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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가 국적이 없다니

Posted August. 13, 2005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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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씨의 남편이자 단재의 장남인 신수범() 씨는 1921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나 이듬해 한국으로 왔다. 단재 선생의 자녀는 3남 1녀였지만 장남만 빼고 모두 어릴 때 숨졌다.

단재 선생의 부인 박자혜() 여사는 아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수범 씨가 12세가 되던 1933년 수범 씨를 호적에 올리려 했다.

그러나 단재 선생은 일제가 1912년 새 호적법 조선민사령에 근거해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리는 것조차 수치로 여겨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수범 씨는 외할아버지의 호적에 올려져 미혼모의 자식처럼 살아야 했다. 수범 씨 호적의 아버지 난은 당연히 공란으로 남겨졌다.

1967년 수범 씨와 결혼한 이 씨는 이후 40년 가까이 단재 선생과 남편, 아들에게 제대로 된 호적을 만들어 주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 씨는 담당 관청을 찾아가 단재 선생의 족보와 사진을 내밀고 상황을 설명했지만 오히려 누가 독립운동을 하라고 했느냐며 문전박대를 받기 일쑤였다고 회고했다. 참다못한 이 씨는 소송을 냈고, 1986년 서울가정법원은 수범 씨의 호적 개정을 허락했다. 비어 있던 신 씨의 호적에는 신채호가 아버지로 기재됐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호적이 제대로 정리돼 있지 않다 보니 신채호는 수범 씨의 아버지일 뿐 이전 호주로서는 인정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기가 막힌 일도 겪었다.

1991년에 수범 씨가 사망하자 수범 씨의 자식이라며 한 남자가 이 씨를 찾아왔다. 그가 가져온 제적()등본에는 단재 선생이 전 호주로 돼 있었다.

꼬박 10년의 소송을 거쳐 그 남자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과정에서 수범 씨의 무덤에서 뼛조각 2개를 빼내 유전자 검사를 거친 뒤 이 남자가 수범 씨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이 씨는 이 남자가 단재 선생이 남긴 충북 청원군의 땅 2000여 평을 노린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씨는 아들이 단재 선생의 손자임을 인정받기 위해 별도로 소송을 내 지난달에야 법원의 인정 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씨는 지난해 위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다. 독립운동가의 집에 시집와 평생 온갖 고초를 겪은 탓이라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그는 지난해 9월 청원군에 있는 단재 선생의 묘를 바로 옆으로 임시 이장했다.

묘가 계속 무너져 내리는데도 군청에서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충북도기념물(제90호)이라며 손도 못 대게 하더라고요. 자손들의 고통은 외면하고 그나마 남아 있는 선생의 흔적은 방치되고 있는데 국가에서 훈장을 주면 뭐 합니까.



동정민 ditto@donga.com