했으나 심하게 저항해 끝내 총살했다.


최재형은 어떤 사람인가?

그밖에 3명은 누구인가?

지난 4월 4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 군대와 일본군이 교전하게 된 이래 신한촌에 있던 배일 조선인들은 형세가 위태로워지자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로 몸을 피해 러시아 과격파와 연락하며 일본군에 반항하다 67명이 체포됐고, 그 중 상해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 최재형 외 3명은 총살당했다는 내용은 어제 이미 보도한 바와 같다.

최재형은 올해 63세의 노인이요, 함북 경흥 태생이다. 어려서부터 가세가 매우 곤궁해 그가 10세 됐을 때 달리 도리가 없어 부모를 따라 멀리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지방으로 건너가게 됐다. 그곳으로 간 뒤 몇 해 동안 러시아 사람에게 고용돼 일했는데, 주인에게 충실하게 보여 15세 되던 해 봄에는 주인의 도움을 받아 소학교를 다니게 됐다. 재학 중에도 교장의 사랑을 받아 졸업 후 러시아 경무령 통역관이 됐다. 원래 인격이 훌륭해 만인의 신망을 받은 덕에 25세 때는 수백 가구를 거느리는 ‘노야’라는 벼슬을 하게 됐다. 그는 한 푼이라도 생기면 공익에 쓰고 다른 사람을 사랑해 그에 대한 일반 인민의 신망은 나날이 두터워졌다. 마침내 ‘도(都)노야’로 승진한 그는 수십 만 명의 러시아인 인민을 통솔하게 됐고, 러시아의 극동정치에도 손을 내밀어 적지 않은 권한을 갖게 됐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러시아에 적(籍)을 올리게 됐고, 지난해 과격파의 손에 총살당한 니콜라이 2세가 대관식을 거행할 때 수십 만 러시아 인민을 대표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서 황제가 하사하는 화려한 예복까지 받은 일이 있었다. 또 고종께서 러시아영사관으로 옮겨 거처하신 뒤 널리 러시아 국정에 정통한 인재를 고르실 때 최 씨가 뽑혀 ‘하루 바삐 귀국해 국사를 도우라’는 조칙이 여러 차례 받았으나 무슨 생각에서인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이후 그 지방에서 배일사상을 선전하고, 작년에는 상해임시정부 재무총장까지 됐는데, 이번에 총살을 당한 것이다.

엄주필은 함경북도 사람으로 수십 년 전 러시아로 건너갔는데, 죽을 때까지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 조선인 민단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일반 인민의 신망이 매우 두터웠으니 올해 45세다. 김이박은 –혹시 잘못 전해졌는지 모르겠는데 만일 ‘김이직’이라 하면- 평양 태생으로 지금부터 13년 전 러시아로 건너가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에 머물면서 수십 만 원의 재산을 가진 사람으로, 독립운동에 많은 원조를 한 사람이니 금년에 45세다. 황경섭은 누구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