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9월 5일

조선시대보다 일제 치하가 낫다고? 참 딱한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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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학정 아래서 신음했던 한민족이 그보다 훨씬 나은 일제 총독정치에 왜 불만인가?’라고 생각한 일본인들이 있었습니다. 1953년에 한일협정 일본 수석대표 구보타 간이치로는 “일본은 36년간 많은 이익을 한국인에게 주었다”라고 했죠. 지금도 있습니다. 일본인들만 그럴까요? 우리 주변에도 비슷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일제가 다리도 놓아주고 철도도 깔아주고 공장도 세워주지 않았나’라는 주장 말이죠. 벌써 90년 전에 이런 주장에 ‘정말 그 어리석음을 딱하게 여길 뿐이다’라고 코웃음 친 이가 있었습니다. 동아일보 주필 송진우였죠. 송진우는 1925년 ‘세계대세와 조선의 장래’ 제목의 10회 연속 사설을 쓰면서 ‘총독정치 옹호론’을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동아일보 주필 송진우 2005년 8월 28일부터 9월 6일까지 '세계대세와 조선의 장래' 사설을 10회 연재했다. 1회 사설의 본문과 함께 2~10회 사설의 제목을 한데 모았다.
당시 일본인들은 총독정치 아래서 조선시대보다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고 두둔했습니다. 그 밑바탕에는 조선왕조가 무능하기 짝이 없는 체제이고 조선민족, 즉 한민족은 군소리도 못하는 무기력한 존재라는 전제가 깔려 있죠. 송진우는 이 점을 짚었습니다. ‘현대의 조선인은 과거의 조선인이 아니며 만약 이조의 학정이 현대에 재현된다고 하면 조선인들은 개혁을 절규할 것’이라고 말이죠. 그는 일본인 너희들도 과거의 전제정치에 반항하지 않았느냐고 지적했습니다. 그 점만 떠올려도 ‘총독정치 우월론’을 반성해야 한다고 했죠. 물론 송진우는 무조건 한민족이 과거와 다르다고 주장하진 않았습니다. 근거를 제시했죠. 바로 3‧1운동이었습니다.

왼쪽은 1925년 6월 30일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제1회 태평양회의 참석자들. 조선 대표의 한 사람이었던 동아일보 주필 송진우는 이 회의에서 얻은 견문과 교류의 결과를 토대로 '세계대세와 조선의 장래' 10회 사설을 집필했다. 오른쪽은 힐로트리뷴헤럴드 1925년 7월 26일자 기사로 태평양회의에 참석했던 서재필의 동정을 소개하고 있다. 출처는 독립기념관.
송진우가 보기에 3‧1운동은 한민족 혁신운동사상 거대한 기적이자 위대한 현상이었습니다. 과거의 개혁과 전란은 소수계급의 정권쟁탈이 아니면 쇄국양이 사상이 표현됐을 뿐이라고 했죠. 가까이는 ‘갑신정란’이 그랬고 ‘갑오동란’ 역시 그렇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경술국치가 일어나 일제의 동화정책이 한민족을 짓눌렀다고 했죠. 그러나 반만년 이어진 민족의 내재적 생명은 죽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세계의 신문화를 접하면서 마침내 폭발했다고 했죠. 거족적 3‧1운동으로요. 이제 우리 민족은 새 기운을 얻고 새로운 빛을 보았습니다. 시골 도시 할 것 없이 너도나도 교육을 받으려 하고 경제생활에 집중하게 된 의식의 변화가 종전의 개혁과는 현격하게 다른 요소라고 했죠.

동아일보는 1923년 12월부터 1면에 외신 기사를 비중있게 싣기 시작했다. 강대국이나 식민지 약소국의 움직임을 빠르게 전달하고 시사점을 얻기 위한 조정이었다. 1면 만평에도 세계 동향과 관련된 내용이 많이 실렸다. 그림은 1925년의 미국과 일본의 동향을 보여준 대표적인 만평 3개.
‘세계대세와 조선의 장래’ 연속 사설은 진단과 전망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지금 읽어도 크게 틀리지 않을 정도니까요. 송진우가 제1회 태평양회의를 다녀오면서 얻은 견문과 교류의 결과를 집대성한 ‘작품’인 셈입니다. 먼저 세계적으로 민족운동과 노동운동이 맹렬하게 확산되는 점을 중시했죠. 발칸반도 여러 나라를 비롯해 폴란드 핀란드 이집트가 독립하고 아일랜드는 자유국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소련의 성립이 말해주듯 각국에서 노동운동의 비중 역시 커졌습니다. 일본이 점점 위축되는 점도 놓치지 않았죠. 중국에 21개조를 들이밀고 시베리아에 대규모 출병을 감행한 무리수가 강대국들의 눈 밖에 났습니다. 결국 미국과 일본이 맞붙고 나아가 미국과 소련이 충돌한다고 정확하게 예견했죠.

왼쪽은 1965년 간행된 '고하 송진우 선생전'에 실린 송진우 사진. 가운데는 송진우가 1924년 남강 이승훈의 회갑 기념 서화첩 첫머리에 쓴 축사. 오른쪽은 1922년 3월 중앙고보 제1회 졸업기념식에서 함께 사진을 찍은 김성수 최두선 송진우 현상윤(왼쪽부터).
물론 이 사설에는 결점도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혈통이 극히 순수하고 언어 예절 풍속이 다른 민족에 비해 항상 탁월 우수했다는 민족지상주의는 지금 볼 때 거슬립니다. 3‧1운동 이후 10년이 되는 1929년이면 태평양에서 격돌이 일어나리라는 예측은 희망이 과도하게 스며든 조급성이었죠. 그렇긴 해도 송진우는 당장 준비해야 할 요소로 ‘사상적 수련’과 ‘민족적 단결’을 꼽았습니다. 먼저 복잡한 사상을 정리 통일해야 하고 그 위에서 중심적 단결을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죠. 정세의 변화에 의지하거나 외부의 도움을 기대하기보다 민족 자체의 단합으로 앞날에 대비하자고 했습니다. 그는 이 민족주의적 해법을 곧 실천에 옮깁니다.
기사입력일 : 2021년 08월 13일


世界大勢(세계대세)와 朝鮮(조선)의 將來(장래) (九?9)
日本(일본)과 朝鮮(조선)의 關係(관계)

一(1)
吾人(오인)은 以上(이상)에서 朝鮮(조선) 內部(내부)의 社會的(사회적) 變革(변혁)과 世界大勢(세계대세)의 趨移(추이)와 東洋政局(동양정국)의 危機(위기)로 보아서 四(4) 五年(5년)을 不過(불과)하야 太平洋(태평양)을 中心(중심)으로 한 世界的(세계적) 風雲(풍운)이 惹起(야기)될 것을 論斷(논단)하엿다. 勿論(물론) 主觀的(주관적) 速斷(속단)일는지는 알 수가 업스나 萬一(만일) 過去(과거)의 歷史(역사)가 現下(현하) 大勢(대세)의 産母(산모)며 未來(미래)의 大勢(대세)가 또한 現在(현재) 事實(사실)의 播種(파종)이라 하면 ?(결)코 牽强附會(견강부회)의 空論(공론)이 아니될 것을 確信(확신)하는 바이다. 그러나 다못 論點(논점)은 時間問題(시간문제)일 것이다. 엇지하야 複雜多端(복잡다단)한 世界問題(세계문제)가 何特(하특) 四(4) 五年(5년)을 前後(전후)로 하야 惹起(야기)될 것인가 하는 點(점)일 것이다.

그러나 吾人(오인)이 四(4) 五年(5년) 前後(전후)를 豫言(예언)하는 것도 ?(결)코 荒唐無稽(황당무계)한 空想(공상)에서 立論(입론)한 것은 아니다. 대개 人間社會(인간사회)의 十年(10년)이라 하는 時期(시기)는 個人(개인)으로서나 國家(국가)로서나 一大(일대) 計劃(계획)을 立(입)하야 準備(준비)와 組織(조직)을 完成(완성)하는데 잇서서 比較的(비교적) 最要(최요)한 長期(장기)이다. 이럼으로 越王(월왕) 句踐(구천)은 十年(10년)의 成聚(성취)로 因(인)하야 會稽(회계)의 恥(치)를 雪(설)하엿고 宣朝(선조)의 李文成(이문성)은 外族(외족)의 侵入(침입)을 遠慮(원려)하야 十年(10년)의 養兵(양병)를 主張(주장)치 아니하엿는가. 이러한 意味(의미)에 잇서서 一九一九年(1919년)의 世界的(세계적) 大戰(대전)의 終熄(종식)으로부터 一九二九年(1929년)까지 곳 일로부터 四(4) 五年(5년)만 經過(경과)하면 十年(10년)의 滿期(만기)가 될 것은 勿論(물론)이다. 그러면 大戰(대전)의 終熄(종식)으로부터 그동안 十年間(10년간)에 그 社會(사회) 그 民族(민족)의 努力(노력) 如何(여하)에 依(의)하야는 疲弊(피폐)된 國力(국력)도 復活(부활)될 것이며 消?(소침)된 元氣(원기)도 振作(진작)될 것은 勿論(물론)일 것이다. 하물며 現下(현하)의 交通機關(교통기관)의 發達(발달)과 思想(사상) 傳播(전파)의 影響(영향)이 過去(과거)의 時代(시대)에 比(비)하야 加一層(가일층) 迅速(신속)하고 敏活(민활)하야 時刻(시각)으로 急轉激化(급전격화)하는 것이 現代(현대)의 特色(특색)이 됨이랴.

二(2)
그러면 이와 갓흔 不遠(불원)한 將來(장래)에 世界大勢(세계대세)의 變動(변동)을 豫想(예상)하고 또한 東洋政局(동양정국)의 禍亂(화란)을 推斷(추단)할 때에 가장 特殊(특수)한 事情(사정)을 가진 日本(일본)과 朝鮮(조선)의 關係(관계)는 如何(여하)히 進展(진전)될 것인가. 이 곳 吾人(오인)의 中夜耿?(중야경경)에 長?太息(장우태식)하는 바이다. 過去(과거)의 日本(일본)이 白種(백종)의 英國(영국)과 提携(제휴)하야 東洋(동양)의 同色民族(동색민족)을 或(혹)은 壓迫(압박) 或(혹)은 威脅(위협)함으로써 能事(능사)를 作(작)하엿든 것이 現下(현하) 東洋政局(동양정국)의 禍機(화기)가 아닌가. 萬一(만일) 過去(과거)의 日本(일본)으로 하야곰 當初(당초)부터 東洋(동양) 各(각) 民族(민족)의 共存共榮(공존공영)의 遠大(원대)한 計劃(계획)을 策케 하엿든들 ?(결)코 現下(현하)의 日本(일본) 自體(자체)가 孤立(고립)의 危地(위지)에 處(처)치 아니하엿슬 뿐만 아니라 歐洲大戰(구주대전)으로 因(인)하야 破綻(파탄)된 殺伐的(살벌적) 文明(문명)과 疲弊(피폐)된 白色民族(백색민족)을 誘導(유도) 啓發(계발)하야 世界改造(세계개조)의 人類(인류)의 大偉業(대위업)을 東洋民族(동양민족)의 導率下(도솔하)에서 完成(완성)할 것이 아닌가. 이 엇지 千古(천고)의 恨事(한사)가 아니랴. 그러나 過去(과거)는 過去(과거)인지라 追窮(추궁)할 必要(필요)가 업거니와 現下(현하)에 잇서서 日本(일본) 人士(인사)의 感想(감상)이 如何(여하)하며 所見(소견)이 如何(여하)한지 吾人(오인)의 切聞(절문)코저 하는 바이다. 적어도 朝鮮問題(조선문제)의 解?(해결)은 東洋(동양) 全體問題(전체문제) 解?(해결)의 前提(전제)가 되며 또한 要件(요건)이 될 것은 勿論(물론)이다. 왜 그러냐 하면 가장 民族的(민족적) 關係(관계)가 密接(밀접)하고 文化的(문화적) 恩澤(은택)이 尤甚(우심)한 朝鮮民族(조선민족)을 蹂躪(유린) 壓迫(압박)하는 것은 아무리 日本民族(일본민족)의 全體(전체) 意思(의사)가 아니요 秀吉(수길) 寺內輩(사내배)의 軍閥(군벌) 一派(일파)의 背恩沒義的(배은몰의적) 行動(행동)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半萬年(반만년) 歷史的(역사적) 背景(배경)과 二千萬(2천만) 民衆(민중)의 聰明(총명)을 가진 朝鮮民族(조선민족)으로서는 徹骨(철골)의 恨(한)이 될 것은 勿論(물론)이 아닌가.

툭하면 日本(일본) 人士(인사) 中(중)에는 이러한 말을 한다. 李朝(이조) 虐政(학정) 下(하)에서 지내든 朝鮮民族(조선민족)이 總督政治(총독정치)의 生命(생명) 財産(재산)의 安全保障(안전보장)으로 因(인)하야 滿足(만족)할 것은 勿論(물론)이라 한다. 이것이 果然(과연) 日本(일본) 人士(인사)의 朝鮮民族(조선민족)에게 對(대)한 心理的(심리적) 觀察(관찰)이라 하면 吾人(오인)은 寧(영)히 그 愚痴(우치)를 憫憐(민련)히 역일 뿐이다. 現代(현대)의 朝鮮人(조선인)이 過去(과거)의 朝鮮人(조선인)이 아닌 것도 勿論(물론)이어니와 設令(설령) 李朝(이조)의 虐政(학정)이 現代(현대)에 再現(재현)된다 할지라도 朝鮮人(조선인)은 그 改革(개혁)을 絶?(절규)할 것이 아닌가. 하물며 總督政治(총독정치)와 李朝政治(이조정치)가 民族的(민족적) 感情(감정)에 잇서서 그 根底(근저)가 懸殊(현수)함이랴. 이것은 現下(현하)의 日本(일본) 人民(인민)이 過去(과거)의 專制政治(전제정치)에 對(대)하야 反抗(반항)하든 經路(경로)를 回憶(회억)하면 反省(반성)할 바가 아닌가. 둘재는 日本(일본)의 爲政家(위정가)로 하야금 朝鮮問題(조선문제)를 云謂(운위)할 때에는 반듯이 國境警備問題(국경경비문제)와 師團增設(사단증설)의 必要(필요)를 力說(역설)하는 것이다. 果然(과연) 君等(군등)의 所見(소견)과 갓다 하면 엇지하야 暴露(폭로) 强獨(강독)이 一戰(일전)의 破滅(파멸)에 不堪(불감)하엿든가. 如何間(여하간) 朝鮮問題(조선문제)를 그대로 두고는 中日親善(중일친선)도 空念佛(공염불)이며 東洋平和(동양평화)도 口頭禪(구두선)에 不過(불과)할 것을 斷言(단언)하는 바이다. 적어도 二千萬(2천만) 衆(중)의 銳利(예리)한 心刃(심인)이 日本(일본)의 弱處急所(약처급소)를 隨(수)하야 機會(기회)대로 現露(현로)될 것은 現下(현하)의 情態(정태)가 아닌가. 이 곳 日本(일본) 人士(인사)의 反省(반성)을 促(촉)하는 바이다.

세계대세와 조선의 장래 (9)
일본과 조선의 관계


1
나는 지금까지 조선 내부의 사회적 변혁과 세계대세의 추이와 동양정세의 위기로 보아서 불과 4, 5년이면 태평양을 중심으로 한 세계적 풍운이 일어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물론 주관적 속단일는지 알 수가 없지만 만약 과거의 역사가 현재 대세를 낳았고 미래의 대세가 또한 현재 사실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라고 하면 결코 견강부회의 공론이 아닐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그러나 단지 논점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어떻게 복잡다단한 세계문제가 어떻게 유독 4. 5년을 전후로 해서 일어날 것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4, 5년 전후를 예언하는 것도 결코 황당무계한 공상에서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대개 인간사회의 10년이라는 시기는 개인으로서나 국가로서나 하나의 큰 계획을 세워 준비와 조직을 완성하는데 있어서 비교적 가장 필요한 장기간이다. 이러므로 중국 월나라 왕 구천은 10년의 와신상담 끝에 회계산의 굴욕을 씻었고 선조 때의 이율곡은 외족의 침입을 멀리 내다보고 10년의 병력 양성을 주장하지 않았는가. 이러한 의미에서 1919년 세계적 대전의 종식으로부터 1929년까지, 즉 지금으로부터 4, 5년만 지나면 10년이 차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면 세계대전의 종식으로부터 그동안 10년간에 그 사회, 그 민족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피폐된 국력도 부활될 것이며 가라앉은 원기도 일어날 것은 말할 바 없다. 하물며 현재 교통기관의 발달과 사상 전파의 영향이 과거 시대의 비해서 한층 더 빠르고 활발해 시간이 급격하게 흐르고 바뀌는 것이 현대의 특색이 아닌가.

2
그러면 이와 같은 멀지 않은 장래에 세계대세의 변동을 예상하고 또한 동양정국의 난리를 미루어 단정할 때 가장 특수한 사정을 지닌 일본과 조선의 관계는 어떻게 진전될 것인가. 이는 곧 내가 깊은 밤 잊지 못하고 길게 탄식하고 한숨 쉬는 이유이다. 과거의 일본이 백인종인 영국과 손잡고 동양의 같은 피부색 민족을 또는 압박하고 또는 위협하는 일을 했던 것이 현재 동양정국의 난국을 불러온 계기가 아닌가. 만일 과거의 일본으로 하여금 당초부터 동양 각 민족의 공존공영의 원대한 계획을 세우게 하였던들 결코 현재 일본 자체가 고립의 지경에 놓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파탄 난 살벌한 문명과 피폐된 백인종을 유도 계발하여 세계개조라는 인류의 거대한 위업을 동양 민족이 선도하여 완성했을 것이 아닌가. 이 어찌 천고의 한탄스러운 일이 아닐까. 그러나 과거는 과거일 뿐 추궁할 필요가 없거니와 현재 일본 인사의 감상이 어떠하며 소견이 어떠한지 나는 간절히 묻고자 하는 바이다. 적어도 조선문제의 해결은 동양 전체문제 해결의 전제가 되며 또한 요건이 될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왜 그러한가 하면 가장 민족적 관계가 밀접하고 문화적 은택이 깊은 조선민족을 유린 압박하는 것은 아무리 일본민족 전체의 의사가 아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데라우치 마사타케 무리인 군벌 일파의 배은망덕한 행동이라고 할지라도 적어도 반만년 역사적 배경과 2000만 민중의 총명을 지닌 조선민족으로서는 뼈에 사무치는 한이 될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툭하면 일본 인사 중에는 이런 말을 한다. 이조 학정 아래서 지내던 조선민족이 총독정치의 생명 재산의 안전보장으로 인하여 만족할 것은 물론이라고. 이것이 과연 일본 인사가 조선민족을 향한 심리적 관찰이라고 하면 나는 정말로 그 어리석음을 딱하고 가엾게 여길 뿐이다. 현대의 조선인이 과거의 조선인이 아닌 것도 물론이지만 만약 이조의 학정이 현대에 재현된다고 해도 조선인은 그 개혁을 절규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총독정치와 이조정치가 민족적 감정에서 그 밑바탕이 현저하게 다름에야. 이것은 현재 일본인이 과거의 전제정치에 대해서 반항하던 경로를 떠올리면 반성할 바가 아닌가. 둘째는 일본 위정가로 하여금 조선문제를 말할 때에는 반드시 국경경비문제와 사단증설의 필요를 역설하는 것이다. 과연 그대들의 소견과 같다고 하면 어찌하여 제정 러시아와 옛 독일이 한 차례 전쟁의 파멸을 감당하지 못했는가. 하여간 조선문제를 그대로 두고는 중일 친선도 공염불이며 동양평화도 구두선에 불과하다는 점을 단언하는 바이다. 적어도 2000만 민중의 예리한 마음의 칼이 일본의 약점과 급소를 따라 기회 닿는 대로 드러낼 것은 현재의 상태가 아닌가. 이는 곧 일본 인사의 반성을 재촉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