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보다 경제 여건이 낫다고 할 수 없는 국가들도 올해 들어 신용등급을 올리면서 한국만 제자리에 묶어두는 것은 부당하다. 한국은 남유럽 국가들보다 재정건전성이 훨씬 뛰어나지 않은가.
지난달 19일 세계 3대 신용평가회사 중 하나인 무디스의 미국 뉴욕 본사. 허경욱 기획재정부 1차관과 윤여권 뉴욕총영사관 재경관, 손병두 재정부 국제금융과장 등 한국 정부 대표단 3명이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자 무디스 관계자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며칠 뒤인 24일 국가신용등급 조정에 필요한 사전 조사를 위해 한국을 방문하는데 이에 앞서 직접 날아온 것도 그렇고 협상 태도가 과거와는 확연하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늘 수세적인 자세로 국제 신용평가회사들과의 협상에 임했던 한국 정부가 올해는 강공으로 선회한 것이다. 무디스가 14일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A2에서 A1으로 올린 데는 한국 정부의 이러한 선제적인 압박이 주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부는 올해 초부터 이번만큼 신용등급을 올리기 좋은 기회는 흔치 않다고 판단해 철저한 준비를 해왔다. 손병두 국제금융과장은 한국 경제의 회복 성과가 워낙 출중했고, 신용평가회사들이 남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와 관련해 적절한 등급 조정 및 전망을 제대로 못했다는 비판이 거세게 제기되는 상황이어서 이들을 압박하기 좋은 기회였다고 말했다.
특히 무디스와의 협상에서는 지금까지 신용평가회사들과의 면담 과정에서 정부가 사용하지 않았던 카드도 많이 등장했다. 재정부는 그동안 한국 경제의 상황을 설명하는 데 그쳤지만 이번에는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남유럽 국가, 한국보다 경제 여건이 떨어지면서도 신용등급이 올라간 다른 국가들과 직접적으로 비교하며 한국의 신용등급이 저평가돼 있다고 따졌다.
협상에 참여했던 재정부의 한 관계자는 무디스와의 대화는 긴장도가 높게 진행됐다며 실무진 사이에선 목소리를 높이고 얼굴을 붉히는 일도 있었다고 전했다.
안보 항목과 관련해서도 접근법을 달리 했다. 신용평가회사들이 남북관계 악화 등 한국의 지정학적 리스크를 문제 삼으면 기존에는 통일 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는 식의 설명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이번에는 왜 통일 비용만 생각하고 통일 후 잠재력과 긍정적인 효과는 전혀 거론하지 않느냐고 반박했다. 특히 6자회담에 참여하는 강대국들도 모두 북한의 급격한 변화를 원하지 않고, 6자회담을 통해 충분히 한반도 상황을 안정적으로 끌고 갈 수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강조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난달 26일 천안함 침몰 사건이 터지자 재정부 내에서는 국가신용등급 상향 조정은 물 건너갔다는 탄식이 나오기도 했다. 이 와중에도 무디스에 한국 경제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서한을 보냈다. 그 결과는 한국 정부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국가신용등급의 상향 조정이었다.
이세형 turt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