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05월 06일

1920년 경성의 최초 서양음악회, 1300명 가슴 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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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보다 더 조선을 사랑했다는 평가를 받는 류겸자(위), 류종열 부부.

‘이 음악회는 도처에서 이야깃거리가 되었으며 경성의 유식계급, 그 중에서도 청년사회에서는 많은 호기심과 반가운 마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사건이었다.’ 소설가 겸 언론인이었던 우보 민태원이 1921년 ‘폐허’에 발표한 단편소설 ‘음악회’의 한 대목입니다. 일제의 억압과 질곡으로 피폐해진 삶에 음악회가 한줄기 빛 같은 역할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소설의 소재는 1920년 5월 4일 경성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지금의 YMCA 회관)에서 동아일보사 주최로 열린 ‘류겸자(야나기 가네코) 독창회’였습니다. 3대 사시(社是)의 하나로 ‘문화주의’를 천명한 동아일보의 첫 문화사업이었던 이 행사는 서구 문물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모던 뽀이, 모던 걸’들을 클래식의 세계로 이끈 국내 최초의 서양음악회이기도 했습니다.


동아일보는 음악회에 앞서 류겸자 여사를 ‘세계적 성악가 중 저명한 1인이요, 일본 여류 음악계의 최고 권위’라고 평가했습니다. 도쿄음악학교를 졸업한 이 앨토 성악가는 당시 28세에 불과했지만 이 같은 소개가 결코 과장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행사 하루 전 남대문역에 도착한 그를 환영하기 위해 조선 여성계를 대표해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이름을 날린 나혜석 같은 신여성들까지 마중 나왔으니까요.
1920년 5월 4일 동아일보사 주최로 열린 류겸자 독창회에서 류 여사가 공연장을 가득 메운 청중 앞에서 열창하고 있다.

5월 6일자에 실린 음악회 상보(詳報)에 따르면 독창회는 당초 오후 7시에 열릴 예정이었지만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종로 넓은 길을 덮고, 회관 정문이 터지도록 모여들어’ 1시간 늦게 시작됐습니다. 청중들은 적지 않은 입장료를 내야 했습니다. 1등석 2원, 2등석 1원 50전, 3등석 1원이었는데, 당시 동아일보 월 구독료가 60전이었으니 지금으로 하면 단순 계산으로 3등석도 3만3000원쯤 하는 셈이지요. 그런데도 대강당 1300여 석을 꽉 채운 것은 진귀한 클래식 음악회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에 수입 전액을 조선의 문화사업에 쓴다는 갸륵한 취지도 한 몫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1920년 5월 4일 독창회에서 동아일보사로부터 화환을 받은 이날의 주인공 류겸자 부인(오른쪽)과 피아노 반주 사카키바라 씨.

류겸자 여사는 피아니스트 사카키바라 씨의 반주에 맞춰 약 2시간 동안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 베버의 ‘마탄의 사수’ 등 10여 곡의 오페라와 가곡을 선사했습니다. 물론 피아노 독주와 10분의 휴식시간이 있긴 했지만 1시간 반 정도를 혼자 책임지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92세 되던 1983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청중은 주로 젊은이들이었는데, 자리가 없으면 창가에 매달려 들을 정도로 몰려 기쁘고 보람 있었다”고 회상했습니다.

5월 4일 행사 이후 17일까지 총 6번의 독창회를 마친 그는 이듬해 다시 조선을 방문해 6월 4일 경성 경운동 천도교중앙회당을 시작으로 개성, 평양, 진남포 등지에서 순회공연을 했습니다.남편 류종열(야나기 무네요시)이 “조선민족의 생명이 흐르는 조선 미술품을 조선 땅에 지키자”며 추진한 조선민족미술관 건립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겁니다. 경성 독창회를 주최한 동아일보는 6일자에 이를 보도하면서 ‘현오한 비곡(헤아릴 수 없이 깊은 곡조)에 감격한 청중’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남편은 강연으로, 아내는 독창회로 기금 모금에 나선 끝에 조선민족미술관은 마침내 1924년 4월 경복궁 내 집경당에 개관합니다.

류겸자 여사는 이후에도 조선에서 관동대진재로 무너진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재건 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독창회 등 수십 차례의 공연을 하며 근대 서양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기사입력일 : 2021년 01월 22일
聲如玉, 如醉(성여옥, 객여취)


대성황의 류겸자 부인 독창회

만장을 늣기게 한 텬재의 묘음




올래동안 여러 사람의 마음이 조리도록 고대 고대하든 본사 주최의 류겸자 부인 독창회(柳兼子 夫人 獨唱會·류겸자 부인 독창회)는 예뎡과 갓치 재작 사일 오후 팔시부터 종로청년회관 대강당에서 성대히 열엇섯다. 여러 날 고대하든 끗헤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은 오후 륙시 반부터 종로 널분 길을 덥허서 청년회 정문이 터지도록 꾸역꾸역 모혀들어 칠시가 되매 벌서 회장은 터지도록 만원이 되얏다. 뎡한 시간보다 한 시간을 늣게 오후 팔시에 본사의 렴상섭(廉尙爕 君·염상섭 군)이 단에 올나서 개회의 말과 류겸자 부인을 소개한 후 부인의 량인 되는 류종렬(柳宗悅·류종열) 씨가 간단히 인사를 하얏다.


그가 단에 나리매 텽중은 신경(神經·신경)이 한껏 긴장하야 마음이 간질간하질고 몸을 엇더케 둘지 몰나서 얼는 겸자 부인이 단에 올으지 안이하야 궁금히 역일 지음에 부인은 오동입 문의를 곱게 노흔 남색 『지리멘』 옷에 적도 코도 안이한 몸을 가비얍게 가리우고 머리는 여우형(女優型·여우형)으로 살작 이마를 덥허 묘하게 틀고 『고무』 바닥 겹신에 백설갓치 힌 버선을 신은 발을 삽분삽분 거러 뒤에 신원(榊原·신원) 씨를 딸니고 단에 올나 어린 아해갓치 텬진스러운 얼골에 살작 연지를 발은 두 볼을 방긋하며 고개를 나직 숙이어 례를 하매 텽중은 손이 깨어지도록 박수를 한다.

이에 신원 씨의 『피아노』 반주로 음악회의 뎨일막은 『토-마』의 지은 가극 『미니온』으로 열니엇다. 부인이 한번 입을 열매 회장은 모기 소리도 업시 정숙하야 텽중의 눈은 일제히 독창하는 이의 입으로 모히엇다. 그 가늘고 련한 소래, 놉고도 둥근 곡됴는 변환이 민속하야 회장이 떠나갈 듯하다고 할 동안에 벌서 옥반에 구실을 굴니는 듯한 소래는 텽중의 정신을 새롭게 하얏스며 곡됴에 의지하야 그의 표정하는 것은 과연 녀배우로도 당하기 어려울 만함에는 누구나 감동치 안이치 못하얏다.

뎨이회의 『수-뻬르트』의 지은 『죽엄과 아가씨』, 『어린 미듬』이 박수갈채 중에 끝나매 신원 씨의 쾌활하고 유량한 『피아노』 독주가 잇슨 후 『마이에르뻬아』의 지은 가극 예언자(預言者·예언자) 중에서 『아아 내 아히야』, 『은혜를 베푸소서』의 두 곡의 독창으로 뎨일부는 끗나고 이에 십분간의 휴식이 되얏다가 다시 시간이 되야 뎨이부를 시작할 새

본사에서는 이번에 특별히 조선의 음악과 예술게를 위하야 멀니 동경에서 현해 『玄海』(현해)를 건너와서 우리를 위하야 독창회를 열어주는 겸자 부인을 위로하기 위하야 화환 한 개를 증정하게 되야 안종건 씨 령양 안진주 양(安鍾健 氏 令孃 安眞珠 孃·안종건 씨 영양 안진주 양) (十二·십이)와 리부순 양(李富順 孃·이부순 양) (十二·십이)으로 하야금 겸자 부인에게 화환 한 개를 들이엇다. 부인은 감사하다는 례를 하고 바디서 단 우에 노흐매 텽중은 일제히 박수를 하야 부인을 더욱 위로하얏다.

뎨이부 뎨일곡 『웨뻬르』의 지은 『자유의 춍장이』가 시작되매 부인의 목소래는 앗가보다도 더욱 말고 새로워 그의 짝업시 발달된 성대(聲帶·성대)에는 누구가 감탄치 아니치 못하얏스며 사람이 만흠으로 회장이 훈훈하나 텽중은 더운 줄도 모르고 아조 넉을 일허바리엇섯다.

뎨이곡 『불길이 번젹인다』와 뎨삼곡 『달밤』, 『엇지 장미꼿츤 이가치 야위엇느냐?』, 『업슴』 등이 끝나매 다시 신원 씨가 『요한힘』의 지은 『판타지 풀로네이쓰』란 곡조를 타고 나서 텽중의 박수가 끗나기 젼에 본사에서 다시 씨를 위로하기 위하야 전긔 두 아가씨로 하야금 씨에게 화환 한 개를 증정하며 씨가 인사하기도 젼에 텽중은 박수로 위로하는 뜻을 표하얏다.

마지막으로 『뻬세-』의 지은 가극 『카르면』의 독창이 맛친 후 섭섭히 페회를 하얏는대 때는 오후 십시경이오, 텽중은 일쳔삼백여 명으로 비상히 성황을 이루엇스며 이번 음악회로써 조선 안에서 모인 순예술뎍(純藝術的·순예술적) 모임의 처음이라 하야도 과언이 아니겟더라.


옥 같은 소리에 취한 관객

대성황 이룬 류겸자 부인 독창회

만원 청중을 감동시킨 천재의 아름다운 음성



오랫동안 많은 사람이 마음을 졸이며 고대하던 본사 주최 류겸자 부인 독창회는 예정과 같이 그저께인 4일 오후 8시부터 종로 YMCA회관 대강당에서 성대히 열렸다. 여러 날 기다리던 끝에 구경하러 온 사람들은 오후 6시 반부터 종로 넓은 길을 덮고, 청년회관 정문이 터지도록 꾸역꾸역 모여들어 7시가 되자 벌써 회장은 터지도록 만원이 되었다. 예정된 시간보다 1시간 늦은 오후 8시에 본사 염상섭 군이 단에 올라 개회사를 하고 류겸자 부인을 소개한 뒤 부인의 남편 되는 류종열 씨가 간단하게 인사를 했다.

그가 단상에서 내려오자 청중은 신경이 한껏 긴장해 마음이 간질간질하고 몸을 어떻게 둘지 몰라 류겸자 부인이 얼른 단에 오르지 않아 초조해할 즈음 부인은 작지도 크지도 않은 몸을 오동잎 무늬 곱게 놓은 남색 크레이프 비단 옷으로 가볍게 가리고, 머리는 여배우처럼 살짝 이마를 덮어 예쁘게 틀고, 고무바닥 겹신에 백설 같이 하얀 버선을 신은 발로 사뿐사뿐 걸어 사카키바라 타다시(榊原直) 씨를 뒤따르게 하고 단에 올라 어린아이 같이 천진스러운 얼굴에 살짝 연지를 바른 두 볼을 방긋하며 고개를 나직이 숙여 인사하자 청중은 손이 깨지도록 박수를 보냈다.

사카키바라 씨의 피아노 반주에 맞춘 토마의 오페라 ‘미뇽’으로 음악회의 제1막이 열렸다. 부인이 한번 입을 열자 회장은 모기 소리도 없이 정숙해졌고, 청중의 눈은 일제히 독창하는 부인의 입으로 모였다. 그 가늘고 연한 소리, 높고도 둥근 곡조는 변환이 빨라 회장이 떠나갈 듯하다고 할 동안에 벌써 옥반에 구슬 굴리는 듯한 소리는 청중의 정신을 새롭게 했다. 곡조에 따라 그는 여배우도 당하기 어려울 만한 표정을 지어 누구나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제2막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 ‘봄의 신앙’이 박수갈채를 받으며 끝나자 사카키바라 씨의 맑고 쾌활한 피아노 독주가 이어졌다. 이후 마이어베어의 가극 ‘예언자’ 중 ‘아아, 내 아이야’, ‘은혜를 베푸소서’의 두 곡 독창으로 제1부는 끝나고 10분간의 휴식에 이어 다시 시간이 되어 제2부를 시작할 사이에

본사에서는 이번에 특별히 조선의 음악과 예술계를 위해 멀리 동경에서 현해탄을 건너와 우리에게 독창회를 열어주는 겸자 부인을 위로하기 위해 화환 1개를 증정하게 됐다. 안종건 씨의 딸 안진주 양(12)과 이부순 양(12)으로 하여금 류겸자 부인에게 화환 1개를 드렸다. 부인이 감사하다고 고마움을 표시한 뒤 화환을 받아서 단 위에 놓자 청중은 일제히 박수를 치며 부인의 노고를 위로했다.

제2부 제1곡 베버의 ‘마탄의 사수’가 시작되며 부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도 더욱 맑고 새로워 그의 비교할 바 없이 발달된 성대에는 누구나 감탄할 수밖에 없으며, 사람이 많아 회장이 더웠지만 청중은 더운 줄도 모르고 아주 넋을 잃어버릴 지경이었다.

제2곡 ‘불꽃은 타오르고’와 제3곡 ‘달밤’, ‘장미는 왜 이리 창백한가?’, ‘무궁동’ 등이 끝나자 다시 사카키바라 씨가 요아힘의 ‘판타지 폴로네즈’라는 곡을 연주하고 나서 청중의 박수가 끝나기 전에 본사는 다시 부인을 위로하기 위해 앞에 적은 두 아가씨에게 화환 1개를 증정했다. 부인이 인사하기도 전에 청중은 박수로 위로의 뜻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비제의 가극 ‘카르멘’ 독창을 마친 뒤 섭섭한 마음으로 폐회를 했는데 밤 10시경에 달했는데도 청중이 13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놀라운 성황을 이뤘다. 이번 음악회는 조선 안에서 순수 클래식 모임의 최초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