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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검사로 6•25전사 남편 찾은 김상화 할머니

DNA검사로 6•25전사 남편 찾은 김상화 할머니

Posted June. 06, 2009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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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년 만의 귀환. 그러나 한줌의 뼈에 불과했다. 행방을 몰라 오랜 시간 가슴앓이를 한 대가치고는 너무나 야속하고 허망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5일 국방조사본부 과학수사연구소의 유전자(DNA) 분석 결과 2007년 강원 화천군에서 발굴한 한 유해가 625전쟁 당시 2사단 소속 김상희 일병인 것으로 판명됐다고 밝혔다. 박신한 유해발굴감식단장은 유해에서 추출한 유전자가 유전자 샘플로 등록된 아들 김공준(62) 씨의 것과 일치해 부자() 관계로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김 일병은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9월(당시 30세) 부인과 두 아들을 남기고 입대했다. 발굴단은 김 일병이 1951년 1월 중공군이 공격해 올 때 가평지역에서 포로가 됐다가 북한군에 의해 전우들과 함께 화천에서 집단 사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원이 확인된 5일 김 일병의 부인 김상화 할머니(87제주 제주시 한경면 신창리)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뙤약볕 아래서 마늘을 캐고 있었다. 뼛조각으로 돌아오면 무슨 소용이수과(소용이 있습니까).

살아 돌아왔으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궁금했다. 무사 이리 저둘렸수과(왜 이렇게 고생시켰나). 김 할머니의 이 한마디에는 그동안 눈물을 삼키며 인고했던 한이 모두 담겨 있었다. 과거를 회상하던 김 할머니의 눈이 어느새 붉어졌다.

1950년 음력 8월 14일. 추석 명절을 하루 앞둔 그날이 남편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당시 군에 자원입대한 남편은 제주한림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김 할머니는 바다에서 직접 잡은 소라, 밭에서 캔 고구마를 삶아 보따리에 이고 찾아갔다. 차비가 없어 자주 가볼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추석을 앞두고는 얼굴을 보고 싶었어요. 검게 그을린 얼굴, 어려운 걸음에 고마워하며 미소 짓는 얼굴이 마지막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 남편은 이틀 뒤 전쟁터로 떠났다. 남들은 떠나는 날 배웅했지만 김 할머니는 또다시 남편을 찾아갈 차비가 없어서 가지 못했다.

남편은 결혼한 지 2년 만에 일본군에 징용당해 3년 동안 만주벌판 등지에서 고생했다. 광복된 후 38선을 걸어서 넘어왔다.

전쟁이 터진 뒤 남편이 어느 날 술을 너무 좋아해서 이대로 있다가는 제대로 살지 못할 것 같다. 군대에 들어가 나라를 지키며 인생을 새롭게 설계해 보겠다며 자원했어요.

1951년 음력 1월. 김 일병은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부대장의 편지가 온 것을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겼다. 그해 행방불명 통지서가 날아왔고 이듬해부터 음력 6월 5일, 남편의 생일에 꼬박꼬박 제사상을 차렸다. 제주시 한경면 충혼묘지에 속이 텅 빈 봉분을 만들었다. 현충일에는 어김없이 남편이 좋아하던 소주를 올렸다.

눈물이 모두 말라 버린 줄 알았는데. 이젠 원망도 어수다(없어요). 속이 텅 빈 묘를 채울 수 있어 다행이우다. 나중 하늘나라에 강(가서) 얼굴이라도 보게 되면 그동안 고생한 이야기나 해보쿠다(하겠어요). 김 할머니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훔쳤다.



임재영 류원식 jy788@donga.com rew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