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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군주론, 70년前 일본서도 통했다

마키아벨리 군주론, 70년前 일본서도 통했다

Posted May. 30, 2020 08:28,   

Updated May. 30, 2020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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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에도시대 사상가이자 유학자인 오규 소라이(荻生조徠·1666∼1728)를 마키아벨리에 견준 사람은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1914∼1996)다. 일본 ‘정치학계의 천황’으로 군림했던 마루야마가 1952년 펴낸 ‘일본정치사상사연구’(김석근 옮김·통나무·1995년)에서다.

 마루야마는 이 책에서 소라이의 다음과 같은 말에 주목한다. “… 군주 된 이는 설령 도리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만한 일이라 하더라도 백성들을 편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기꺼이 하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마루야마에 따르면 이 대목은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다는 정치 목적을 위해서는 도리에 어긋난다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 유교도덕의 가치 전환이다.’ 그리고 이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떠올리게 한다. “… (군주는) 그러나 또 악덕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통치를 할 수 없는 그런 경우에는 비방을 감수하는 것을 주저해서도 안 된다.”

 즉 소라이는 주자학이 개인 도덕을 정치적 결정에까지 확장하는 것을 단호하게 부인했다는 점에서 마키아벨리와 상통한다는 것이다. 정치와 도덕의 분리가 근대정치를 상징한다고 볼 때 소라이는 이미 현실정치(Realpolitik)에 한걸음을 내디뎠다. 당시 조선은 예송(禮訟)논쟁이 한창이었다.

 소라이가 1727년 지은 ‘정담’은 당시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자문에 응한 정견을 묶었다. 주자학의 공리공담(空理空談)에서 벗어나 정치, 경제, 관리의 등용과 처우, 사회질서 등 4가지 주제의 여러 사안을 윤리가 아닌 현실에 바탕을 두고 풀어냈다.

 마루야마가 “일본의 근대를 배태(胚胎)”하고 “정치를 발견”했다며 소라이를 극찬한 대목을 낳은 사례 중 하나도 실려 있다. 가난과 기근에 시달리며 유랑하다 끝내 홀어머니를 버린 승려 ‘도입(道入)’ 이야기다. 그에 대한 처벌을 놓고 다른 가신들은 ‘어머니를 버릴 마음은 없었다. 유교적 윤리에 어긋나지 않았다’며 선처를 주장한다. 그러나 소라이는 도입 같은 사례를 만든 그 지역의 행정관리자와 고위 관리의 책임을 준엄하게 물어야 한다고 답한다.


민동용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