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3월 1일

재판장이 “피고 이름은?” 묻자 “나는 박열이다” 반말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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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이 마침내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 유명한 아나키스트 박열 말입니다. 붙잡힌 지 2년 6개월 가까이 지난 1926년 2월 말이었죠. 그런데 옷차림이 특이했습니다. 옛날 조선 관리들이 입던 예복에 사모관대까지 했죠. 박열 왼쪽에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머리를 쪽찐 가네코 후미코가 앉아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가만가만 얘기를 나누기도 했죠. 동아일보 1926년 3월 2일자에 사진이 실려 있습니다. 1923년 간토대지진이 일어난 지 이틀 뒤 일제는 박열이 이끄는 ‘불령사’ 회원들을 체포했습니다. 기나긴 예심을 거쳐 기소된 사람은 박열, 가네코, 김중한 3명뿐이었죠. ‘불령사’를 폭동을 모의한 비밀결사로 몰아가려 했지만 증거가 없었습니다. 다만 박열 등 3명은 천황을 폭살하려 했다며 대역죄로 엮어 넣었죠.


이미 박열은 21차례, 가네코는 23차례 혹독한 조사를 받았습니다. 웬만한 이들이라면 벌써 심신이 무너졌겠지만 두 사람은 그렇지 않았죠. 박열은 재판이 열리기 전 조건까지 내걸었습니다. 첫째 나를 죄인 취급 말고 ‘피고’라고 부르지도 말라. 둘째 법정에서 조선 예복을 입겠다. 셋째 의자도 재판장과 같은 높이로 설치하라. 넷째 재판 시작 전에 선언문을 낭독하겠다. 들어주지 않으면 법정에서 답변을 안 하겠다고 일방 통고했습니다. 재판장은 ‘말도 안 된다’며 거부할 수만은 없었죠. 박열은 ‘소위 재판에 대한 나의 태도’ ‘나의 선언’ ‘불령선인으로부터 일본 특권계급에게 준다’는 글을 답변 대신 낭독했습니다. 각기 국가권력의 재판을 부정하고 허무주의적 세계관을 드러내며 천황제의 허구성을 담은 글이었죠.

왼쪽은 동아일보 1925년 11월 27일자에 실린 '불령사'가 있던 건물과 박열, 가네코 후미코 얼굴사진. 오른쪽은 동아일보 1926년 3월 2일자에 실린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첫 재판 사진.

하지만 3월 말 일제 검찰과 법원은 사형 구형에, 사형 선고로 되갚았습니다. 폭탄을 찾아내지도 못했는데 말이죠. 그래서였을까요? 검찰은 처음엔 ‘대역사건’이라고 선전했다가 슬그머니 ‘불령사사건’으로 낮춰 불렀습니다. 선고 열흘 만에 천황의 은사라며 무기징역으로 감형한 것만 봐도 속사정을 짐작할 수 있죠. 사형이 선고되자 박열은 ‘재판은 유치한 연극이다’라고 소리 질렀고 가네코는 ‘만세’를 외쳤죠. 두 사람은 선고 이틀 전에 혼인 신고서를 내 공식 부부가 됐습니다. 4월 서로 다른 감옥으로 옮기게 되자 박열은 가네코의 손목을 잡고, 가네코는 박열의 옷깃을 부여잡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죠. 이승에서의 마지막 만남인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기 때문이었을까요?

①1922~23년 경의 가네코 후미코 모습 ②동아일보 1926년 7월 31일자에 실린 가네코 후미코 자살 관련 기사의 제목 ③1926년 11월 가네코 후미코의 유골을 가져와 안장한 경상북도 문경시 팔영리 묘소.

3개월 뒤 가네코는 감옥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박열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로 23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죠. 무기징역 감형 은사장을 형무소장 앞에서 갈가리 찢어버렸던 당찬 여인의 최후라기에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담당 변호사도 ‘주의(主義)를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두려운 것이 없다는 강렬한···과연 사나이다운 여자였다’고 평가했었거든요. 남편 박열과 편지를 주고받을 수도 없었고 전향을 강요당했으며 글 쓰는 일조차 어려웠던, 질식할 것만 같았던 상황 끝에 선택한 길이었던 듯합니다. 앞서 법정에서 ‘차라리 죽어서 그 뜻을 부군 박열에게 바치고 조선 땅에 내 뼈를 묻음으로써 모든 것을 조선을 위해 바친다면 그 뜻은 언젠가 누구라도 알아주게 될 것이 아닌가?’라고 한 말이 유언처럼 남았을 뿐이죠.

①동아일보 1927년 1월 21일자에 실린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사진. 예심법정에서 두 사람이 붙어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일제가 보도통제를 하는 바람에 사진이 찍힌 지 1년이 지나서야 공개됐다. ②사진과 함께 유출된 박열의 예심결정서 사진. 동아일보 1926년 9월 1일자에 게재됐다.

박열 부부 사건은 8월에 한 번 더 일본 열도를 뒤흔들었습니다. 예심 당시 박열 앞에 붙어 앉은 가네코가 책을 읽는 사진이 유출됐기 때문이었죠. 예심판사가 ‘대역사건’을 뒷받침할 진술을 얻어내기 위해 두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찍어줬던 사진이 흘러나갔던 겁니다. 일제가 철저하게 보도를 통제했지만 일본 야당인 정우회와 정우본당 등이 옥중의 대역죄인을 우대하고 천황을 속여 감형까지 해줬다며 여당인 헌정회를 공격하는데 사진을 이용하면서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져갔죠. 결국 이듬해 헌정회 내각은 총사퇴하고 정우회 내각이 들어섰습니다. 민족의 장벽을 넘어선 박열 부부의 투쟁이 내각 붕괴의 도화선이었습니다.

기사입력일 : 2021년 10월 29일
朴烈夫婦(박렬부부)에 死刑(사형) 求刑(구형)
覺悟(각오)햇던 듯이 泰然(태연) 微笑(미소)
태도를 밝힌 후 변호사 변론도 거졀


작지 속보═동경대심원 대법뎡에서 열닌 중대범인 박렬(朴烈)부부 특별공판의 뎨이일(이십칠일)은 박렬 금자문자(金子文子)에 대한 사실심리가 끗나자 립회하엿던 소원(小原)차석검사로부터 론고가 잇슨 후 피고 량인에 대하야 사형(死刑)을 구형하엿는데 그 사형이라는 말에도 박렬부부는 임의 각오하고 잇섯든 듯이 오히려 태연자약한 태도로 각긔 얼골에 미소(微笑)를 흘니며 잇섯다. 오전 열시 이십분 경에 공판을 잠간 휴게하엿다가 동 사십오분에 다시 개뎡하고 박렬로부터 검사의 론고와 구형에 대하야 대담한 말로 자긔의 태도를 선명히 한 후 또한 자긔 부부에 대하야 변호사들의 변론도 필요가 업다고 거절을 하엿다.(東京特派員‧동경특파원 二十七日‧27일 發電‧발전═延着‧연착)

判決(판결)은 一週日內(일주일내)
변호사들의 무죄변론


박렬로부터 변호사들의 변론을 거절하엿슴에도 불구하고 신정(新井) 포시(布施) 황정(荒井) 등 세 변호사로부터 각긔 범죄의 증거가 불충분하니 무죄가 당연하다는 변론이 잇슨 후 공판 뎨이일은 이로써 페뎡되야 박렬부부는 엄중한 경게 중에 대법뎡을 나서서 다수한 간수들의 호위 아래 대심원 디하실 가감(假監) 속에 잠간 들리엇다가 다시 시곡(市谷)형무소로 향하여 갓다. 그 이튼날인 이십팔일에는 일요임에도 불구하고 목야(牧野)재판댱의 직권으로 속행공판(續行公判)을 개뎡하고 산긔(山崎) 상촌(上村) 두 변호사의 변론이 잇슨 후 결심(決審)을 할 예뎡이라는데 판결은 십팔일부터 약 일주일 동안으로 언도할 예뎡이라더라.(東京特派員‧동경특파원 二十七日‧27일 發電‧발전)

日曜日(일요일) 開廷問題(개정문제)로
大審院(대심원)에 一波瀾(일파난)
辯護士側(변호사측) 缺席(결석)키로 抗議(항의)
원댱 이하 총츌동으로 교섭
三月(3월) 一日(1일) 續開(속개)


박렬부부의 속행공판에 대하야 대심원 측에서는 이십칠일에 결심할 예뎡이엇섯스나 변호사측으로부터 결심을 하로동안만 연긔하여 달나고 신청한 바이 잇서 대심원에서도 그러케 하기로 결뎡이 되엿는데 이십칠일에 목야 재판댱은 이십팔일이 일요임에도 불구하고 그날 속행공판을 개뎡하겟다고 선언하엿슴으로 변호사 측에서는 하로 동안을 연긔하자는 것은 이십팔일 일요일에 하자는 것이 아니오 이십팔일 이후에 개뎡하자는 의향이 잇는데 그와가치 재판댱의 독단뎍으로 일요일에 공판을 개뎡하기로 선언한 것은 불법이라 하아 상촌(上村) 포시(布施) 산긔(山崎) 뎐판(田坂) 등의 각 변호사는 공판 당일에 단연히 출석하지 안켓다는 뜻을 대심원에 말한 후 매우 강경한 태도를 가지고 잇슴으로 대심원 측에서는 크게 량해하야 중대한 사건은 변호사가 업시는 개뎡할 수가 업는 규뎡임으로 이십칠일 밤에 횡뎐(橫田) 대심원댱 이하 주요 판사들의 총출동으로 변호사 측의 량해를 구하는 동시에 특별방텽자들에 대하여서도 하로동안 연긔한다는 것을 통지하고 삼월 일일 오전 아흡시부터 계속하야 개뎡한 후 변호사의 변론을 게속하기로 되엿다.
(東京特派員‧동경특파원 二十八日‧28일 發‧발)

牧野(목야) 裁判長(재판장) 最固執(최고집)으로
昨(작) 日曜日(일요일)에 決審(결심)
박렬 부부도 전날 갓치 출뎡
問題(문제)되엿던 朴烈(박열) 事件(사건) 公判(공판)


별항 보도와 갓치 일요일 개뎡 문뎨로 변호사 측과 목야(牧野) 재판댱 간에 분규를 거듭하든 것은 횡뎐(橫田) 재판댱으로부터 삼월 일일에 개뎡하기로 결뎡하엿슴에 불구하고 목야 재판댱은 의연히 고집을 세워 결국 변호사 측의 량해를 어더가지고 목야 재판댱의 주장과 가치 이십팔일에 게속 개뎡하기로 되야 동일 오전 열한시 십오분에 박렬과 금자문자는 간수에 끌니어 역시 엄중한 경게리에 출뎡하엿다. 동 삼십분에 공판을 개뎡하고 포시(布施) 씨 이하 각 변호사의 출뎡으로 전날 변론하지 못한 남은 두 변호사의 역시 무죄가 가하다는 변론이 잇슨 후 재판댱은 이로써 결심을 선언하고 판결 언도는 별항 보도와 갓치 일주일 안으로 하기로 한 후 페뎡하얏다.(二十八日‧28일 午後‧오후 東京‧동경 至急電‧지급전)
박열 부부에게 사형 구형
각오했던 듯이 태연한 미소
태도를 밝힌 후 변호사 변론도 거절


전날 속보═동경대심원 대법정에서 열린 중대범인 박열 부부 특별공판의 제2일(27일)은 박렬과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사실심리가 끝나자 입회했던 오하라 차석검사로부터 논고가 있은 뒤 사형을 구형하였다. 그 사형이라는 말에도 박열 부부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던 듯이 오히려 태연자약한 태도로 각기 얼굴에 마소를 띄우며 있었다. 오전 10시 20분 경에 공판을 잠깐 쉬었다가 10시 45분에 다시 개정하자 박열은 검사의 논고와 구형에 대하여 대담한 말로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한 뒤 또한 자기 부부에 대하여 변호사들의 변론도 필요 없다고 거절하였다.(도쿄특파원 27일 전보═연착)

판결은 일주일 안으로
변호사들은 무죄 변론


박열이 변호사들의 변론을 거절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라이, 후세, 아라이 등 세 명의 변호사들은 각기 범죄의 증거가 불충분하니 무죄가 당연하다는 변론을 한 뒤 제2일째 공판은 폐정하였다. 박열 부부는 엄중한 경계 속에 대법정을 나서서 많은 간수들의 호위 아래 대심원 지하칠 임시감옥에 잠깐 들렀다가 다시 이치가야 형무소를 향해서 갔다. 이튿날인 28일에는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마키노 재판장의 직권으로 공판이 속행돼 개정하고 야마자키, 가미무라 두 변호사가 변론한 뒤 결심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판결은 18일부터 약 일주일 안에 언도할 예정이라고 한다.(도쿄특파원 27일 전보)

일요일 개정 문제로
대심원에 한때 파란
변호사 측 결석하겠다고 항의
원장 이하 총출동해 만류
3월 1일 속개


박열 부부의 속행공판에 대해 대심원 측에서는 27일에 결심할 예정이었으나 변호사 측으로부터 결심을 하루 동안만 연기해 달라고 신청한 일이 있어 대심원에서도 그렇게 하기로 결정핬다. 그런데 27일에 마키노 재판장은 28일이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그날 속행공판을 진행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변호사 측에서는 하루를 연기하자는 것은 28일 일요일에 하자는 것이 아니고 28일 이후에 개정하자는 뜻이었는데 그처럼 재판장이 독단적으로 일요일에 공판을 열기로 선언한 것은 불법이라고 하였다. 가미무라, 후세, 야마자키, 다사카 등의 여러 변호사는 공판 당일에 결코 출석하지 않겠다는 뜻을 대심원에 말한 뒤 아주 강경한 태도를 가지고 있으므로 대심원 측에서는 크게 당황하였다. 중대사건은 변호사 없이는 개정할 수 없는 규정 때문에 27일 밤에 요코타 대심원장 이하 주요 판사들이 총출동해 변호사 측의 양해를 구하는 동시에 특별방청자들에 대해서도 하루 동안 연기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3월 1일 오전 9시부터 계속해서 개정한 뒤 변호사의 변론을 이어가기로 하였다.(도쿄특파원 28일 발)

마키노 재판장의 강한 고집으로
지난 일요일에 결심
박열 부부도 전날 같이 출정
문제됐던 박열 사건 공판


별도 보도와 같이 일요일 개정 문제로 변호사 측과 마키노 재판장 간에 다툼을 거듭한 점은 요코타 재판장이 3월 1일에 개정하기로 결정했는데도 불구하고 마키노 재판장은 변함없이 고집을 부렸다. 결국 변호사 측의 양해를 얻어 마키노 재판장의 주장대로 28일에 계속 개정하기로 하여 이날 오전 11시 15분에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간수에게 끌려 역시 엄중한 경계 속에 출정했다. 11시 30분에 공판을 열고 후세 씨 이하 각 변호사들도 나와 전날 변론하지 못한 두 변호사 역시 무죄가 옳다는 변론을 한 뒤 재판장은 이로써 결심을 선언하고 판결 언도는 별도 보도와 같이 일주일 안으로 하기로 한 뒤 폐정하였다.(28일 오후 도쿄 긴급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