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불량 자백하라’ ‘이상스레 같았을 뿐’ 첫 표절 논란
히라가나를 쉽게 외우라고 만든 ‘이로하니호헤토’를 ‘1234567’로 바꿨을 뿐 두 동요가 아주 비슷합니다. 급기야 동아일보 1926년 9월 23일자 ‘문단시비’란에 ‘소금쟁이는 번역인가’ 기고가 실렸죠. 집안의 15세 아이가 6학년 여름방학 학습장에 실린 일본 시인 사이죠 야소(西條八十)의 동요라며 들고 왔답니다. 아이는 “뻔뻔하게 제가 시인이라고···”라며 1등 작가 한정동을 향해 욕까지 했다죠. 15세 소년 눈에도 같은 작품으로 비쳤으니까 누가 봐도 마찬가지였겠죠. 일본 동요는 1924년 7월에 실렸으니 늦게 발표된 1등 동요가 표절 혐의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고자는 일본 동요를 본 순간 한정동의 야비한 행동이 말할 수 없이 미워졌다고 했죠. 나아가 베껴 낸 작품을 1등 수상작으로 고른 심사위원의 책임도 거론했습니다.
열흘 정도 지나 반박문이 ‘문단시비’란에 실렸습니다. 공개 비판하지 않아도 될 일을 떠벌였다고 나무라는 논조였죠. ‘소금쟁이’가 번역이라고 해도 명작동요 아니냐, 이 정도로 번역을 한다면 앞으로 명작 동요도 많이 나올 거라고 덧붙이면서요. 심사위원이었던 김억도 뒤이어 기고했죠. 일본 동요를 보니 ‘소금쟁이’를 창작으로 인정할 수 없게 됐지만 어쨌건 우리 어린이들이 좋은 동요를 읽게 됐으니 잘된 일 아니냐는 투의 변명론이었죠. 당사자인 한정동도 2회 연속 글을 실어 ‘소금쟁이’를 처음 발표한 시점은 1923년이었고 번역이라곤 해본 적도 없었다고 해명했습니다. 너무나 이상하게도 일본 동요와 자기 작품이 같기 때문에 독자들이 오해할까봐 창작과정을 알린다는 취지였죠.
하지만 두둔과 변명, 해명도 비판의 거센 파도 앞에서는 무력했습니다. 두 동요를 비교하면 번역으로 볼 수밖에 없고 결국 글 도적놈이나 흡혈귀 짓이었다는 맹공격이 이어졌죠. 워낙에 동요작가가 없으니 남의 작품을 번역해 냈더라도 봐줘야 하지 않느냐는 옹호론은 ‘인구가 적은 나라에서는 살인, 강도를 해도 죄를 묻지 말라’는 식이냐며 되치기를 당했죠. 이 과정에서 난데없이 소파 방정환에게 불똥이 튀기도 했습니다. 방정환도 서덕요라는 소년이 쓴 동요 ‘허잽이’를 자기 이름으로 동요집에 실었다는 고발이 나왔거든요. 방정환은 자신이 주관하는 ‘어린이’ 잡지에 동요가 부족해 서삼득이라는 가명으로 자기 동요를 실었고 이후 본명으로 냈었노라고 전후 사정을 해명해야했습니다.
동아일보는 최초의 아동문학 표절공방 10회 뒤 편집자 명의로 글을 실었죠. ‘번역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1923년에 썼다는 증거를 내지 못했다. 표절의 이름을 벗을 수 없다. 상금을 물리는 편이 양심에 좋을 것’이라고 작가의 행동을 촉구했죠. 하지만 작가는 창작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편친 않았는지 1927, 1958년에 ‘소금쟁이’를 거푸 고쳐 썼지만 아무래도 처음 수준엔 미치지 못했죠.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국민동요 ‘따오기’ 아시죠? 한정동의 재능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57세에 월남하면서 그간 써둔 300여 편은 두고 왔다죠. 75세이던 1969년에 그동안 절약해 모은 돈으로 ‘한정동아동문학상’을 만들었습니다. 격려가 창작을 북돋운다면서요. 올해 제49회 시상식이 열렸습니다.
기사입력일 : 2021년 12월 17일
『소금장이』는
飜譯(번역)인가 虹波(홍파)
日前(일전) 일이다.
나는 讀書(독서)에 깁히 잠들어 이 宇宙(우주)에는 冊(책)과 나 自身(자신) 以外(이외)에는 人物(인물)도 업는 듯십헛슬 때이엿다.
누군지 房門(방문) 압 마루에 와 안지며 나에게 무어라 말하는 것 갓핫다. 나는 冊(책)에서 視線(시선)을 그리로 돌이키엿다. 그는 十五歲(15세) 된 B라는 집안 兒孩(아해)이엿다. B는 恒常(항상) 文學(문학)이 조와요 저는 文學(문학)과 生命(생명)을 가치할 터이야요 하며 나에게 時時(시시)로 童謠(동요)를 갓다주고 보아 달나는 때가 만앗다. 그리하야 나는 집안 兒孩(아해)들 中(중)에서 第一(제일) 귀여한다. 今年(금년)에 某高普(모고보) 二學年(2학년)인대 才操(재조)도 相當(상당)히 잇는 兒孩(아해)이다. 나는 日常(일상)과 가치 童謠(동요)를 써가지고 왓나 하야 『무슨 童謠(동요)를 써가지고 왓니 어데 보자』 하며 손을 내민즉 B는 그러치 안타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自味(자미)잇는 일이 生(생)겨서 왓다 한다. 나는 무슨 自味(자미) 잇는 일인가 하고 잇슬 때에
『저─기 『소금장이』라는 童謠(동요)가 잇지 안아요.』
『그래.』
『그것이 누가 진 깃이지요.』
『韓晶東(한정동)이라는 사람이 써서 昨年(작년) 東亞日報社(동아일보사) 新春文藝(신춘문예) 懸賞募集(현상모집) 時(시)에 一等(1등)으로 入選(입선)된 童謠(동요)다.』
『그러치 안아요. 이것을 좀 보서요』 하며 상글상글 웃는다. 그리고 이어서
『普通學校(보통학교) 冊(책)을 너둔 궤짝에서 六學年(6학년) 때의 夏期休學習帳(하기휴학습장)에 日文(일문)으로 잇서요. 韓晶東(한정동)이라는 사람은 昨年(작년)에 내엇지마는 이 冊(책)은 再昨年(재작년) 것이야요. 이것을 譯(역)을 하야 一等(1등)을 타먹엇지요. 별 우스운 忘(망)할 子息(자식).
그리고도 빤빤하게 제가 詩人(시인)이라고 코구녕이 詩人(시인)야 그따위가 잇스니 되기는 무엇이 되야』 하며 無邪氣(무사기)한 意味(의미)하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붓는다. 나는 그게 무슨 소리이냐고 소리를 좀 놉혓다. B는 얼골이 빨개진다. 平常(평상)에 나에게 큰소리를 듯지 안타가 처음 들으닛가 그런 模樣(모양)이다.
나는 冊(책)을 바다들고 B가 말하든 童謠(동요)를 읽엇다. 그 內容(내용)은 果然(과연) 十五歲(15세) 된 少年(소년)에게 욕먹어도 應當(응당)하다고 生覺(생각)케 하엿다.
내가 最初(최초)에 韓晶東(한정동) 君(군)을 알기는(勿論‧물론 對面‧대면은 업다) 昨年(작년) 東亞日報社(동아일보사) 新春文藝(신춘문예) 作品(작품) 發表(발표) 時(시)엿다. 그때에 一等(1등) 當選(당선) 된 『소금쟁이』를 읽엇다. 그리고 韓(한) 君(군)의 兒童心理(아동심리)에 對(대)한 觀察(관찰)이며 童謠(동요)(詩‧시)의 表現(표현) 技巧(기교)에 豊富(풍부)함에 나는 깃벗다. 朝鮮(조선)에도 숨은 天才(천재)가 잇고나 하고 生覺(생각)할 때에 더욱 깃벗다. 그리고 其後(기후)부터 여긔저긔 揭載(게재)되는 韓(한)君(군)의 詩(시)나 童謠(동요)의 大部分(대부분)을 읽엇다.그리고서는 不滿(불만)을 늣기면서도 오히려 韓(한)君(군)의 將來(장래)를 비는 同時(동시)에 朝鮮詩壇(조선시단)이 健全(건전)하게 됨을 祝望(축망)하얏다.
그러나 이 瞬間(순간)에 와서 나는 나의 韓(한)君(군)에 對(대)한 朝鮮詩壇(조선시단)에 對(대)한 慾望(욕망)과 期待(기대)는 사라저가고 오히려 韓(한)君(군)의 野卑(야비)한 行動(행동)이 말할 수 업시 미워진다. 그리고 異常(이상)하게 生覺(생각)됨은 韓(한)君(군)이 良心(양심)에 每日(매일) 매마저가며 곳 自白(자백)을 안이하고 今日(금일)까지 엇더케 지내오나 하는 奇異(기이)한 生覺(생각)이다. 그뿐더러 韓(한)君(군)이 野卑(야비)한 行動(행동)을 하게 한 것을 韓(한)君(군) 自身(자신)의 罪(죄)보다도 오히려 其(기) 當時(당시)의 選者(선자)의 責任(책임)인 줄 안다. 왜 그러냐 하면 萬一(만일)에 選者(선자)가 그것을 안 때에 韓(한)君(군)에게 곳 通知(통지)를 하던지 그러치 안으면 落選(낙선)을 식히든지 하얏드면 韓(한)君(군)은 野卑(야비)한 行動(행동)을 아니하얏슬 것이다. 그러나 인제는 할 수 업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朝鮮詩壇(조선시단)을 生覺(생각)하야 韓(한)君(군)의 辯明(변명)을 할야 하얏다. 그리하야 나는 辯明(변명)을 始作(시작)하야 얼맛침 進行(진행) 中(중)에 나의 辯明(변명)하는 말에 矛盾(모순)이 生(생)김을 알고 더 말할 수가 업섯다. 나의 辯明(변명)하는 말에 矛盾(모순)이 生(생)겻다 함은 卽(즉) 韓(한)君(군)의 行動(행동)이 矛盾(모순)이라는 말이다. 勿論(물론) 矛盾(모순)이라는 말을 可便(가편)으로 理解(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야 矛盾(모순)된 世間(세간)에서 矛盾(모순)된 일을 行(행)햇다 하면 그는 容恕(용서)치 못할 일이다. 말하자면 엇더한 惡(악)이 되는 塲所(장소)에서 惡(악)을 行(행)하얏다 함은 容恕(용서)치 못할 일과 갓다 하야 할 수 업시 韓(한)君(군)은 罪(죄)를 免(면)하기가 어렵다. 아니 질 수밧게는 업다. 그리하야 나는 여긔에 日文童謠(일문동요)와 韓(한)君(군)의 『소금쟁이』를 적어 模倣(모방)인가 譯(역)인가 或(혹)은 創作(창작)인가를 一般(일반)에게 判斷(판단)하야 바드랴 한다. 萬一(만일)에 創作(창작)이라 하면 吾等(오등)은 朝鮮詩壇(조선시단)을 爲(위)하야 깃버하야 할 것이다.
장포밧 못 가운대 소금쟁이는
1 2 3 4 5 6 7 쓰며 노누나
쓰기는 쓰지만두 바람이 불어
지워지긴 하지만 소금쟁이는
실타고도 안하고 뺑뺑 돌면서
1 2 3 4 5 6 7 쓰며 노누나
(一九二五(1925)·三(3))
小池(소지)の小池(소지)の みづすまし
いろはにほへと 書(서)いてゐる
書(서)いても書(서)いても 風(풍)が來(내)て
消(소)しへは行(행)けど みづすまし
ぁきずにぁきずに お手習(수습)ひ
いろはにほへと 書(서)いてゐる
(一九二四(1924)·七(7))
이러하엿다.
韓(한)君(군)이여 未知友人(미지우인)의 韓(한)君(군)이여. 怒(노)하지 말라. 아니 그대는 오히려 歡喜(환희)의 눈물을 흘닐 것이다. 그는 今日(금일)까지 苦痛(고통)밧든 君(군)의 良心(양심)에 검은 고름집을 이제 바늘노 破腫(파종)하엿스니
끗흐로 君(군)의 健强(건강)과 새로운 압길에 光明(광명)잇기를 빌며 붓을 논는다 (─二六(26)·九(9)·八(8))
‘소금쟁이’는
번역인가
홍파
며칠 전 일이다.
나는 독서에 깊이 빠져 이 우주에 책과 나 자신 이외에는 사람도 없는 듯싶었을 때였다.
누군지 방문 앞마루에 와 앉으며 나에게 무어라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책에서 눈길을 그리로 돌렸다. 그는 15세 된 B라는 집안 아이였다. B는 항상 문학이 좋아요, 저는 문학과 생명을 같이 할래요 하며 나에게 때때로 동요를 갖다 주며 보아 달라는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집안 아이들 중에서 제일 귀여워한다. 올해 모 고보 2학년인데 재주도 상당히 있는 아이다. 나는 평소처럼 동요를 써가지고 왔나 싶어 “무슨 동요를 써가지고 왔니? 어디 보자”하며 손을 내밀었다. B는 그렇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재미있는 일이 생겨서 왔다고 한다. 나는 무슨 재미있는 일인가 하고 있을 때
“저~기, ‘소금쟁이’라는 동요가 있지 않아요?”
“그래.”
“그것이 누가 지은 것이죠?”
“한정동이라는 사람이 써서 작년 동아일보사 신춘문예 현상모집 때 1등으로 입선된 동요다.”
“그렇지 않아요. 이것을 좀 보세요” 하며 생글생글 웃는다. 그리고 이어서
“보통학교 책을 넣어둔 궤짝에 6학년 때 여름방학 학습장에 일본어로 있어요. 한정동이라는 사람은 작년에 냈지만 이 책은 재작년 것이에요. 이것을 번역해 1등을 타먹었죠. 별 우스운 망할 자식. 그러고도 뻔뻔하게 제가 시인이라고? 콧구멍이 시인이야? 그따위가 있으니 무엇이 돼?” 하며 간사한 뜻은 없지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붓는다. 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소리를 좀 높였다. B는 얼굴이 빨개진다. 평소에 나에게 큰소리를 듣지 않다가 처음 들으니까 그런 모양이다.
내가 처음으로 한정동 군을 알기는(물론 얼굴을 본 적은 없다) 작년 동아일보사 신춘문예 작품 발표 때였다. 그때 1등 당선된 ‘소금쟁이’를 읽었다. 그리고 한 군의 아동심리에 대한 관찰이며 동요(시)의 표현 기교가 풍부함을 알고 나는 기뻤다. 조선에도 숨은 천재가 있구나 하고 생각할 때에 더욱 기뻤다. 그리고 그후부터 여기저기 게재되는 한 군의 시나 동요의 대부분을 읽었다. 그러고 나서는 불만을 느끼면서도 오히려 한 군의 장래를 비는 동시에 조선시단이 건전하게 되기를 빌고 바랐다.
그러나 이 순간에 와서 나는 내가 한 군에게 걸었던 조선시단에 대한 욕망과 기대는 사라져가고 오히려 한 군의 야비한 행동이 말할 수 없이 미워진다. 그리고 이상하게 생각되는 점은 한 군이 양심에 매일 매맞아가며 곧 자백을 하지 않고 오늘까지 어떻게 지내오나 하는 것이다. 그뿐더러 한 군이 야비한 행동을 하게 한 것은 한 군 자신의 죄보다도 오히려 그 당시 심사위원의 책임인 줄 안다. 왜냐하면 만약 심사위원이 그것을 알았을 때 한 군에게 곧 알렸든지 그렇지 않으면 낙선을 시키든지 했다면 한 군은 야비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조선시단을 생각해 한 군의 변명을 하려 했다. 그리하여 나는 변명을 시작해 어느 정도 진행하던 중에 나의 변명에 모순이 생긴 것을 알고 더 말할 수가 없었다. 내가 변명하는 말에 모순이 생겼다는 것은 즉 한 군의 행동이 모순이라는 말이다. 물론 모순이라는 말이 옳다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서 모순된 세상에서 모순된 일을 저질렀다고 하면 이는 용서하지 못할 일이다. 말하자면 어떤 악이 되는 장소에서 악을 저질렀다고 한 것은 용서하지 못할 일과 같으므로 어쩔 수 없이 한 군은 죄를 면하기가 어렵다. 아니 책임을 질 수밖에는 없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일본어 동요와 한 군의 ‘소금쟁이’를 적어 모방인가 번역인가 아니면 창작인가를 독자로부터 판단 받으려고 한다. 만약 창작이라고 하면 우리는 조선시단을 위해 기뻐해야 할 것이다.
장포밭 못 가운데 소금쟁이는
일이삼사오륙칠 쓰며 노누나
쓰기는 쓰지만도 바람이 불어
지워지긴 하지만 소금쟁이는
싫다고도 안하고 뺑뺑 돌면서
일이삼사오륙칠 쓰며 노누나
(1925년 3월)
小池の 小池の みづすまし
いろはにほへと 書いてゐる
書いても 書いても 風が來て
消しへは行けど みづすまし
ぁきずにぁきずに お手習ひ
いろはにほへと 書いてゐる
(1924년 7월)
이렇다.
한 군이여, 아지 못할 친구 한 군이여. 노하지 말라. 아니 그대는 오히려 환희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는 오늘까지 고통 받던 그대의 양심에 검은 고름집을 이제 바늘로 터뜨렸으니. 끝으로 그대의 건강과 새로운 앞길에 광명 있기를 빌며 붓을 놓는다.
(1926년 9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