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의 밤에 ‘국회로 가서 시민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군인과 경찰은 “지난 1년을 고통과 후회 속에서 살았다”고 털어놨다. 지시에 맞선 이도, 혼란 속에 따르게 된 이도 있었지만 남은 건 비슷한 죄책감과 무기력감이었다.
계엄 해제가 가능했던 배경에는 일선 장병들의 ‘항명’이 있었다. 진압 명령을 거부한 박호준(가명) 장교는 그날 비상소집 직후 부대가 순식간에 ‘전시 체제’로 전환되는 걸 목격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 선포가 TV로 흘러나오자 지휘부는 “합법적 명령”이라며 국회로 출동하라고 했다. 박 씨와 동료들은 떠밀리듯 부대를 나섰지만 ‘이건 옳지 않다’는 생각으로 국회 진입을 거부했다. 그는 “역사의 죄인이 될 수는 없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명령을 내린) 사령관을 체포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실제 국군 방첩사령부 병력은 국회 주변 수백 m 밖에서 대기하며 ‘진입 불응’ 상태를 유지했다. 9월 법정에서 이들은 “국회로부터 네 블록 떨어진 곳에서 기다렸고, 편의점에서 생수를 사 마시며 시간을 끌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방첩사 인원 중 국회나 선관위에 발을 들인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반면 출동 지시에 그대로 휘말린 이도 있었다. 국회 봉쇄를 지휘한 경찰 간부 중 한 명이었던 김정원(가명) 씨는 그날 밤 혼란한 가운데 부하 직원들을 데리고 국회로 향했다. ‘가서 무얼 하느냐’고 묻는 부하에게 할 말이 없었다. 국회 출입문 앞에서 시민과 경찰이 충돌하자 김 씨는 ‘일단 안전사고부터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평소 집회 현장에서 질서 유지를 하듯 시민을 통제했다. 계엄이 해제된 뒤 경찰 내에는 오랫동안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그는 “처음 몇 달은 서로에게 ‘미안하다’고만 했습니다. 그날 했던 판단 하나하나가 지금도 후회로 남습니다”라고 말했다.
계엄 선포와 국회 봉쇄를 결정한 체계는 모두 ‘위’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지금 징계·심의 대상이 된 다수는 당시 현장에서 버티던 실무자들이다. 박 씨 등 그날 용기를 냈던 장병들도 국방부 징계 논의와 인사위원회를 앞두고 있다.
박 씨는 허무함과 무기력함을 토로했다. 그는 “탄핵 정국 초기 정치인들이 ‘항명한 군인은 지키겠다’고 공언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며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걸 설명해도 ‘출동했다’는 이유 하나로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면, 어느 군인이 진심으로 나라를 지키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