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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길]‘愛人敬天’ 도전 40년

입력 | 2009-10-20 03:00:00

〈37〉사장님 집은 동네 놀이터
마당 넓었던 신당동 집에는
동네 친구들 몰려와 시끌벅적
네 아이 어울리며 사는법 배워




장영신 회장이 1987년 딸 채은정 씨(현 애경㈜ 전무)와 함께 제주도에 놀러가 찍은 사진. 장 회장은 채 전무가 어릴 적부터 바쁜 엄마를 대신해 장을 보러 다녔을 정도로 듬직한 딸이었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 애경그룹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저희끼리, 또는 친구까지 불러 모아 집에서 잘 놀았다. 당시 서울 중구 신당동 집은 정원이 넓어서 힘이 넘치는 아이들이 뛰어 놀기에 딱 좋았다. 그래서 저희끼리 놀다가 나중에는 동네 친구 여럿을 불러들여서 함께 놀곤 했다.

우리 아이들은 모든 일을 스스로 알아서 했지만 또 하나 기특한 점은 친구네 집이 잘살든 못살든 가리지 않고 누구와도 잘 어울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동네의 가난한 집 아이도 우리 집에 모여 숨바꼭질이나 잡기놀이를 함께했다. 우리 집은 동네 아이에게 ‘공용 놀이터’였다. 오랜만에 주말에 집에 있을 때 간식이라도 만들어주면 갖고 나가 친구들과 나눠먹고 지칠 때까지 뛰어놀았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아이들이 구김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옛날에는 집집마다 아궁이가 있었는데, 이 아궁이를 막는 쇠뚜껑이 사라졌다. 퇴근 뒤 아이들을 불러 앉혀놓고 물어보니 엿장수가 지나가자 엿을 먹고 싶은 마음에 동네친구들과 힘을 합쳐 뚜껑을 떼어낸 다음 엿장수에게 갖다 주고 엿과 바꿔먹었다는 설명이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꾸짖으려다가 생각되는 바가 있어 참았다.

군것질거리가 변변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넉넉하지 못한 동네친구들이 엿을 먹고 싶어 하기에 친구들 생각에 내다 팔았다고 설명하는데 이를 두고 꾸짖는다면 옳은 교육방법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어른의 허락 없이 내다 판 행동은 화가 났지만 친구들의 형편이 넉넉하지 않음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고 보고 다음에는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는 선에서 끝냈다. 이렇게 사람을 가리지 않고 사귀며 자라서인지 지금도 우리 아이들은 회사에서 직원들을 스스럼없이 대한다는 평을 듣는다.

‘한 어미의 자식도 아롱이다롱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 집 네 남매도 어릴 때부터 성격이 조금씩 달랐다. 첫째(채형석 애경그룹 총괄부회장)는 맏이라서인지 조용하고 진중한 면이 있었다. 아버지가 없으니 동생들을 자기가 보살피고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을 어렸을 적부터 하는 듯했다. 동생이 잘못하면 아버지를 대신해서 야단치는 역할도 형 몫이었다. 남편을 잃고 내가 정신을 놓고 있을 때 큰아들이 내게 “학교 앞에서 뽑기 장사라도 해서 먹고 살면 된다”고 위로했던 일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다.

딸(채은정 애경㈜ 전무)은 차분하고 어른스러웠다.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주전자나 냄비가 필요하다고 하면 바쁜 엄마에게는 얘기도 하지 않고 직접 시장에 가서 장을 봐오곤 했다. 세 아들은 딸을 가리켜 천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딸이지만 내가 봐도 대견한 아이였다.

둘째 아들(채동석 애경그룹 유통 및 부동산개발부문 부회장)은 형제 중에서 사교성이 가장 뛰어났다. 동네 아이들을 주동해서 집으로 불러들여 마당에서 뛰어노는 일은 늘 둘째 아들이 도맡았다. 어느 날은 광으로 쓰던 장소에서 불이 났다. 불을 끄고 나서 범인을 잡고 보니 둘째 아들이었다. 동네 애들과 광에 들어가서 놀다가 불을 냈다. 장난기도 많았다. 둘째는 대문 위에 칠판지우개를 살짝 올려놨다가 내가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머리 위로 칠판지우개가 떨어지게 해 나의 머리며 어깨를 허옇게 만들어놓곤 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는 혼날 생각은 않고 깔깔대며 신나게 웃던 장난꾸러기였다.

막내(채승석 애경개발 사장)는 형 누나와 나이 차가 많아 함께 어울려 논 시간은 별로 없었다. 넷째가 뛰어놀 나이에 형 누나는 중고등학생이라 어울려 놀 수 있는 시간이 적었다. 그래도 숙제할 때면 형이나 누나에게 물어보면서 많이 배웠다고 한다.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아버지를 잃어 유복자나 다름없고 손위 형제와 터울이 많이 져서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라지 않을까 걱정도 많이 했지만 우려와 달리 쾌활하게 자랐다.

회사에서 정신없이 일하다가도 퇴근 시간이 되면 아이들을 걱정하는 세월을 20년 넘게 보내다 보니 막내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도 저녁이면 마음이 급해졌다. 정작 아이들이 엄마보다 더 바쁘고 엄마를 필요로 하지 않는데도 그랬다.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