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진 이후 일본 내 자숙 분위기 확산…각종 축제와 이벤트 중지 혹은 연기 속출
벚꽃은 피었으나 찾는 이가 없다. 일본 시나노 강의 4월 봄밤 풍경.
그러나 올해는 동일본 대지진과 도쿄 등지의 ‘계획 정전’ 실시에 따라 공원 입구 등 곳곳에 ‘연회를 자숙해주길 부탁드린다’는 간판이 세워져 있다. 우에노 공원만이 아니다. 이노카시라(井の頭) 공원 등 도쿄 시내 다른 벚꽃놀이 명소에도 마찬가지로 자숙을 권유하는 간판이 세워져 있다. 예년 같으면 설치됐을 간이 화장실이나 임시 쓰레기장도 없으며, 화려했던 야간 조명도 크게 줄었다.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지사는 “벚꽃이 피었다고 한잔하면서 담소하는 그런 상황이 아니다. 적어도 불을 밝히고, 꽃구경하는 것 같은 일은 자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기자회견(3월 29일)에서 강조했다. 대지진과 자숙 권유 등으로 올해 상춘객 수는 격감했다. 물론 이 자숙은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고생하는 만큼 같은 일본인으로서 근신해야 한다’는, 남을 배려하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자숙, 자숙 해서는 일본 경제가 침몰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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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숙은 벚꽃놀이뿐 아니라 일본 전통 축제인 마쓰리(祭), 공연, 이벤트, 관광업계와 외식 산업 등 일본 사회 전체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정했던 결혼식이나 입학식의 연기, 취소가 속출하고 있다. 계획 정전 실시 후 도쿄의 긴자(銀座) 등 도심 번화가도 저녁이 되면 간판 불이 일제히 꺼지고, 식당이나 술집도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 전년 대비 매출이 30% 이상 줄었다고 한다. 백화점은 매출이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고 비명을 지른다. 지리적으로 동일본 지진의 진원에서 멀리 떨어진 서일본 지역도 자숙하는 분위기다. 지진 발생 후 일본은 자숙이란 무거운 공기에 더욱 가라앉고 있다.
매년 5월 도쿄의 아사쿠사(淺草) 신사에선 약 150만 명의 관중이 운집하는 여름 풍물시(風物詩) 산자 마쓰리(三社祭)가 열리는데, 올해는 동일본 지진의 영향으로 자숙하자는 취지에서 개최하지 않기로 했다. 이 마쓰리가 중단된 것은 1945년 8월 일본 패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신사에 들어온 찬반 의견 가운데 마쓰리 취소에 찬성하는 의견이 60% 이상이고, 반대 의견 중엔 ‘자숙이 경제 침체를 부른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매년 7월 말 약 1만2000발의 불꽃으로 도쿄의 밤하늘을 수놓는 ‘도쿄 만 대불꽃놀이’도 올해에는 개최되지 않는다. 주최 측인 도쿄 주오(中央) 구는 “지진피해의 심각성과 피해자의 어려운 생활을 배려해 취소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정전이나 여진 위험이 덜한 편인 서일본 지역에도 자숙 분위기가 퍼져가고 있다. 일본 전통주 마시기 시합 축제인 고치(高知) 현 고난(香南) 시의 ‘도로메 마쓰리(どろめ祭)’는 1959년 개최 이래 처음 취소됐고, 후쿠오카(福岡) 시는 성벽의 야간 조명을 없앴다.
일본의 신학기는 한국과 달리 4월 초에 시작한다. 동일본 대지진이 공교롭게도 졸업식과 입학식을 앞둔 3월 11일 발생해 졸업식과 입학식을 못한 경우가 많았다. 지진 여파로 신학기 개강을 연기하는 대학도 4월 1일 현재 전국 110여 군데에 이른다. 학교시설이 큰 피해를 입은 센다이(仙台) 등 동북 지역의 대학은 물론, 도쿄 등 간토(關東) 지역 대학도 20% 정도가 개강을 늦추고 있다. 교통 사정과 계획 정전을 고려한 조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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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후 결혼식 연기도 속출하고 있다. 도쿄의 유명 결혼식장인 핫포엔(八芳園)의 경우 결혼식과 피로연 연기가 60건 이상 있었다. 동북 지역에 사는 친척 등이 피해를 입어 어쩔 수 없이 연기하는 경우도 있으나, 절반 이상은 ‘이 같은 시기에 축하받아야 하는 행사는 일단 자숙하고 싶다’는 것이 이유다. 연간 2000건의 결혼식을 치르는 도쿄의 고급 결혼식장 친잔소(椿山莊)도 마찬가지로, 3월에 30~40건의 결혼식이 취소 또는 연기됐다고 한다.
민방 TV에 CF를 내고 있는 기업 중 80% 이상이 제품 선전을 삼가는 대신, ‘SMAF’ ‘아라시(嵐)’ 같은 인기 연예인이나 축구 국가대표 선수가 나와서 ‘일본의 장점은 단결력입니다’ ‘일본의 힘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공익광고가 빈번히 등장, 자숙 분위기 조성에 일조한다.
일부에선 “이럴수록 이벤트 벌여야”
이처럼 일본을 뒤덮은 자숙 분위기에 다른 의견을 내놓는 목소리도 있다. 오사카(大阪) 부의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지사는 3월 말 기자회견에서 “오사카, 간사이(關西)는 통상 이상으로 확실히 하겠다”며 과도한 자숙은 피해 나갈 방침임을 언명했다. 한 경제 평론가는 “제대로 돈을 벌지 못하면 피해지역에 의연금도 보낼 수 없다. 이 때문에 나는 자숙 반대운동을 벌여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연예인은 “이벤트를 취소할 것이 아니라 이럴 때일수록 일부러라도 이벤트를 열어 동북 지역 술이나 특산물을 팔아주는 것이 그들을 돕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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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자숙 분위기에 대해 한 사회심리학자는 “같은 일본인이 고생하고 있는데 자신만 즐겨서야 되겠느냐는 ‘꺼림칙함’의 영향력이 크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같이 일본인으로서의 연대의식이 강한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앞으로는 부흥을 위한 힘으로 바꾸어나갈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이와 관련해 미국 ‘뉴욕타임스’는 최근 ‘일본은 자숙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기사(3월 30일)에서 자숙 현상이 과잉 상태임을 지적하며, 기업과 학교 행사의 취소가 일본 국내총생산의 60%에 이르는 소비지출을 대폭 감소시켜 ‘본래 정체한 일본 경제에 침식효과까지 가져와 도산을 급증시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이웃의 비극에 근신하는 일본적인, 동양적인 미덕이라고 할 수 있는 자숙이 경제 침체를 가져오는 원인도 된다는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어쨌든 지난해 세계 경제대국 2위 자리를 중국에 내주고 3위로 전락한 일본 경제는 지진 여파에 따른 제조업체의 조업 중단에다, 자숙에 따른 소비 위축 등으로 더욱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도쿄=이종각 한일관계 전문 칼럼니스트
<주간동아 78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